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8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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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86화
정벌군의 총사령인 요홍이 버틴 신화가 무너지면서 남부 전선은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망성에서 벗어나 반격을 펼치다가 잠시 주춤거렸던 무림맹은 점창이 신화를 탈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총공격을 감행했다.
천왕성의 남부 정벌군은 신화가 무너졌음에도 쉽게 밀리지 않고 무림맹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점창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전쟁은 무림맹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점창이 가는 곳마다 천왕성의 병력들은 전멸을 면치 못했으니 그들에게 점창은 사신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루저(婁底)와 남악(南岳)에서 적들의 주력을 격파한 무림맹이 마지막 남은 상덕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점창이 신화를 무너뜨린 후 칠 일 만의 일이었다.
오천이었던 병력은 칠 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삼천오백으로 줄었지만 승리로 인해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상덕에는 신마맹과 철기맹, 죽련 연합이 천검회와 천문, 수라맹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두 진형 모두 천혜의 지형을 기반으로 해서 싸웠기 때문에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두 집단 모두 거의 삼천의 병력으로 맞서 상덕 일대는 무인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점창과 모산파가 주축이 된 남부 무림맹 병력이 운문산의 뒤쪽으로 집결한 것은 남악을 출발하고 이틀 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도착했느냐?”
“예, 주군.”
“방법은?”
천검회의 주인 화검제가 묻자 천왕삼뇌 중의 일인인 화문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그 미소에 든 것은 자신감보다 자괴감이었다.
“후퇴하는 것이 일 번이요, 두 번째는 천혜의 지형인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저는 큰 것을 볼 줄 아오나 오로지 힘으로 부딪쳐야 되는 상황에 닥치면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이올시다.”
“무슨 뜻이냐?”
“주군, 일단 여기를 벗어나 중부군과 합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들의 세력은 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 그리하시지요.”
“모든 게 내 욕심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요홍이 총사를 원할 때 주지 않은 것이 후회될 뿐이다.”
“제가 총사령 옆에 있었다면 당연히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 같군요. 무인들의 전쟁에서 절대 무력을 가진 자들의 출현은 저 같은 문사들을 절망시키기 때문입니다. 전략과 전술은 비슷한 무력이 선행될 때 빛을 발하는 것이지, 싸움조차 의미가 없어질 정도가 된다면 저 같은 사람의 머리는 그다지 쓸모 있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총사가 요홍에게 가 있었더라면 점창이 참전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지 않겠느냐.”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군, 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요. 일단 후퇴해서 남부군과 합류를 한다면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소천께서 북부 무림을 병탄할 때까지 놈들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화문탁이 간절한 시선으로 화검제를 바라보았다.
남부 정벌군 중 남은 병력은 그들 삼천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고수들의 숫자도 무림맹 쪽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랬기에 화검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지를 벗어나 중부군 쪽으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화검제는 그의 간절한 시선을 쓴웃음으로 가볍게 피해 버렸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화검제가 그리 나오자 간절하게 바라보았던 시선이 허탈하게 변했다.
화검제가 거부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리 말했던 건 주군을 살리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다.
“문탁아.”
“예… 주군.”
아주 어렸을 적 자신을 아끼며 사랑했을 때 불러주던 이름.
머리가 크고 일가를 이룬 이후에는 언제나 총사라 부르던 화검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화문탁의 눈에서 스르륵 눈물이 배어 나왔다.
그를 바라보는 화검제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해서 마치 아버지의 눈길처럼 느껴졌다.
“무인으로 천하를 바라보며 사십 년 동안 강호를 질주했다. 대계를 위해 천왕성을 나온 것이 내 나이 스물다섯의 일이었으니 참으로 오래도 걸렸구나.”
“…주군.”
“남부 정벌군이 모두 전멸하고 우리만 남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낯으로 도망을 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왔고 무인으로 죽고자 했다. 내가 거두고 키웠던 아이들도 분명 나와 같은 뜻일 테니 나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구나.”
“주군…….”
“하나 너는 다르다. 너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여기 남을 이유가 없다. 산을 내려가라. 내려가 중부군으로 가서 삼군을 도와 후일을 도모하라.”
“저는 주군의 사람입니다. 주군과 삶과 죽음을 같이 하기를 오래전부터 소원해 왔습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시지요.”
“문탁아!”
“제가 무인은 아니나 기백만큼은 무인 못지않습니다. 주군 옆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제 소망이올시다.”
무검제의 서신을 받은 상덕의 무림맹 세력이 운문산의 정면에 도착한 것은 모산파의 본진이 배후에 도착한 지 한나절 만이었다.
적들의 의도는 분명했고 간결했다.
운문산의 험악한 지형을 배경 삼아 끝까지 싸울 생각이다.
천왕성이 옥쇄 작전으로 나오자 무림맹 수뇌부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적들의 병력은 무림맹에 비해 적지만 그래도 삼천에 이를 만큼 대군이다.
주요 고지를 장악하고 방어 전선을 구축한다면 무림맹은 커다란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수장들은 모산파의 전막에 모여 머리를 맞댄 채 고민을 거듭했다.
무검제가 무겁게 입을 연 것은 수장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한동안 주고받은 후였다.
“모든 의견을 잘 들었소. 각론을 모두 쳐 내고 큰 줄기로 종합해 보면 결국 여러분의 의견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되오. 하나는 적들을 고립시켜 스스로 내려오도록 만드는 것과 둘째는 피해를 보더라도 정면공격을 시행하자는 것이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첫 번째 의견은 절대 선택할 수 없소이다.”
“그건 왜 그렇소?”
그동안 줄기차게 적을 고사시키자는 주장을 했던 철기맹주가 눈을 부릅뜬 채 되물었다.
간단하게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무검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검제는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북부 무림의 전황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소이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남부 전선을 정리하고 하남으로 가야 하오.”
“지금 이 전쟁은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나는 것이 아니오. 천혜의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에 집중하는 적을 친다면 무림맹은 절반 이상 피해를 보게 될 것이오. 만약 그리된다면 저자들을 이긴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북부 무림이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우리 전력이 만신창이가 된 후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왜 모르시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기다린단 말이오.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이다!”
철기맹주와 무검제가 팽팽하게 맞서자 좌중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청현자가 두 사람의 대치를 깨고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운문산을 공격하면 안 되오.”
“무슨 말씀이오!”
철기맹주를 노려보던 무검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점창 수장인 청현자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목상으로 아직까지 자신이 남부 무림맹의 맹주 노릇을 하고 있지만 모든 힘의 균형은 이미 청현자에게 쏠려 있었다.
대적불가의 무력으로 남부 전선을 휩쓴 점창은 경이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철기맹주의 말씀처럼 지금 운문산을 공격하면 너무 큰 피해를 입게 되오.”
“장문인,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걸 잊으셨소!”
“그 시간을 찾기 위함이오. 우리의 목적은 천왕성의 야욕을 깨뜨리고 무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오. 굳이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저자들을 공격해서 전력을 소비하느니 곧장 중부 무림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오.”
“어허!”
“우리가 떠나면 저들은 이곳을 지키지 못하오. 아니, 지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방어선을 풀고 내려올 수밖에 없소.”
청현자의 설명에 무검제는 물론이고 아직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던 철기맹주와 좌중의 수장들이 모두 무릎을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당장 눈앞에 있는 적만 의식하다 보니 시야가 잔뜩 좁아졌었는데 청현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술을 꺼내어 수장들을 개안시켰다.
그랬기에 무검제는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펴고 정중하게 청현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시오. 장문인께서 이런 안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할 뻔했소이다. 정말 감사하오.”
“나에게 감사할 일이 아니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북부 무림으로 가야 하오. 북부 무림이 무너지면 우린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힘든 싸움을 해야 될 것이오.”
청현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무검제는 즉시 전막을 걷고 모든 병력을 이끈 채 북진하기 시작했다.
남부 무림맹의 병력은 모두 합해 육천칠백이었는데, 상덕에서 벗어나 호북으로 들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오 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상덕은 남부 전선 중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호북의 경계선까지는 삼백 리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무림은 남부 무림맹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승리 소식이 퍼지며 환호에 사로잡혔다.
그동안 밀리던 전선이 점창의 참전으로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정벌군을 전멸시켰다는 소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천하로 퍼져 나갔다.
막강 무력의 점창.
불과 삼백의 병력으로 남부 전선을 초토화시켜 버린 점창의 무력에 천하는 경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혼돈의 무림.
그 무림의 판도를 완벽하게 뒤바꿔 버리는 태풍의 눈, 점창.
그들이 행보가 호북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부 전선이 순식간에 소강상태로 변했다.
그동안 천왕성 측에 붙어서 싸움을 했던 낭인들과 중소 문파 무인들이 전선을 이탈하면서 전선을 혼란 속으로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싸움의 흐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남부 전선이 무림맹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은 중부 전선을 공략하던 천왕성의 병력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힘의 균형이 깨진 전쟁은 언제나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이익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낭인들과 중소 문파 무인들은 전 전선에서 급격하게 이탈해서 무림맹 쪽에 투항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과였으나 한편으로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신념을 가지고 싸우는 무인은 전쟁의 양상과 상관없이 목숨을 바치나 이익 때문에 싸우는 자는 목숨이 위태로우면 언제든 행동을 바꾼다.
거의 일만에 가까웠던 천왕성의 중부 정벌군은 불과 칠 일 만에 삼천으로 줄어들었다.
기존에 무림에 둥지를 틀었던 예하 세력을 휘하에 두지 않았던 중부 정벌군은 천왕십일전만 끌고 내려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병력이 많지 않았다.
그것은 중부 무림맹의 전력이 그만큼 약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중부 전선을 고착화시키고 북부 무림과 남부 무림을 병탄시키면 대계가 완성될 것이라는 설운호의 전략이 그런 결과를 끌어냈었다.
하지만 남부 무림맹 병력과 중부 무림맹 병력이 합쳐진 대군이 압박해 오자 남부 정벌군을 이끌고 있던 요량과 요명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후 전면전을 피하고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하남으로 이동했다.
그것은 뒤늦게 운문산을 내려온 천검회와 천문, 수라맹의 삼천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부 무림맹이 떠났다는 것을 알자 급히 진형을 거두고 엄청난 속도로 중부 전선으로 이동하다가 요량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원 전체를 아우르던 전쟁은 양상이 바뀌며 하남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여했던 전 병력이 하남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북부 무림을 압박하던 천왕성의 본진은 공격을 중단하고 여남(汝南)으로 물러서서 전열을 정비했다.
마지막 승부.
양 진영은 천하를 둔 한판 승부를 위해 전 병력을 집결시킨 채 서서히 서평(西平)을 향해 나아갔다.
서평(西平).
끝없이 펼쳐진 벌판.
서평은 하남에서 가장 큰 평야 지대로 그 옛날 조조의 백만 대군이 야영을 했다고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