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6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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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5화
거대한 대청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숫자는 오십이 훌쩍 넘어 육십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청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감에 사로잡혀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것만 같은 침묵을 지켰다.
현재 대청에 모인 자들은 천왕성의 전투부대 수장들이 대부분이었고 특수 타격대를 이끄는 자들도 섞여 있었다.
천왕이십오성 중 불과 여덟만이 자리를 같이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무력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전쟁을 위해 모인 자들이란 뜻이었다.
수장들은 출진 명령을 받기 위해 모였기 때문인지 살 떨릴 정도로 강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정이란 말인가.
태어나 무인으로 자라면서 오늘만을 위해 살아왔으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분위기가 무르익어 터질 정도가 되었을 때 한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고 긴 침묵을 깨뜨리고 나선 것은 바로 중앙 태사의에 앉아 있던 요문이었다.
현재 실질적인 천왕성의 주인이자 대계의 주재자이기도 했으며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제장들은 들으라. 선대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통을 이겨내고 결국 우리는 이 자리에 섰다. 그 옛날 우리 선조께서는 천하일통의 꿈을 꾸었으나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청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천왕의 힘을 과신한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무림을 업신여긴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였다. 들에 핀 꽃은 역경과 고난을 견디고 피어난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의 출정도 그러하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저한 전략을 수립한 후 때가 오기를 와신상담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오늘이다. 오늘 우리는 천하일통의 대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을 뗀다. 지금부터 총사가 각 부대의 진격로와 전략을 설명할 것이니 제장들은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들으라.”
“존명!”
전투부대 수장들의 복명은 우레 소리와도 같았다.
긴장에 사로잡힌 수장들의 음성은 은은하게 내력마저 담겨 대청을 흔들리게 만들 정도였다.
천뇌 설운호가 대청의 전면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 것은 복명이 끝나고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을 때였다.
설운호가 걸어 나간 곳에는 거대한 중원의 전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깃발 표시가 수없이 나열되었고 화살표의 방향도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설운호의 음성은 작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귀에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내력이 담긴 묵음을 쓰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대는 중원을 향해 삼로로 진군할 것이다. 기존에 진출했던 우리 예하 세력은 각 진격로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합류할 것이며…….”
천뇌 설운호의 설명이 끝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무림맹이 구성될 것이란 예측은 물론이고 각 파의 전력이 자신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연합할 것인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으며 전력에 맞춘 공격로와 부대의 구성도 세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과연 하늘이 선물해 준 특별한 머리를 가진 자다.
중원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음껏 요리를 하고 있었으니 무림은 그의 낚싯대에 걸려 발버둥 치는 물고기로 보일 정도로 수립된 계획은 완벽했다.
원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
바로 천왕성주 요환의 아들들이며 주요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를 맡고 있는 지휘관들이기도 했다.
탁자에는 술병과 안주들이 놓여 있었는데 벌써 몇 순배가 돌았지만 가지런한 모습이었다.
술은 마시되 안주는 건드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앙에 앉아 있던 요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켠 후 다시 잔을 채우며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좌측에는 둘째인 요홍과 넷째인 요수가 앉아 있었고, 우측에는 셋째인 요량과 다섯째인 요명이 자리를 했다.
무거운 기운.
요문의 호출로 들어왔으나 그동안 당해온 견제를 생각한다면 결코 편한 자리가 될 수 없다.
맏이인 요문이 전권을 틀어쥔 후 그들은 천뇌로부터 끊임없는 견제와 압박을 받아왔다.
원인은 단 하나.
그들 모두가 천왕성을 장악해도 충분할 만한 능력과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닌 무력은 창천일파요, 성정은 일심정도라.
상황만 변한다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요문과의 거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눈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친혈육이라도 권력이란 괴물이 중간에 끼게 되면 이성 대신 마성이 발동되는 건 다반사다.
부모도 없고 형제의 피마저 요구하는 것이 비정한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그들은 그 누구보다 우애 깊은 형제들이었으나 머리가 크고 권력이란 괴물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점차 마음속에 진심을 숨겨놓고 꺼내기를 주저했다.
요문의 입이 열린 것은 동생들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긴장된 모습으로 그저 술잔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홍아, 미안하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오신풍 말이야… 미안해.”
“형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사람이 했으니 내가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느냐.”
“잊은 지 오래입니다.”
“잊지 못하는 것 잘 안다. 오신풍은 너와 형제 같은 아이들이었으니 얼마나 슬펐겠느냐.”
“…….”
단도직입적인 말에 요홍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지만 오신풍은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며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의 충복들이었다.
그들을 부하가 아니라 형제로 대했으니 마검에게 당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채 돌아온 시신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통곡을 했었다.
마검에 대한 원한도 컸지만 천뇌의 행동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 보낸 것은 그에 대한 경고였음이 분명했으니 그 원한을 어찌 잊으랴.
그럼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되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하들을 사지로 내보내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했고 잊기 위해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참으로 지랄 같은 일이지만 시간은 약이 되었고 겨우 분노를 가라앉혔는데 요문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다시 건드려 왔다.
냉철한 이성으로 요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나 오신풍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삐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랬기에 끝내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형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 천뇌는 우리 형제를 이간질시키면서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 누가 형님을 제거하고 권력을 취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그자가 우리를 치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일 뿐입니다.”
“안다.”
“…안다고요?”
“그렇다. 그러나 총사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너희들을 압박함으로써 성의 어떤 세력도 다른 생각을 지니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그의 계책이었다. 내 혈육을 이용한 반간계를 시행함으로써 대계에 어떠한 차질도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으… 그런.”
요홍뿐만 아니라 나머지 형제들이 전부 무거운 한숨을 흘려냈다.
요문의 설명을 듣자 왜 그토록 자신들을 총사가 괴롭혀 왔는지 단박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척하면 착.
하나만 들어도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 단박에 유추 해석하는 능력들을 지니고 있으니 진정 뛰어난 두뇌들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을 할 일은 아니라 그들의 표정은 금방 다시 굳어져 갔다.
요문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들이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고 자신을 바라봤을 때였다.
“내가 오늘 너희들을 보자고 한 것은 이제 그런 행동들이 의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계가 시작된 이상 누구보다 너희들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대계의 완성에 전심전력을 다해주기 바란다.”
“그럴 것입니다.”
“나는 천하를 얻게 되면 너희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다. 내 혈육인 너희들이 천하를 경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정말… 이십니까?”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한 일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선조들의 염원인 천하통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노여움을 풀고 천왕성의 대계가 완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천하통일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나와 바로 너희들의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천왕성이 사천으로 진출한 것은 겨울에서 벗어나 새싹이 피기 시작했던 춘삼월 닷새째의 나른한 오후 무렵이었다.
번쾌검에 의해 정보를 얻게 된 구룡이 서둘러 무림맹을 결성하고 병력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사천의 주인으로 자부했던 청성이나 당문은 아예 그들을 막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천왕성의 병력은 칠천에 가까웠고, 사천 무림에 미리 진출해 있던 대도문이 합세하자 팔천으로 늘어났다.
불과 두 달 전까지 피 흘리며 싸우던 사천 무림의 패자 청성과 당문은 결국 손을 잡지 않았고, 천왕성의 진출을 허용한 채 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했다.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는 그들은 천왕성보다 서로를 더 미워해서 연합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행동은 결과를 최악으로 만들고 말았다.
대도문이 선봉에 선 천왕성의 병력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불과 삼 일 만에 도강언(都江堰)까지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
도강언은 청성산과 불과 하루 거리에 있는 도시로 청성 연합이 주재하고 있는 대읍과도 이틀 거리에 불과했다.
청당전을 위해 모였던 청성 연합의 숫자는 모두 천이백이었으나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반 이상을 차지했고 청성 진력조차 당문과의 싸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천왕성의 전력과 비교한다면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동맹 관계였던 문파들이 자파의 근거지로 돌아간 상태이고 사천 무림이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홀로 나선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랬기에 청성의 장문인인 만궁자는 연일 거듭되는 회의를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청성 혼자서 천왕성을 막는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일이었으니 무림맹이 방어선을 칠 것으로 예상되는 섬서로 후퇴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무림맹에서는 청성과 당문이 손을 잡고 어떻게든 사천에서 천왕성의 진격을 막아내 주길 바랐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혈검쟁투의 여파로 귀주와 광서, 호남이 천왕성 예하 세력인 천검회와 수라맹에 의해 장악되었다.
아직 점창이 운남에 버티고 있으나 천하남서는 천왕성의 세력권에 놓였다고 봐도 무방한 실정이었다.
그런 마당에 천왕성이 사천을 장악한다면 섬서와 호북, 강서를 잇는 선이 천하통일전의 주요 전선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들어 무림맹은 각 문파를 삼로로 구분해서 각각 섬서와 호북, 강서에 방어선을 쳤고 천왕성도 병력을 나누어 삼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천왕성과 무림맹의 첫 전투가 벌어진 것은 청성이 고심 끝에 섬서로 병력을 후퇴시키고 홍천에 방어선을 쳤던 삼월 보름이었다.
개전(開戰).
무림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천왕성과 무림맹의 전쟁은 청성과 대도문의 공방전을 시작으로 그렇게 개전되었다.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던 그날.
진달래는 꺾였고 산을 붉게 물들인 건 방금까지 살아서 생생하게 움직이던 무인들의 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