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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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37화
청문자를 배웅하고 뇌현 대사까지 돌아왔기 때문에 소림의 방장실에는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심각하게 변해 있었는데 청문자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뇌인 대사였다.
그의 눈은 뇌공 대사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매우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정말 그들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구룡회를 개최해야 될지도 모르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무림의 상황은 고집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구룡회를 개최하게 되면 점창은 당연히 구룡 복원을 요구하게 될 겁니다. 그리되면 구룡회는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점창은 예전의 점창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를 갈고 올 테니 자칫 구룡 자체에서도 피를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점창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는 그 증거를 우리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아무런 성과도 없지 않는가?”
“범위를 축소시켜야 됩니다. 전부를 조사하는 것보다는 천검회와 팔황문에 비불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조만간에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는구먼…….”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그나저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 수많은 피를 어찌 막을 수 있을런지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주를 헤아리며 뇌공 대사가 말을 끝내자 무거운 한숨을 내리쉰 뇌인 대사의 입에서 나지막한 불호가 연신 흘러나왔다.
현재의 무림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욕심과 질시로 인해 싸움이 벌어지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니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어디가 지옥이란 말인가.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혈풍.
소림에서 비불을 푼 것은 벌써 삼 개월이 넘었다.
비불은 무림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소림의 정보 조직이었다.
워낙 뛰어난 무력을 지닌 무인들로 구성되었고 철저하게 존재를 은폐시켰기에 무림은 전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로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비불의 존재 때문이었다.
비불은 마음만 먹으면 무림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불은 다른 사안과는 달리 현재 무림에서 불고 있는 혈풍의 진원을 알아내지 못했다.
점점 시간은 흐르고 피는 강이 되면서 뇌인 대사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소림이 모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계를 알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그것이 불제자로서의 근본이었고 책임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점창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신비 세력의 정체를 확인한 후 더 이상의 혈풍을 막고 싶었지만 그리되면 구룡회의 분란과 또 다른 난장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 피가 지금 무림에서 불고 있는 혈풍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더라도 소림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당대의 구룡회 수장은 소림이었으니 구룡회의 화합과 번영을 책임지는 것도 소림이었다.
그랬기에 피를 부르는 구룡회의 긴급 소집을 피하고 싶었다.
앞으로 삼 년 후면 차기 수장 자리는 무당파가 맡아 구룡회를 개최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부담은 시간이 흐르면 무당파로 넘어가게 될 테니 그때까지 아무런 사단 없이 지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비불을 천검회와 팔황문에 집중시킨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지난한 일이 될 것이 뻔했다.
벌써 혈검쟁투와 막사검에 관한 비밀을 풀기 위해 파견된 비불이 다섯이나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특정한 누군가를 감시한 것이 아니었는 데도 다섯을 희생시켰으니 천검회와 팔황문에 비불을 더 집중시킨다면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묵직해져 가는 가슴.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힘들다.
그럼에도 뇌인 대사는 불호를 외운 후 두 사제를 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 달만 더 조사하는 것으로 해보게. 아무런 정보 없이 세 달 후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무림이 혼란에 시달린다면 그땐 점창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하세.”
“그리되면 안 됩니다. 자칫 구룡회가 해산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 우리가 감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처의 제자가 되어 세상을 관조하고 살아온 우리가 언제부터 이익을 따지고 안위부터 생각했단 말인가. 무림의 혼란을 막을 수만 있다면 구룡회에 생길지 모르는 혼란은 모두 내가 감당하겠네.”
운호 일행이 팔공산의 상봉에서 나온 것은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두 달에서 겨우 삼 일이 모자랐으니 보름만 있으려던 예정보다 거의 네 배나 더 걸린 셈이다.
상봉을 나서는 그들의 모습은 산에서 두 달이나 견딘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깊고 깊은 눈.
날카롭지도, 그렇다고 강한 기운을 나타내지도 않았지만 서 있는 자체만으로 압박감을 줄 수 있는 허허의 경지.
증진된 내공을 바탕으로 분광과 회풍을 재해석하고 검리의 움직임을 관조했다.
내공의 부족으로 펼치지 못했던 부분들이 해결되면서 분광과 회풍은 굉렬한 위력을 가진 천고의 검법이 되어 그들의 몸에 재장착 되었다.
분광과 회풍을 극성으로 익힌 운상과 운여는 예전의 날카로움을 꽁꽁 숨긴 채 한층 더 여유로워졌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운호였다.
오룡봉성에 이어 오기조원까지 내공을 끌어올린 운호는 이번 수련에서 후예사일을 집중 수련했다.
아직 깨달음이 모자라 마음에 들 만큼 익히지 못했지만 오 성에 달한 후예사일은 공간을 잘랐고 땅을 쪼갤 정도의 위력을 나타냈다.
이대로 몇 달만 더 수련하면 후예사일의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으나 운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사문에서는 그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중원천지.
남북으로 수만 리에 뻗어 있는 광활한 대지.
평생을 돌아다닌다 해도 십분지 일을 헤맬 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광대하고 끝없는 무인들의 터전이다.
운호 일행은 탕마행을 시행하면서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왕산에 대한 정보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누구나 알고 있는 장소라면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천왕산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산이었다.
그랬기에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것이 은하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기회도 좋다.
상봉에서 은하문이 있는 회녕까지는 불과 백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반시진만 달려도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결정을 내렸으면 행동에 주저함을 두지 않는 것이 운호 일행의 행동 지침이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신법을 펼쳤고 관도로 들어서서는 여유 있게 걸었다.
그랬음에도 회녕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공기 좋군.”
“어떤 공기?”
“세상 공기. 역시 사람은 사람과 섞여 살아야 한다. 봐라. 이곳이 천국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운상이 빙긋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물건을 팔기 위해 호객하는 상인들, 그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는 중년 부부와 젊은 여인들이 보였고 아낙네의 손에 이끌려 전병을 먹고 있는 아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에 들어 있는 환한 웃음.
인간의 삶이 있는 곳은 사람의 따뜻한 냄새가 같이 나는 법이다.
회녕을 건너뛰어 은하문으로 곧장 향했다.
걱정이 들었으나 무시했다.
만약이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그것을 무시한 것은 지닌 무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소하령에 의해 은하문은 운호 일행이 막사검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욕심이란 성인군자도 도둑으로 만든다고 했으니 은하문과 번천검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은하문을 찾은 것은 호천십문의 수장을 맡고 있는 번천검에 대한 믿음과 지금 상태에서 다른 대안을 찾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몸을 숨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소하령이 나타난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관도를 가로막고 운호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회녕이 은하문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소하령이 이렇게 길을 막고 기다린다는 사실은 회녕에 그들을 찾는 암안(暗眼)들이 쫘악 깔려 있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대처하는 법이 모두 달라야 원만한 강호 생활을 할 수 있다.
운호와 운여가 뒤로 슬쩍 물러서며 운상을 앞으로 떠민 것은 그런 원리를 준수하고자 하는 아주 효율적이고도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령아, 우리 기다렸어? 잘 지냈지?”
얼떨결에 앞으로 나선 운상이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으나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소하령은 잔뜩 눈을 부릅뜬 채 운상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보석처럼 영롱한 눈물 한 방울을 매단 채였다.
왜 그런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번천검을 대동하고 팔공산으로 돌아왔음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소하령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눈물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애틋한 걱정이었고 그녀의 화난 시선은 어디 갔었기에 사람 속을 이토록 태웠냐는 질책이 담긴 것이었다.
운상은 말을 해놓고 어쩔 줄을 몰랐다.
기어코 소하령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눈물은 언제나 마법처럼 사내의 가슴을 여리게 만든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운상이 천천히 다가가 소하령의 손을 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었을 때였다.
“하령아,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 너무 많이 다쳐서 상처를 치료하느라 숨을 수밖에 없었다.”
“어딜 다쳤었는데요?”
“죽을 뻔했어. 마창과 일검마를 상대하면서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부상을 당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쟤들도 마찬가지였어. 너를 그대로 기다리고 싶었지만 적들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어서 몸을 피한거야.”
“그럼 지금까지 상처를 치료했던 거예요?”
“응… 정말 커다란 상처였어.”
슬쩍 눈을 돌려 운호와 운여를 쳐다본 운상이 과장되게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계속해서 부상 입었던 곳들을 설명하자 부릅떠졌던 소하령의 눈매가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쌍심지가 한껏 내려왔을 때서야 운상의 말이 속도를 줄여 나갔다. 소하령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화가 풀려 있었는데 오히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손은 누군가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운상의 몸을 뒤져 상처를 확인까지 할 태세였다.
둘이 하는 짓을 보니 연인이나 다름없다.
그랬기에 운호와 운여는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다 커다랗게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 후 먼저 걸음을 옮겨 나갔다.
예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운상이 혼자서 떠들고 있었는데 이젠 상황이 역전되어 반대로 소하령이 대부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남녀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는 아마 날이 새도 모자랄 것이 분명했으니 운호와 운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하문의 정문으로 향했다.
번천검은 운호 일행을 맞이하고도 걱정했던 바와는 다르게 막사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창과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어왔다.
“대단하군, 대단해. 나는 자네가 정말 마창을 잡을 줄 예상치 못했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겠나?”
“진검이었습니다.”
“진창이었겠지?”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저 역시 열두 군데에 심한 부상을 입어 두 달 동안이나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십오천강에 속한 마창의 전력을 잡으면서 어떻게 멀쩡할 수 있었겠나. 아마 십제라도 마창과 싸웠다면 상당한 손해를 입었을 게야. 그럼에도 진정 대단한 일일세. 이제 마검의 명성은 십오천강을 아우르게 되었으니 점창의 명예가 천하를 떨치겠구먼.”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닐세. 자네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그나저나 자네들의 얼굴이 예전과 다르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강호의 늑대답게 번천검은 운호 일행의 외모가 변한 것을 지적하고 나섰다.
환골탈태를 이루면서 워낙 피부가 매끄러워졌고 탄력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예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운호의 대답은 조용했고 태연했다.
“치료를 하면서 산에 나는 약초들을 섞어 끓인 물로 전신욕을 병행했습니다. 워낙 상처가 컸기 때문에 저희는 하루 세 번씩 전신욕을 했는데 약초 중에 피부를 맑게 해주는 백선초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 저희 피부가 변한 것은 그로 인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운호의 대답을 들은 번천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운호 일행의 변화가 환골탈태로 인한 것이란 건 꿈속에서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백선초란 약초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화제를 돌린 것은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