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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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2화
팔이 잘린 고통은 아무리 강한 정신력과 무력을 지녔다 해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청현자는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울분을 토해내고 소림의 산문을 나선 후에야 운상의 부축을 받았다.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그대로 방치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상처였기 때문에 등봉(登封)까지 전력으로 움직여 의방을 찾아야 했다.
일행은 이를 악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억울했고 분했지만 점창 무인들은 등봉까지 오는 동안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그저 신형을 날렸을 뿐이었다.
청무자와 청문자의 표정은 가면을 씌워놓은 것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장문제자인 운풍은 청현자의 곁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구룡이 보여준 배신보다 더욱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까지 간절하게 구룡 복원을 원하던 청허 사형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었다.
점창의 명예를 면면히 지탱해 온 조사님들에게도 면목이 없었으나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청허 사형의 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청현자의 명에 의해 점창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의원의 치료가 끝이 난 후였다.
거의 두 시진에 가까운 수술 끝에 붕대로 칭칭 감은 청현자의 왼쪽 팔은 반만 남아 있어 점창의 처지를 연상시켰다.
하얗게 질린 얼굴.
두 시진 동안 수술을 하면서 겪은 심신의 고통은 청현자의 얼굴에서 핏빛을 빼앗아 분칠을 해놓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소림에서 보여주었던 혈안에서 벗어나 어느새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분 사형께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장문인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팔까지 자르다니 너무하셨소. 우린 어찌하라고 그렇게까지 하신 게요!”
“그들에게 점창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하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끄응!”
청무자와 청문자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점창을 책임지고 있는 장문인이지만 사적으로는 사제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니며 도관에서 지내야 할 규정과 규칙을 가르쳤고 사문의 기본공인 유운검법을 같이 익히며 울고 웃기도 많이 한 사이였다.
청현자는 청자배의 막내 사제로서 청문자와도 세 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랬기에 대사형이던 청허자부터 청문자까지 청현자를 아들처럼, 또는 막냇동생처럼 알뜰히 살피고 보살폈었다.
그런 청현자가 점창을 대표해서 팔을 잘랐을 때의 심정은 자신의 팔이 잘린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다.
대신하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 미안함에 두 사람은 청현자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점창의 최고 배분 어른들이었으니 그 미안함을 숨기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청현자의 눈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청무자가 입을 연 것은 어른들의 대화를 들으며 운풍을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글썽일 때였다.
“그래, 이제 어쩌실 요량이오?”
“점창으로 돌아가야지요.”
“하면?”
“우리 점창은 무림에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지만 끝내 이런 냉대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옛날처럼 움직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무림첩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그럴 것입니다.”
“…음.”
청현자의 단호한 대답에 장로들의 입에서 동시에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림첩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왕성과의 싸움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점창이 굴종을 요구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청현자의 결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안다.
그 옛날 점창 홀로 일어나 무림을 구하면서 겪어야 했던 괴로움과 슬픔들에 대하여.
오늘 벌어진 이 치욕도 그런 행동으로 인한 것이니 어찌 청현자의 뜻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의와 협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점창이 비겁하게 물러서서 움직이는 것 또한 마땅치 않는 일이었다.
사형들의 반응이 무거웠기 때문이었을까.
청현자는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다시 꺼냈다.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요?”
“과거처럼 문파의 명운을 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림첩에 의해 움직이면 점창은 그 옛날처럼 수많은 목숨을 바친 후 또다시 뒤편에 서서 편히 위기를 넘긴 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쩌실 생각이시오?”
“무림첩이 배포되고 무림맹이 결성되어 천왕성과의 일전이 벌어지게 되면 풍운대만 내려보낼 생각입니다.”
“풍운대만 참전시킨다는 말입니까?”
“참전이 아니라 천왕성 격파에 일조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점창의 명예를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 풍운대를 내려보내 적들의 약점을 공략하면 무림맹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인 것 같구려. 실리와 명예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묘책 중의 묘책이오.”
청무자와 청문자가 동시에 자신의 무릎을 치며 감탄을 터뜨렸다.
자신의 팔을 직접 검으로 자를 만큼 격분했기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았나 걱정까지 했는데 청현자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현명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점창삼신룡이 포함되어 있는 풍운대의 전력은 웬만한 문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풍운대가 독립부대로 움직이며 천왕성의 예하 세력들을 격파하고 주요 거점들을 파괴한다면 전쟁을 수행하는 무림맹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청현자는 사형들의 반응을 보면서 얼굴에 한 올의 웃음기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핏빛을 잃었고 눈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에게 한 점창의 맹세를 저는 기필코 지킬 것입니다.”
“뭘 말이오?”
“천왕성과의 일전이 끝나고 나면 점창이 구룡을 하나씩 찾아가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꿇릴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할 것입니다. 구룡에게 힘의 자격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만 있다면 저는 어떤 짓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좋소. 나도 간절히 원하던 바였소. 장문인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으니 그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소.”
그녀가 객잔으로 찾아온 것은 등봉으로 들어와 하루를 보냈을 때였다.
워낙 위중한 상처였기에 청현자는 의방에서 최소 오 일은 머물러야 되는 상황이라 장로들을 뺀 나머지는 객잔으로 숙소를 옮겨온 상태였다.
거짓말처럼 나타난 그녀는 조용히 객잔으로 들어와 식사를 하고 있던 운호를 향해 다가왔다.
옆에는 운상과 운여가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운영이 다가오자 놀란 눈을 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잠깐 시간을 내주세요.”
눈으로만 인사를 한 당운영이 운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오직 운호만을 담았는데, 음성은 가늘고 떨렸다.
천천히 일어났다.
한순간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장문인에 대한 걱정도, 무림 안위도, 점창의 처지마저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고 오직 슬픔에 젖은 그녀의 눈만이 들어왔다.
그녀를 따라 말없이 걸어 저잣거리에 있는 차가(茶家)로 들어섰다.
차가에는 손님이 없었는데, 두 사람이 창가에 앉자 염소수염을 매단 주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갔다.
“놀랐나요?”
“그렇소. 나를 어떻게 찾은 거요?”
“한설아 소저를 따라왔어요. 소림으로 올라가기에 무작정 기다렸어요. 오라버니가 내려올 때까지.”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추정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내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한설아를 미행하는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고 우연찮게 그 판단이 들어맞아 자신을 찾아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위험하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천왕성도 자신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예전과 다르게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에 천왕성이 자신을 계속해서 추적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당운영을 쫓아왔다면 행적이 노출되었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운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옛날 자신을 사랑했던 그때처럼 아련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했다.
그녀의 눈은 쌍류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내의 여자가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잊으며 살아왔는데 여전히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확인하자 강렬한 의문이 들었다.
“힘든 걸음을 했구려. 그래, 무슨 일로 온 것이오?”
“대답을 듣고 싶어서 왔어요.”
“무슨 대답을…….”
운호가 말을 흐렸다.
그녀의 눈에서 그녀가 했던 마지막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말… 한설아를 사랑하느냐는 물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안평에서 헤어진 후 혼인식이 있던 그날까지 오라버니가 오기를 가슴 졸이며 한없이 기다렸어요. 오라버니가 날 사랑한다며 같이 떠나자는 말을 해준다면 세상 끝까지 따라갈 생각으로… 나는 오라버니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드시 와줄 거라고 믿으며 긴긴밤을 지새웠어요.”
“나는… 나는…….”
“알아요. 왔었다는 것. 나중에서야 혜아가 말해주더군요.”
“그녀는 당신이 자발적으로 혼인에 동의했다고 말했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요!”
“가문에서는 나에게…….”
당운영은 낮은 목소리로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가문에서 그녀에게 했던 강요는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더군다나 산으로 돌아간 운호는 이 년 동안 아무런 연락조차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겪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담담하게 말하며 끝내 견디지 못하고 혼인을 선택한 자신을 탓했다.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견디고 버텨냈어야 했으나 마지막까지 그렇게 못 한 것을 미안해하며 결국 그녀는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려냈다.
혼인 후에야 풍검문의 불손한 의도를 알게 되었고 석천이 자신에게 보였던 호의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식이었다는 걸 이야기하며 한 번도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고백을 했다.
어느 한순간조차 변하지 않았던 운호에 대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언제나 그리워했음을 이야기했다.
피하지 않는 눈.
그 눈에 담겨 있는 건 사랑을 근간으로 한 용기였다.
운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인연을 맺었고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 밑에서 두 손을 잡은 채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던 여인이었다.
목숨마저 줄 수 있었던 사람.
자신의 실수로 인해 원하지 않았던 혼인을 선택했고 긴긴 고통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으니 미안해할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눈이 뿌옇게 아려와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울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녀의 담담한 고백을 듣자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그리고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운호를 사랑한다며 부끄러운 고백을 한 후 잠시 눈을 감았던 그녀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떨리는 음성이 울려 나온 것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운호가 뭐라 입을 열 때였다.
“오라버니한테 듣고 싶었어요. 다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