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51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51화
구름 사이로 보이는 전각들의 바다.
그렇다. 바다라는 단어 외에는 어떠한 표현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전각들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완벽하게 숨어 있는 지형.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그리고 천왕봉의 절벽을 끼고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찬 곳은 차가운 칼바람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능선들이 병풍처럼 늘어섰고 따스한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천왕성의 근거지가 아닐 거란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곳에 저 정도의 대규모 병력들이 상주한다는 것은 어떤 세력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랬기에 운호는 왔던 길을 뒤집어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급히 날아갔다.
서둘러야 한다.
이곳에 천왕성의 근거지가 없었다면 모를까, 발견한 이상 그들의 존재가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절벽 사이를 날아서 급하게 돌아온 운호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자!”
“왜 그래?”
“놈들을 찾았다.”
운호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눈치챈 운여가 먼저 몸을 날렸고 그 뒤를 나머지가 따랐다.
돌아가는 길.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의 급경사를 따라 내려가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잘못 발이라도 딛게 된다면 그길로 천 장 까마득한 산 아래로 떨어질 것이고,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의 험악한 암석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암석은 눈 속에서 까맣게 튀어나와 있었으나 얼음으로 덮여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미끄러워 신법을 펼치고도 조심하지 않으면 낙상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더욱 그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암석 사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천왕성의 병력들이었다.
어느샌가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한 천왕성의 병력들은 그들의 하산길을 가로막고 공격을 개시했는데, 그 숫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천왕봉에 사람이 올랐단 말이지?”
“예, 그러하옵니다.”
“천일조가 막지 못한 이유는?”
“너무 빨라 미처 막을 새가 없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오른 자들의 무력이 가공하다고 합니다.”
“대단한 무력을 지닌 놈들이라…….”
보고를 들은 삼십 후반의 사내가 건조한 웃음을 흘려냈다.
천왕성주의 둘째 아들이자 천왕삼십육탄의 수장이며 주력 전투부대 일운강을 이끌고 있는 요홍이 바로 그였다.
요홍은 앞에 있는 사십 후반의 사내를 바라보며 잠시 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그의 평소 성격이 신중함을 넘어 까다로울 정도로 세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십 후반의 사내, 천왕성의 외성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천일조의 수장 서효원은 요홍이 말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서효원은 성주가 머물고 있는 내성을 제외한 모든 구역의 경비를 맡고 있는 인물로서 요홍의 오른팔과 같은 자였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자들이 소천께서 잡으려고 했던 마검 일행인 것 같습니다.”
“왜지?”
“제가 듣기로는 그들을 중경과 인접한 호북의 수호에서 놓쳤다고 했습니다. 경로는 여러 가지겠지만 만약 그자들이 우리에 대한 조사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창에게 뭔가를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쪽으로 왔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먼.”
“천일조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놈들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서효원의 말에 요홍이 깍지 낀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뭔가를 생각할 때 하는 그의 버릇이다.
마검이라…
마검이 왔다는 것은 팔비검과 무풍검이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절대의 경지에 들어선 자들.
자신의 형인 요문이 잡기 위해 직접 움직였음에도 결국 놓친 자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비밀의 심장부를 알아냈다는 뜻이다.
대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 외성에 있는 주둔 병력은 일운강과 천강전뿐이었고 두 부대는 그가 가진 전부였다.
외성의 경비 병력인 천일조까지 합한다 해도 그가 가진 힘은 소천의 십분지 일도 되지 못했다.
그런 마당에 수족들을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일에 나서서 수족들을 죽이는 짓은 멍청하고도 우둔한 짓이었다.
“이봐, 일문.”
“예, 주군.”
“우리 병력을 움직이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
“마검은 이미 십제의 반열에까지 거론되는 자입니다. 더군다나 같이 다니는 자들도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아마 외성 병력이 나서면 잡지는 못하고 커다란 손실만 볼 것입니다.”
“내가 나서도?”
“마찬가집니다. 더군다나 외성 병력이 나서기에는 시간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놈들은 지금쯤 천왕산을 내려갔을 테니까요.”
서효원의 대답에 요홍의 안색이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효원은 자신이 외성 병력을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고를 서두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최상의 방법은?”
“십방과 면양에 상당수의 병력들이 나가 있습니다. 정히 잡을 요량이면 그들을 움직여야 됩니다.”
“마검이 정말로 십제의 반열에 든 자라면 마찬가지다. 천왕이십오성 중 누군가가 특수부대를 이끌고 나선다면 모를까, 나머지 가지고는 손실만 입을 뿐이야.”
맞는 말이다.
마검을 잡기 위해서는 천왕이십오성 중 누군가가 나서야 된다.
천왕이십오성은 절대의 반열에 들어선 천왕성 최강의 무인들로서, 그중 반은 내성에 머물고 있는 중이며 나머지는 천하에 흩어져서 대계를 시행하는 중이었다.
요홍은 자신이 이야기를 해놓고도 계면쩍은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천왕이십오성의 일인이면서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면 최고 적임자는 바로 그였다.
하지만 서효원은 그의 행동을 모르는 척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해야 됩니다. 여기서 손을 놓고 있게 되면 문책을 피하지 못할 테니 시늉이라도 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공을 내성으로 넘기도록. 총사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병력들을 투입해 달라고 부탁해.”
“총사는 금방 우리 뜻을 알 겁니다.”
“그건 내가 감당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저 알려주기만 하면 총사가 알아서 할 거야. 자네가 직접 들어가서 총사한테 보고해. 내가 자리에 없었던 걸로 하면 자네를 추궁하지는 못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서효원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요홍을 바라보며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방문을 나섰다.
하책임이 분명하다.
아마 귀신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총사는 요홍의 의중을 단박에 파악하고 웃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선 것은 하책임에도 상책의 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성의 아 측 병력을 움직여 마검을 치고 손실을 입히는 것이 상책 중의 상책임은 주군인 요홍도 알고 자신도 안다.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니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충성을 보여주게 되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언제 어느 때 칼끝이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의 길로 한 발자국 들어선 꼴이 되어버린다.
죽음으로 신뢰를 얻는 것보다는 신뢰를 잃는 한이 있어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은 천왕성의 대계 완성이 가장 커다란 지상 과제였지만 대계가 완성되고 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성주와 소천의 뜻을 거역하고 반역을 도모코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따르는 병력만이라도 온전히 유지해서 대계가 완성되었을 때 천하의 일각을 차지하려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총사는 그런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수시로 견제를 하며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총사의 귀계는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밀착 감시하며 옴짝달싹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서효원은 천천히 걸어서 내성으로 들어갔다.
용담호혈.
천왕성의 심장부이자 수많은 괴물들이 웅크리고 있는 곳.
내성에 있는 무인들이 중원으로 나가는 순간 천하의 무력 서열은 그 의미가 상실될 정도로 막강한 무인들이 숨 쉬는 곳이 바로 내성이다.
살을 엘 것 같은 기세가 내성으로 들어서자 북풍처럼 몰아쳐 왔다.
자신이 천일조의 수장임을 알면서도 이런 기세를 쏘아낸다는 것은 내성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총사는 마검 일행이 십방을 넘는 순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천왕산 백 리 근방은 천왕성의 눈이 도처에 깔려 있어 조금만 이상한 일이 벌어져도 금방 천혼이 움직인다.
천왕성의 눈인 천혼은 무림에서 벌어지는 정보들을 분석해서 성주와 총사에게 전달하는데, 특히 근거지가 있는 십방 근처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일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수라문으로 들어서자 매섭게 몰아치던 기세들이 순식간에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때부터 서효원의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기세가 사라졌는데 몸이 경직된 것은 더한 위험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총사가 머무는 수라문은 천왕삼망이 지킨다.
그들이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불문율이었다.
단지 총사의 안위를 지키는 천왕삼망은 성주의 직속 친위 부대이자 경호를 맡고 있는 천왕칠기와 맞먹을 정도로 강한 무인들이란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서효원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수라문으로 들어서서 전각 앞에 섰다.
그러자 전각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문, 무슨 일로 왔는가?”
“보고드릴 일이 있어 왔사옵니다.”
“들라.”
방문을 열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서자 청수한 노인이 자리에서 눈만 들어 그를 맞이했다.
앉아서 천 리를 본다는 사람.
천왕삼뇌 중 장형으로서 천왕성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는 총사 천뇌 설운호가 바로 그였다.
설운호는 서효원이 방 안으로 들어서서 잠시 서 있자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
그 눈이 물끄러미 다가오자 서효원의 몸이 으슬거리며 떨렸다.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천왕산에 괴한들이 올라왔다는 보고입니다. 천일조가 현재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으나 괴한들의 무력이 워낙 강해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군지는 모르고?”
“아직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소인은 그자들이 마검 일행이 아닐까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왜?”
“소천께서 마검 일행을 수호에서 놓쳤다고 들었습니다. 마검이 본성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소릴 얼핏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드린 말씀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먼.”
“침입자가 마검 일행이라면 천일조만 가지고는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공자는 자리에 계시는가?”
“출타하셔서 미처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서를 날렸으니 지금쯤 급하게 돌아오시고 계실 겁니다.”
“쯧쯧… 이제 와서 외성 병력을 빼봤자 의미가 없겠구먼. 이공자께서 자리를 지켰다면 조금 늦었더라도 죽영 근처에서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래, 이공자께서는 이런 중요한 때에 어디 가신 건가?”
“십방 쪽에 나가셨습니다.”
“십방에 아름다운 기녀가 들어왔다고 하더니 거길 가셨던 게로군. 알았네. 그만 가봐.”
“어찌하실 요량이신지…….”
“어쩌긴.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는 해야 되지 않겠나. 내가 잘 배웅할 테니 자네는 이공자께서 돌아오시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