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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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3화
그녀가 물은 것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사랑에 관한 것뿐이었다.
만일 한설아를 사랑하느냐 물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텐데 그녀는 오직 자신에 대한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끝에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
예전에 만졌던 그대로의 눈이었고 코였으며 입이었다.
하나씩 정성스럽게 만져 주다가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팠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에도 부족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아왔을까.
그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지금부터라도 그녀를 책임지고 싶었다.
고개를 숙여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입술을 가졌다.
그녀의 입술은 눈물에 젖어 조금 짜게 느껴졌으나 곧 세상의 어떤 과일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아도 가슴으로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운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돌려보내며 본가로 돌아가 움직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조만간 천하의 무림 정세가 급변할 테니 섣불리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몸을 보중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운호의 말을 들었지만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직도 그녀는 운호의 입술의 감촉을 놓치지 못하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했다.
이제 다시는 슬픈 이별은 하기 싫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고개를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올린 후 시선을 맞추었다.
“운영, 돌아가 기다려. 무림이 안정되고 사문의 일이 끝나게 되면 꼭 데리러 갈게. 이제 아프게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 줘. 알았지?”
그녀를 돌려보낸 운호는 한동안 제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또다시 기약 없이 보낸다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으나 사문은 비수에 찔려 휘청거리는 중이었고 무림은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 존망이 위태로웠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고 그것은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것들이었다.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힘겹게 되돌아서서 객잔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무거웠고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의 사랑. 두 개의 마음. 그리고 두 개의 미안함.
당운영과 약속을 하면서도 한설아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부다처가 비일비재한 시대였지만 사랑을 다른 누군가와 나눈다는 건 여자로서 슬픈 일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당운영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은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대하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으니 운명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었다.
청현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객잔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다행스럽게도 당운영이 떠난 후에도 천왕성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운호는 차마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어른들께 보고하지 못했다.
운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운상과 운여 역시 입을 열 리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은 어느새 비밀로 변해 있었다.
신응은 빠르게 움직이며 수시로 무림 정세를 알려왔다.
점창이 성세를 회복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신응의 정보력을 보충하는 것이었는데, 이전에 비해서 숫자도 배는 많아졌고 거점도 세 배 이상 늘린 상태였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정보의 수집과 분석 능력은 훨씬 강화되어 있었다.
신응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이 등봉(登封)에서 머무는 동안 구룡은 무림첩을 돌려 천왕성의 야욕을 만천하에 알리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멈추도록 종용하는 중이었다.
무림첩이 날았다는 것은 무림 정세의 급변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아직 상처를 치료하지 못한 청현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장로들과 함께 객잔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움직일 정도가 되었으니 힘들더라도 점창으로 돌아가야 했다.
천하 정세의 핵심은 곧 하남으로 변할 테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다.
돌아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을 팽시킨 구룡이 허리를 숙이고 천하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해올 때까지 점창은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의와 협.
천하를 구하기 위해 홀로 일어서서 의와 협을 만천하에 내보인 점창은 명예를 얻은 대신 나락으로 떨어지는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그나마 얻었던 명예도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고 퇴색되어 업신여김을 당할 지경이었으니 점창이 보여준 의와 협은 독불장군이 보여준 만용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나타냈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테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인으로서의 삶은 언제나 힘의 균형에 의해 그 위치와 대우가 다르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뿐이다.
철혈문주 막수문은 천천히 구부렸던 허리를 폈다.
호패왕 막수문.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철혈문을 통치하며 삼십 년의 세월을 보낸 철혈의 강자.
비록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파죽지세의 기세로 귀주를 장악한 천검회에 의해 북부로 밀려났으나 신주십강에 포함된 천검회에 맞서 끝까지 귀주를 양분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배짱과 무력, 그리고 수하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내 사람이면 죽음을 같이한다는 마음으로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는 호패왕을 향해 철혈문의 무인들은 죽음을 맹세한 충성으로 대답을 했다.
천천히 일어난 그의 전신은 상처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벌써 보름에 가까운 대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동안 국지전과 공방전을 벌여오던 천검회는 전 전선에 걸쳐 진격전을 펼쳐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패배는 아니었으나 마치 밀알이 자루에서 하나씩 빠져나가는 것처럼 미세하게 밀리던 전선들은 차츰 중요 거점을 하나씩 잃으며 이제 와서는 마지막 보루인 동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두 번의 패배와 한 번의 승리.
싸움의 양상은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천검회에 비해서 병력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거점들을 모두 뺏기고 동인에 배수진을 쳤을 때 호패왕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합해 이백에 불과했다.
천검회는 삼로의 진격을 감행해 왔고 동맹 세력들에게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요청함으로써 아군의 지원을 근본적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것이 원인의 다는 아니었다.
소림사에서 전갈이 온 것은 오 일 전의 일이었다.
천왕성의 음모를 무림에 공표하면서 그들의 예하 세력들이 전쟁을 일으켜 무림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으니 싸움을 중지한 후 뒤로 물러나라는 내용이었다.
천왕성의 예하 세력으로 추측되는 단체도 거론되어 있었다. 바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는 천검회와 수라맹, 천문이다.
청당전과 안휘전에도 몇 개의 문파들이 의심되는 것으로 쓰여 있었으나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세력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구룡은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무림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강력한 신생 문파가 생성되고 소멸되었지만 오직 그들만은 면면히 전통을 이어오며 무림을 지켰다.
구룡이 지닌 힘의 원천. 바로 전통이다.
구룡의 이름으로 무림에 내려진 첩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서 천검회 측에 섰던 문파들을 대거 이탈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마문, 철기맹, 죽문이 무림첩을 수신하자마자 공격을 중지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로 후퇴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림첩이 떨어졌을 때 이미 혈검쟁투에 참여했던 문파들은 처참하게 찢겨져서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였다.
거의 보름 동안 펼쳐졌던 전면전은 그들의 전력을 반 이상 소모시켰고 서로 간의 원한을 증폭시킬 대로 증폭시켰다.
처음에는 문파의 이익 때문에 참여했으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상대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쌓여갔으니 그들의 검은 언제든 다시 뽑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전선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건 무림첩이 발동되기 오 일 전부터였다.
천검회 측에서는 세 개의 문파가 빠져나갔으나 철혈문 측은 파한문, 제천문을 비롯해서 다섯 개의 문파가 전선에서 한꺼번에 이탈했다.
천왕성의 예하 세력이라고 추정되는 천검회와 천문, 수라맹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철혈문 측은 오직 호패왕의 의동생 천파도 육만호가 이끄는 패도문만이 남아 버티는 상황으로 변했다.
후퇴하고 싶었으나 동인은 철혈문이 지닌 마지막 근거지였다.
동인까지 뺏긴다는 건 집안을 통째로 말아먹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싸운단 말인가.
무림첩이 전한 대로 후퇴한 후 기회를 엿보는 것이 옳은 일일 수도 있었으나 호패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내 땅, 내 가족, 내 삶.
무인으로 태어나 근거를 잃어버린 채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패도문주 육만호는 의형인 호패왕의 뜻을 알게 된 후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전선을 사수했다.
천문과 수라맹의 공격에 야금야금 전력이 소멸되어 갔으나 그는 끝끝내 의형을 배신하지 않고 철혈문의 뒤를 지켰다.
동인(銅仁).
호남성과 경계를 이루는 귀주의 최북단 도시를 말한다.
철혈문의 본거지로 인구 팔만에 달하는 커다란 도시였다.
호패왕이 남아 있는 이백의 무인들을 이끌고 다가오는 천검회의 전력에 맞서기 위해 방어선을 마련한 것은 대둔산 자락이었다.
부족한 병력으로 두 배가 훨씬 넘는 적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험준한 지형을 배경으로 싸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었다.
“어디까지 왔느냐?”
“상홍으로 추정되옵니다.”
“크크. 다 왔군.”
상홍이라면 불과 십 리 전방이란 뜻이다.
그랬기에 호패왕은 대도를 옆에 끼고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철혈문에 가담해서 치열하게 싸운 병력의 숫자는 예하 중소 문파의 무인들까지 감안해서 거의 천이백에 달했다.
그것은 여기 대둔산을 지키는 이백을 제외한다면 천 명이란 숫자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위해 죽어간 수하들이 하나씩 구름 속에서 떠올랐다.
그중에는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던 친동생 막여도 있었고 사촌 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보다 더욱 그를 괴롭힌 것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던 총사 여문과 전투부대의 수장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어갔다는 것이었다.
슬프고도 슬프다.
자신과 함께 귀주를 호령했던 철혈의 무인들은 이제 세상에 남지 않았고 오직 몇 명만 남아 마지막 승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 서서 질문에 대답했던 투혈당주 감황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호패왕의 시선이 구름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주군, 패도문 쪽에서 벌써 세 시진째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
“모두 전멸했다고 생각하느냐?”
“마지막 전서에 적의 선두가 보인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시간상으로 봤을 때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겠구나.”
호패왕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모든 것을 초월했으니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의동생인 육만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오십 년의 인연 속에서 언제나 밝게 웃으며 자신을 대했던 의제는 더 이상 세상에서 숨 쉬지 않는다.
패도문이란 강력한 문파를 이끌고 있었으니 광서에서 제왕처럼 살 수 있었음에도 전 문도를 이끌고 귀주로 넘어온 것은 오롯이 자신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날 원망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주군을 언제나 좋아했으니 마지막 순간에도 주군을 보고 싶어 하셨을 겁니다.”
“그래, 그랬을 거야. 하지만 미안해하지 않을 생각이다. 곧 다시 만날 테니 거나하게 술 한 잔 사면 돼. 그놈은 성격이 털털해서 술이 들어가면 마지막 순간 생살이 찢어지던 그 아픈 기억도 금방 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