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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64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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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4화

천검회의 병력이 대둔산이 바라보이는 벌판에 나타난 것은 석양이 점차 짙어지는 미시 무렵이었다.

구백에 달하는 무인들의 숲.

외관상으로는 철혈문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 것으로 보였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죽어나간 자들은 귀주 남부의 중소 문파 무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전 육당의 수장들 중 오직 둘만이 목숨을 잃었고 삼화, 오룡, 칠수, 구혈객, 십이도, 이십삼객, 삼십이파 등의 특수 타격대도 칠 할이나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 굳이 천검회의 손실을 따진다면 삼 할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숨겨진 천검회의 전력은 훨씬 강하고 무서워 무림첩에 의해 동맹 관계가 깨지자 가차 없이 본색을 드러내며 압도적인 무력으로 철혈문을 압박했다.

철혈문의 전력 상당수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최근 오 일 만의 일이었으니 천검회는 자신들의 전력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자릴 잘 잡았군.”

“대둔산 자락을 무덤으로 삼을 생각인 모양이군요. 대형, 제가 나가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삼군 병력만 가도 충분할 겁니다. 몇 안 남은 놈들을 협공하는 건 창피한 일입니다.”

화검제의 반문에 파우신검 단극이 슬쩍 자신의 애검 홍일천을 들어 올렸다.

파우신검, 단극.

천검회 삼족의 일인이며 백대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절대고수다.

삼군 병력은 무망 지단 등을 포함해서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검제는 그의 검을 슬쩍 가로막으며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언제나 여유 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눈은 어느새 투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단극, 지금은 전쟁 중이다. 무인으로서 승패를 가르는 자리가 아니란 뜻이다. 내 말, 알아듣겠느냐?”

“…대형.”

“곧 주군께서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할 터인데 너의 고집으로 인해 병력을 잃는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주군을 뵐 수 있겠느냐. 우리는 최대한 병력을 아끼고 아껴 전위 역할을 해야 하는 부대라는 것을 잊지 말라.”

“소제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땅거미가 지기 전에 끝낸다. 그러니 휴식을 끝내고 부대를 정비시키도록.”

“존명!”

파우신검 단극은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백대고수에 포함될 만큼 절대적인 무력을 지닌 그였으나 화검제의 명에는 일말의 토조차 달지 않았다.

대신 화검제의 명을 받은 제장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우렁차게 복명을 외쳤다.

대둔산 벌판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한 지 불과 이각 만에 내려진 공격 명령이었다.

먼 길을 싸우며 쉴 새 없이 왔으니 지쳤을 것이다.

상처도 입었고 몸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럼에도 각 단 제장들의 명령을 받은 무인들이 자신의 자리로 지체 없이 움직이며 검을 꺼내 들었다.

붉은 석양.

그리고 그 석양 속에서 공격대형을 만들고 있는 무인들이 비장하게 어울리며 끈적끈적한 살기들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전장에 선 사내들의 숨결.

뜨겁고 거친 호흡이 대지에 부는 바람을 맞으며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호패왕은 천검회의 무인들이 진격 대형으로 전열 정비를 마치자 남아 있는 수뇌부를 불러 모았다.

수뇌부라 해 봤자 투혈당주 감황을 비롯해서 한서 지단에 나타났던 철혈칠십이도의 수장 강문 등을 합해 모두 일곱이 다였다.

그들도 호패왕처럼 전신이 상처투성이로 덮여 있었는데 핏자국도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자신의 자묵도를 끌어당긴 호패왕의 입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열렸다.

“이제 공격할 모양이구나. 혹시 가고 싶은 사람 있느냐?”

수뇌부에게 말한 것처럼 들렸으나 내공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전 병력이 다 들었다.

호패왕은 떠날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검을 내려놓고 떠난다 해도 비겁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이백의 병력은 꼼짝하지 않은 채 호패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을 텐데 호패왕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혈문의 무인들을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서 그들과 같이 죽는 것만이 그들에 대한 보답이니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자묵도를 천천히 꺼내어 어깨에 걸쳤다.

대감도의 일종인 자묵도는 일반 칼보다 배는 무거웠고 길이도 한 자나 더 길어 중병에 속하는 기병이었다.

천검회의 무인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벌판을 지나 둔덕을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전략도 없고 전술도 없다.

그저 힘이 닿을 때까지 죽이고 죽이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 되었을 때 편안히 눈을 감으면 된다.

좌우를 돌아보자 수하들이 자신을 향해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주 웃어주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이렇게 당당히 맞서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천검회가 귀주에 처음 나타났을 때 이렇게 싸워야 했다.

쫓기고 쫓겨 북부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느니 전력을 기울여 멋진 한판 승부를 펼치고 장렬히 산화했다면 이런 후회는 남지 않았을 것 같았다.

눈을 잠시 감자 돌아가신 선부가 떠올랐다.

서른 중반에 이미 철혈도법을 대성해서 귀주의 최강자로 등극한 아들을 보며 선부께서는 언제나 따뜻한 웃음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

철혈문을 무림 명문으로 키워달라는 선부의 유언이 떠오르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무림의 명문으로 자리 잡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대에서 이렇듯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죽더라도 선부를 뵐 면목이 없었다.

그럼에도 호패왕은 눈물 대신 웃음을 매달았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살아온 삶에 후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평생을 살았고 목숨마저 주고받은 수하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사랑과 의리를 얻은 채 한평생을 살았으니 그리 못 산 인생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인으로 태어나 이렇게 멋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어찌 후회와 절망만이 남았겠는가.

지그시 눈을 들어 전방을 바라보자 벌써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검회 측도 시간을 끌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

전장의 뒤편에서 싸움을 관장하며 다가오는 절대고수의 기세.

그냥 바라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숨 막히는 기세는 화검제의 존재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화검제가 귀주에 나타난 것은 그가 막 문주의 자리에 등극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존재를 무시했으나 삼 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을 뛰어넘는 무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절세의 고수.

남궁세가의 검성을 꺾은 그에게 천하인들은 화검제란 명호를 선사하며 무천십제라는 극존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정말 신비로운 사내였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사문이 어딘지, 심지어 어디 사람인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그는 그저 어느 날인가 불쑥 귀주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 화검제를 만나고 싶다.

무인의 꿈은 자신보다 강한 고수의 검에 죽음을 당하는 것이니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화검제 쪽으로 향했다.

워낙 많은 병력 차이였을까. 철혈문의 무인들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모래처럼 그렇게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안타까웠으나 슬퍼하지 않았다.

수하들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깨에 걸쳤던 칼을 고쳐 잡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운명이 그를 버렸으나 그는 아직도 무림십왕 중의 일인인 절대고수였다.

자묵도가 피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주변으로 몰려든 천검회의 무인들을 소멸시켰다.

단숨에 다섯의 목숨을 끊어낸 자묵도는 끊임없이 연환 되며 도기의 물결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폭풍 같은 진격.

그가 가는 곳은 지옥으로 변했고 수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절대고수의 위엄은 이토록 무섭고 강력한 것이었다.

그토록 무섭게 몰아치던 천검회의 진영은 그의 돌진에 의해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화검제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석양은 짙어질 대로 짙어져 하늘에 불꽃을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이미 철혈문의 무인들은 서 있는 자가 없었고 오직 그만이 남아 기어코 화검제의 앞에 섰다.

온몸을 피로 적신 호패왕의 모습은 마치 악귀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나 화검제는 눈처럼 하얀 백의를 입고 있어 두 사람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천검회의 막강한 무인들을 상대로 전력을 쏟아낸 호패왕의 숨결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마치 신음처럼 울려 나왔다.

“화검제, 그대의 모습이 참으로 귀하게 보이는구려.”

“고마운 말씀이오.”

“당신도 그동안 힘든 삶을 살았겠소.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았으니 어찌 그 삶이 편안했겠소.”

“나름대로 즐거운 삶이었소. 내 대에서 선대의 염원을 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으니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내가 귀주에 나오면서 그대의 소문은 참으로 많이 들었소. 진정한 무인이 드문 이 시대에 당신과 같은 무인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내 복이란 생각이 드오. 장렬히 산화한 당신의 수하들은 내 고이 묻어줄 테니 후회 없이 가시오.”

“당신의 검을 보여주실 수 있겠소?”

“웃으면서 가실 수 있도록 가장 좋은 검을 보여 드리리다.”

 

무림첩의 영향력은 컸다.

천하북동을 제외하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전쟁의 불길은 무림첩에 의해 일시에 수그러들며 정지되었다.

비슷한 생각과 이익으로 동맹을 맺었던 세력들은 전쟁의 상흔을 입은 채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철혈쟁투에 이어 청당전도 멈췄고 안휘전도 거짓말처럼 멈춰 버렸다.

그렇게 전쟁은 일시에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무림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삼십팔세 중 철혈쟁투를 벌였던 철혈문과 패도문이 패망하였고 청당전에서 대도문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맞이한 아미파는 결국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봉문을 선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휘전의 발단이 되었던 화월곡이 무풍사의 기습 작전에 말려들어 소풍에서 전멸하였고 팔황문과 전면전을 벌이다가 문주인 적풍마사 단곡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금사련은 폐문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삼십팔세 중 다섯 개의 세력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천하무림이 입은 타격에 비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청당전과 안휘전, 그리고 철혈쟁투에 가담했던 삼십팔세는 스물여덟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쟁투에 참여한 문파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패주들의 곁에서 머물던 수많은 중소 문파들이 싸움에 가담하면서 피가 강이 되어 흘렀고 산하는 시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아무도 이기지 못한 전쟁.

그 전쟁 속에서 천하의 칠 할에 달하는 세력들이 만신창이로 변하고 말았으니 전쟁은 그쳤으나 무림은 통곡 속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천하무림은 상처 속에서 시름에 잠겼으나 구룡은 무림첩을 발부하고 강대 세력들이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가자 지체 없이 곧바로 무림맹 창설을 주창했다.

구룡회를 소집하고 행동을 결정했던 구룡은 점창에서 전해준 정보를 가지고 천왕산을 수색하기 위해 무인들을 파견한 후 다섯 번 만에 극적으로 화산의 번쾌검이 살아 나와 천왕성의 존재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무림맹 창설을 결정했다.

번쾌검의 정보는 소중하고도 급한 것이었다.

겨우 목숨만 붙어 돌아온 번쾌검은 천왕성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말만 남기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는데, 천왕산은 물론이고 사천 북부와 청해 모두가 천왕산의 근거지이며 현재 병력이 집결 중이라는 사실을 전했다.

또 다른 전쟁의 암운.

이전의 쟁투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조차 다른 전쟁이다.

문파의 이익이 아니라 무림을 위해 싸워야 하는 전쟁이 어둠 속에 피어난 안개처럼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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