풍운사일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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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39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소하령을 같이 동행시키겠다는 은하문주의 말은 여행을 하면서 사실로 드러났다.
소하령은 도시에 들릴 때마다 최고급 객잔에서 숙식을 해결해 주었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과 건량도 제일 좋은 것으로 장만해서 일행을 불편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분명 번천검은 운호 일행이 산속에서 사는 도사들이란 판단을 내리고 모든 경비를 소하령이 내도록 조치했던 모양이었다.
그 덕에 운호 일행은 정말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노숙도 해야 했으나 이 정도면 이전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여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중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되는 형문산(荊門山)을 통과하다 보니 삼 일이 꼬박 걸려 일행의 행색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그랬기에 의창(宜昌)에서 짐을 푼 것은 당연했다.
형문산을 넘기 전에도 이틀이나 노숙을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객잔에서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소하령은 다른 때와 달리 까탈을 부리지 않고 의창으로 들어서자마자 곧장 눈으로 보이는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객잔은 이 층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깨끗해 보였고 규모도 작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언제나 끗발이 제일 큰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다.
그런 진리를 거부하고 싶다면 스스로 돈을 내면 되지만 운호 일행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객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소하령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객잔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탁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향기롭고 고소한 냄새.
산에 살 때는 채식을 주로 하며 무위자연을 꿈꿨으나 속세에 내려와 온갖 산해진미를 맛본 후부터는 먹는 걸 참으면서까지 선계로 들어가겠다는 상상은 버린 지 오래되었다.
점창은 도가이면서도 실전검파였으니 헛된 규율로 제자들을 닦달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건량만 먹었더니 입이 다 꺼칠해졌다.
소하령은 운상의 눈을 슬쩍 확인한 후 궁보계정을 비롯해서 오향장육 등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요리들을 시켰는데 백주까지 곁들여서 일행의 얼굴을 활짝 피게 만들었다.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돌아가자 운여의 입이 슬쩍 열렸다.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운상을 위해 주문하는 소하령의 행동을 그냥 넘기기에는 찜찜한 뭔가가 있었다.
“하령아, 너 운상이 좋아하냐?”
“뭔 소리에요.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운상 오라버니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운여 오라버니도 줄곧 봐왔으면서 왜 그래요?”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지.”
“그런데요?”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시비 거는 거죠?”
“아니, 사실을 말한 거야.”
“주문 취소할까요?”
결정적 한마디에 운여의 입이 쑥 들어갔다.
돈 낼 사람이 안 먹겠다고 버티면 그걸 누가 말린단 말인가.
운호가 급히 끼어든 것은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허, 한번 시킨 걸 어째 취소한단 말이냐. 운여 말은 그러니까… 너희들이 잘 어울린다는 거였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 거다. 그렇지?”
“응… 으응.”
“그러니 오늘은 맛있게 먹고 오랜만에 몸을 깨끗이 씻은 후 푹 쉬다가 가자.”
소하령의 눈치를 슬쩍 본 운호가 말을 다른 데로 돌리자 운상이 피식 웃었다.
친구 놈들 하는 짓이 귀여운 모양이었다.
소하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환골탈태를 겪은 운상은 예전과 달리 훨씬 귀티가 났고 잘생겨졌기 때문에 소하령의 태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물론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내는 외모가 아니라 향기로 여인의 마음을 훔친다.
영혼을 홀리는 사내의 향기는 자상함과 사랑, 그리고 부와 명예 등 수많은 종류가 있었고 운상이 가진 것은 그중 소통이란 무기였다.
대화를 통해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은 여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상은 그녀에게 시간이 갈수록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중이었다.
운호와 일행의 얼굴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은 몇 마디의 농담이 끝나고 객잔을 살피면서부터였다.
“보통 객잔이 아닌 모양이군.”
“객잔은 객잔일 뿐이야.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를 뿐이지.”
“하긴 맞는 말이다.”
운호의 대답에 운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에는 상인들도 있었고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도 있었으며 중간 쪽에 무인들의 무리도 보였으나 대부분 무림과는 상관없는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기세가 다르다.
칙칙한 기운.
사람을 죽여본 사람에서만 흘러나오는 살기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운호 일행을 속일 수 없다.
절정을 넘어 절대의 경지로 깊숙이 진입한 운호 일행의 눈과 귀는 범인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예민해져 있었다.
때맞춰 점소이가 음식들을 들고 다가와 탁자에 내려놓았으나 운상은 젓가락을 드는 소하령의 손을 만류한 후 운호를 쳐다봤다.
“누굴 것 같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점쟁이로 보여?”
“아무래도 네가 가진 막사검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강호의 눈과 귀가 오죽하겠어. 누군가 마창과 일검마의 상처를 봤다면 사일검법을 추정할 수도 있었을 거다. 시신을 훼손하기 싫어 방치했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군.”
“어쨌든 밥 먹기는 그른 것 같네. 배가 고픈데 말이야.”
운상은 말을 끝내며 소하령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그녀를 향해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하령아, 아마 이걸 먹으면 넌 나하고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거다.”
“왜죠?”
“여기엔 무색무취의 극독이 들어 있기 때문이야. 네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은혜를 꼭 갚아라.”
“어떻게요?”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운호 일행이 젓가락을 들지 않고 기다리자 지금까지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객잔의 소음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발적 침묵이다.
시끄러웠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 속에 빠져 버리자 더할 나위 없는 긴장감이 슬금슬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냄새. 바로 살기.
장내에 있던 자들이 감춰두었던 살기를 한꺼번에 풀어놓자 객잔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살기를 단박에 제어한 것은 운호의 음성이었다.
크지도 않았고 기세도 담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정확하게 퍼져 나가 모든 사람의 귓가에 정확히 박혔다.
“일을 벌였다가 실패했으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어쩔 테냐. 그냥 물러간다면 억지로 목숨을 뺏지 않겠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덤비면 모두 죽인다.”
말은 끝났으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생사가 걸린 제안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여기 있는 자들 어느 누구에게도 결정권이 없다는 뜻이 된다.
객잔 문을 통해서 오 척 단구의 곱사등 노인이 나타난 것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저 운호 일행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천하의 마검을 이제야 보게 되는구나.”
“당신은 누구요?”
“노부를 보고 사람들은 혈염공이라고 부른다.”
“음…….”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다.
객잔에 모여 있는 자들의 음습한 분위기가 어디서 오는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천하 삼십팔세 중 유일하게 그 근거지가 어딘지 알려지지 않은 신비지문 살막.
살막은 삼백 년의 역사를 지닌 살귀들의 집단으로 당대 수장이 바로 눈앞에 있는 곱사등 노인 혈염공이었다.
살막은 최소 십만 냥 이상인 청부에 한해서 소속 무인들이 움직였고 그 숫자도 다섯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혈염공은 근래 십 년 동안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 만큼 움직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살귀를 이끌고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혈염공은 마창과 더불어 십오천강의 일인이었고 그가 이끄는 살귀들의 숫자는 적지만 일당백을 감당할 수 있는 절정의 무인들이었다.
운호가 신음을 흘리며 말을 끊자 운상이 슬며시 나섰다.
운상은 혈염공이 나타나자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대화가 끊긴 틈을 이용해서 지체 없이 말을 꺼냈다.
“혈염공, 막사검 때문에 오셨소?”
“자네는?”
“운상. 무풍검이라고도 불리오.”
“그런가. 팔비검과 헛갈렸는데 이제야 정확히 구분할 수 있겠군. 맞아. 막사검 때문에 왔다. 그러니 검을 조용히 넘겨주는 게 어떻겠는가?”
“싫다면?”
“보다시피 살막의 주력이 이 객잔에 모두 와 있네. 일하러 나간 애들 빼고 나머지는 다 데려왔지. 모두 합해서 칠십 둘이야.”
“그래서?”
“살막이 적은 숫자임에도 삼십팔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만 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막사검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목숨은 이 객잔을 중심으로 백 리 이내에서 끊어진다.”
“웃긴 소리를 하는군. 이보오, 혈염공. 나도 한마디 하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면 오늘, 바로 오늘 살막은 역사 속에 편안히 잠들게 될 거요.”
“황수전투의 용맹도 들었고 천검회와의 싸움도 들었다. 귀왕도 잡았고 패천일도에 이어 마창과 일검마까지 잡았으니 큰소리를 칠 만도 하다. 하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어떻게 다르단 말이오?”
“어떻게 다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막사검을 내놓으라던 혈염공은 운호가 콧방귀를 뀌자 지체 없이 객잔에서 물러났다.
참으로 특별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객잔을 채우고 있던 자들은 눈 한 번 깜박인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없었는데 심지어 점소이와 산대를 지키고 있던 주인까지 사라졌다.
순식간에 그 많던 자들이 사라지자 운호 일행은 탁자에 놓여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고 있는 오향장육과 궁보계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참으로 간단한 협박.
처음에는 무슨 소린가 알아듣지 못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살막은 살수답게 암습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간단하게 넘어갈 일도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조차 먹지 못할 판이니 잠잘 때나 목욕할 때, 밥 먹을 때가 모두 위험했다.
여행은 여행답지 못하게 되는 순간 고통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죽음과 연결되는 순간 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 운여의 입이 반쯤 튀어나왔다.
운여는 먹지 못하는 궁보계정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는데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 억울함이 큰 것처럼 보였다.
“눈앞에 있을 때 다 죽여 버릴걸 그랬지?”
“그 생각을 못했네.”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생겼다.”
“이젠 어떡하지?”
“어쩌긴. 일단 여기서 나가야지.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워야겠다.”
“다른 곳에 가도 배를 채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놈들이 우리의 행동을 감시할 테니 그냥 두겠어?”
“그럼 어쩔 셈인데?”
“일단 가지고 있는 건량으로 해결하면서 생각해 보자. 좋은 방법이 떠오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