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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사일 156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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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풍운사일 156화

귀주, 여경(余慶).

천검회와 철혈문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최전선 여경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난 것은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던 오시 무렵이었다.

화검제 육철승을 필두로 나타난 인물들은 멀리 바라보이는 평야에 시선을 던진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천검회의 삼족으로 불리는 패천일도와 파우신검이 자리에 없었으나 총사인 천기수사 화문탁이 화검제의 좌측에 섰고 중안의 수장 주령이 우측에 섰으니 핵심 인물들은 모두 모인 거나 다름이 없다.

화검제의 호위를 맡으며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삼화와 오룡은 세 발 떨어진 곳에서 반원 형태를 그린 채 서 있었다.

누구든 허락 없이 접근하면 단숨에 척살할 수 있는 진형이다.

신주십강 중 하나인 천검회의 수뇌부가 총출동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삼백의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신기전의 전주 왕일과 두 명의 당주들이 급히 능선으로 올라와 부복했고 곧이어 여경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본단에서 파견된 천검칠현이 나타나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여경의 전투는 일진일퇴의 지루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슷한 전력이 대치한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좌우측으로 혈맹을 맺은 문파들이 웅크린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으로 나타난 이유일 뿐, 진짜 이유는 성의 대계에 따라 아직 전면전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

상황이 조금씩 변하며 그동안의 전투가 소규모의 국지전을 넘어 공방전으로 흐르고 있었으나 회주인 화검제가 여경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전선을 시찰하는 도중에 지나가던 길이라면 그런가 하고 이해하려 했으나 화검제는 호위대인 전룡대를 모두 이끌고 왔다.

전룡대의 숫자는 오십에 불과했으나 일당백의 절정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부복해서 극상의 예를 취했던 왕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검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예의에 벗어나는 한이 있어도 여경 전선의 책임자로서 의문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왕림하셨나이까?”

“이제 때가 되었다. 성에서 전면전을 시행하라는 전갈이 내려왔다.”

“정말… 이옵니까?”

“오늘부로 지루한 소모전은 끝낸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여경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우리는 강구(江口)와 동인(銅仁)을 접수한다.”

“그리하면 선몽의 철혈문 주력과 천주(天柱)의 쾌활림이 나서게 됩니다. 현재 상주하고 있는 병력으로는 무리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문화에 적룡단이 대기하고 있다. 병력은 충분해.”

문화라면 여경 후방 오십 리에 있는 작은 계곡을 지칭하는 지명이다.

불과 어제 저녁까지 문화에서는 쥐 새끼 한 마리 발견하지 못했는데 삼백에 달하는 적룡단이 들어왔다고 하자 왕일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적룡단은 회주 직속의 삼대 전투부대 중 하나였다.

전투를 치르는 와중이었기에 이십여 명의 경계 무인을 풀어 매일같이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음에도 적룡단의 진출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문책을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전쟁에서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즉참의 죄를 범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일은 금방 얼굴을 펴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흥분으로 붉게 변해 있었다.

“여경만 전진합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일성과 이성의 병력도 진군한다.”

“좋군요.”

왕일의 입이 더욱 크게 벌어졌고 얼굴도 더 붉어졌다.

일성과 이성이란 패천일도와 파우신검의 병력을 말하는 것으로, 천검회의 병력이 모두 출동하는 전면전이라면 이번 전쟁을 오래 끌지 않고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다.

천기수사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냥 내버려 두면 왕일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본성에서는 대계의 일정을 앞당기려 하오. 지금까지의 공방전을 끊고 전면전을 계획한 것은 미적거리는 나머지 문파들의 전투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오. 우리가 먼저 선공을 펼쳐 전진하면 우리 측에 가담하고 있는 신마맹과 철기맹, 죽련도 동시에 진격을 시작할 것이오.”

신마맹과 철기맹, 그리고 죽련은 혈검쟁투에서 천검회 측의 동맹으로 싸우고 있으나 천왕성의 예하 세력은 아니었다.

그들이 참전한 목적은 복잡 미묘한 세력 간의 알력과 이익이 밑바탕에 깔려 있을 뿐 천하통일의 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동안 그들은 갖가지 이유와 변명으로 전면전을 치르지 않았고 천검회 측에서도 특별한 요청이나 강요를 하지 않았다.

쟁투를 벌인 목적은 시간을 끌어 참전한 세력들의 전력을 최대한 축소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전략이 수정되었다는 것은 상황이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천왕성의 출전이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왕일은 머리를 번쩍 들고 천기수사를 바라보았다.

총사의 설명은 이번 작전이 확실한 전면전이란 뜻이다.

그동안은 소모전을 펼치며 병력을 최대한 아껴왔는데, 이제부터는 주요 지점을 장악해 나가는 쟁탈전과 적의 핵심 세력을 처단하는 파괴전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왕일은 속으로 삭이며 말을 멈췄다.

더 이상의 질문은 자신의 지위로 봤을 때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다른 자들의 희생을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삼십팔세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내리기 위해서라면 쟁투의 중심인 천검회가 먼저 치고 나갈 필요성이 있었다.

종심 진격전.

강구와 동인까지의 거리는 직선로로 오백 리에 불과했지만 그곳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경로에 배치되어 있는 적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고 전투의 결과에 따라 주변 세력들이 계속해서 참전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본래의 목적대로 쟁투에서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상자를 내기 위해서는 시간을 끌 만큼 끌어야 된다는 결론도 같이 나온다.

그것의 의미는 단 하나.

자신의 앞길은 수많은 무인들의 피가 산하에 흐르는 혈로(血路)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질문을 끝내고 뒤로 물러나는 그의 얼굴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슬쩍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동안 소모전을 펼치면서 겪어야 했던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끝내고 그토록 원했던 치열하고도 강렬한 싸움이 시작된다 생각하자 온몸에서 뜨거운 피가 돌았다.

위험할 것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사랑하던 수하들도 무수히 죽어나갈 것이다.

이런 작전에서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는 법이니까.

그러나 어떤 두려움과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로 태어나 천하를 보겠다는 야망을 지녔으니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불쌍하겠는가.

 

당운영은 숙원에서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상실감으로 끊임없는 절망에 시달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다른 여인을 찾아왔다는 생각을 하자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을 바라보는 운호의 눈이 무섭게 흔들렸다는 게 기억나면서 새로운 희망에 젖어갔다.

그는 그 옛날 가슴속에 사랑이 가득했을 때와 똑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그녀 역시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희망을 준 건 마지막 떠나면서 던졌던 질문에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혼자 중얼거리듯 물었으나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전설을 만들어 나갈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었으니 분명히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 데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눈을 한 채 그녀를 떠나보냈다.

스스로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왔다고 당가의 무인들에게 공언한 것은 싸움을 말리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다.

참전의 명분을 위해서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점창의 행사가 아니라 마검 단독의 행사로 몰아가기에는 그것만큼 좋은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은 후 곱게 단장을 했다.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미친 듯 싸워왔고, 어느 이름 모를 산하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기를 소망할 만큼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왔다.

죽기를 각오한 사랑이 가슴에 있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떠난다. 그리고 그를 찾아 말하련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한 후 아직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생각이다.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만약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한설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힘든 세상, 힘든 청춘, 힘든 삶.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고 살기도 싫다.

 

“어디로?”

“갑작스런 출행이었습니다. 현재 서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계집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마검을 찾아 나선 것이 분명합니다. 뒤를 추적하면 마검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크크크… 마검이라…….”

풍검문의 장자인 석천의 입에서 징그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당운영이 오전에 급히 당가로 떠났다는 원표의 보고를 듣자 무심했던 눈이 뱀처럼 차갑게 변했다.

혼인은 했지만 당운영은 전혀 그의 가슴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 불의의 사고로 낭심을 다친 후부터 여자들에 대해서 이유 없는 적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당운영과 혼인한 것은 성의 대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을 뿐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당운영은 다른 놈을 사랑하고 있었다.

불결한 계집.

혼인한 후에도 그놈만을 생각하며 백 일을 하루처럼 지내왔으니 미친년처럼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당운영에 대한 감정은 적대감을 넘어선 증오로 변해갔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수도 없이 가졌었으나 대계를 위해 참고 또 참고 있는 중이었는데 기어코 그놈을 찾아 떠났다는 소리를 듣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원표는 풍검문에서 데려온 친위 부대 풍검십팔수의 수장으로 석천의 오른팔과 같은 인물이었다.

청당전에 참전한 풍검문의 전력은 풍검십팔수와 칠대 전투부대 중 하나인 비마당이 전부였고 인원도 백오십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석천은 언제나 전략 회의에 참여해서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가 쪽에 가담한 문파들이 그런 석천의 행동을 제동 걸지 않은 이유는 신주십강 중의 하나인 풍검문의 위세 때문이었다.

지금은 소수가 참전하고 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면 언제라도 풍검문은 당문을 위해 막강한 부대들을 참전시킬 것이 분명했다.

석천은 탁자에 펼쳐져 있던 지도에서 시선을 거둔 후 엄지손가락으로 탁자의 모서리를 두들겼다.

뭔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으나 그 행동은 곧 중지되었고 숙여졌던 시선도 원표를 향해 올라왔다.

원표의 말대로 당운영은 마검을 찾아 나선 게 분명했다.

마검은 당운영을 쌍류에서 만나고 나서 즉시 길을 떠나 천 리나 떨어진 천왕성에 모습을 드러낸 후 이틀 만에 수녕에 나타나 오신풍을 해치웠다.

그 뒤로 마검 일행의 종적은 귀신같이 사라져 더 이상 노출되지 않았다.

천왕성의 눈인 천혼의 시야까지 완벽하게 가리고 사라진 마검을 당운영이 찾는다는 건 사전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가능성은 반반이다.

쌍류에서 마검을 만난 그녀가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해놨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랬기에 석천은 자신을 향해 어쩌면 좋겠냐는 시선을 던지고 있는 원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가 따라가고 있지?”

“미령삼수가 따르고 있습니다.”

“음… 그들 가지고는 안 돼. 천혼에 연락하도록.”

“천혼에요?”

“성에서는 마검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대계가 앞당겨지는 것도 그자 때문이라고 하니 총사는 마검의 위치만 확보되면 그냥 두지 않을 게야.”

“그자를 잡기 위해서는 성에서도 상당한 전력을 내보내야 될 것입니다.”

“성에서는 오패께서 그자를 잡기 위해 나설 거라 한다. 마검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오패께서 나선다면 위치가 노출되는 순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다.”

“알겠습니다. 그리 조치하겠나이다.”

“본가 병력 도착 예정일이 내일이라고 했지?”

“전서에 따르면 오시 무렵이면 축원에 도착한다고 하옵니다.”

“좋군. 대도문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본가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아미파의 후미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미파를 덮치면 이제 미적대던 당가도 어쩔 수 없이 청성을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가 끓는구나. 드디어 대계의 깃발이 올랐으니 이제 천하는 광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기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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