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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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82화
점창의 출전(出戰).
순자배 어린 제자들과 본산을 지킬 무인들을 빼고 산을 내려온 점창의 병력은 정확하게 삼백이었다.
남부 무림맹이 방어선을 친 호남의 망성까지는 삼천 리가 넘었고 천왕성의 소규모 후방 병력을 중간중간 처리하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망성에 도착했을 때는 열흘이 훌쩍 지난 늦은 밤이었다.
점창은 망성 외곽에 머물렀을 뿐 모산파가 주축이 된 무림맹 주둔지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악연으로 점철된 모산파와 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었지만 망성 남부 쪽에 위치한 주주(株洲)의 전황이 훨씬 나쁘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주에는 은하문과 파령문이 천왕성 예하 세력인 무풍사와 팔황문을 상대로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점점 힘에 부치며 방어선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밤을 지내면 즉시 주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주주가 밀리면 망성은 완전 고립되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진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점창 본력(本力)이 망성과 십여 리 떨어진 순치에 진을 쳤다.
주주의 전황이 급하다는 것을 알지만 열흘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을 감안한다면 하루만이라도 숙면을 취할 필요성이 있었다.
풍운대가 망성을 넘어 순치로 온 것은 점창의 주력이 전막을 펼치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할 때였다.
언제 합류했는지 풍운대에는 섬서에서 넘어온 운호와 운상, 운여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풍검문과의 전쟁에서 꽤나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으나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전막에 들어섰다.
청현자가 머무는 전막은 다른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장로들을 포함해서 운풍을 비롯한 주요 각주들과 풍운대가 모두 들어섰어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풍운대는 도착해서 사문의 존장들을 뵙자 청현자와 장로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는데, 한 치의 허술함도 보이지 않았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너희들의 전과는 계속 듣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사문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청현자의 칭찬에 운곡이 먼저 머리를 숙였고 나머지도 그를 따라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장로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풍운대가 불과 세 달 동안 천하통일전에서 보여준 전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남부 전선의 판도가 풍운대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천하인들은 그들을 보고 전보도라 불렀다.
전쟁판을 일순간에 찢어버리는 전가의 보도란 뜻이었다.
풍검문이 삼신룡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뒤늦게 중원을 강타한 것은 운호가 한설아를 만나기 위해 잠시 청성에 들러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자랑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성에서 흘러나온 소문은 꼬리를 물었고 곧 중원 전역을 강타하고 말았다.
그동안 조사를 해왔던 검시관들에 의해 시신에 난 상처들이 사일검법에 의한 게 맞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단 세 명에 불과한 점창삼신룡이 풍검문을 전멸시켰다는 사실에 천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막강한 무력으로 천하를 종횡하며 무수한 신화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어찌 인간의 몸으로 신주십강 중의 하나인 풍검문을 세상에서 지울 수 있단 말인가.
풍검문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전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풍도제를 비롯해서 대다수의 주력 무인들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는 건 모든 무림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데도 전멸을 당했다.
당문과 황보세가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장안까지 함락시켰던 풍검문을 점창삼신룡이 박살 내버리자 무림은 그들의 칭호를 점창삼황(點蒼三皇)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십제 중 하나인 풍도제마저 때려잡았으니 마검의 무력은 십제를 뛰어넘어 신경지(新境地)로 가고 있다는 것이 천하의 중론이었다.
말 많은 무림사가들의 점창에 대한 평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동안의 야박함을 버리고 신주십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일부 사가들이 반론을 제기했고 그동안 신주십강의 위치에서 큰소리를 치던 문파들이 코웃음을 흘렸으나 그러한 평가는 점점 힘을 얻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림은 진정한 점창의 힘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검이 포함된 점창삼황이 건재했고 현 백대고수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청문자와 청무자뿐만 아니라 차기 장문인으로 꼽히는 운풍과 풍운대를 이끄는 운곡까지 절대의 경지로 올라섰으니 절대고수의 숫자만 보더라도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었다.
더군다나 분광과 회풍이 돌아오면서 창천의 경지를 뚫고 파천으로 나아간 점창 무인들의 숫자가 백오십을 훌쩍 넘었기 때문에 점창의 전력은 가히 가공할 정도였다.
점창은 다음 날 곧장 주주(株洲)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주주는 옆으로 치고 들어오는 천왕성의 예하 세력을 막기 위해 형성된 방어선이었다.
무림맹 측에서는 나름대로 적들의 전진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으나 은하문과 파령문은 신주십강에 포함된 무풍사와 신흥 강자 팔황문에 의해 조금씩 밀려 결국 망성과 칠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주주까지 후퇴한 상태였다.
주주가 함락된다면 망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변할 수밖에 없다.
점창이 참전의 첫 행보를 주주로 향한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주를 공격하는 무풍사와 팔황문을 격파하면 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급했다.
더군다나 신응들에 의해 전해져 온 전황에 따르면 천왕성의 전면적 공격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전력으로 달려 주주에 도착한 것은 신시(申時) 무렵이었다.
주주(株洲) 외곽으로 들어서자 시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방어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측이 치열한 접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파령문을 공격하고 있는 팔황문의 후방에서 나타난 점창 무인들은 하나같이 흑색 전도복으로 통일해서 마치 하나의 검은 물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삼 대로 나뉜 점창의 전진은 그야말로 무풍지대를 휩쓰는 독수리의 움직임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공격에 정신이 팔려 있던 팔황문이 뒤늦게 점창의 공격에 반응하기 시작했으나 이미 거대한 폭풍에 휩싸인 망망대해의 돛단배처럼 보였다.
대적불가.
점창 무인들의 전진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팔황문 팔백 무인을 도륙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시진.
악전고투를 펼치던 파령문주는 점창의 무력을 확인한 후 손에 들었던 검을 땅에 짚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
자신들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던 팔황문이 마치 짚단처럼 쓰러지는 장면은 충격을 넘어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 선두에 서서 적들을 베어 넘기는 점창 무인들의 무력은 무적의 신위를 나타냈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무력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무인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였고 팔황문의 진영은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뒤늦게 나타난 자들의 정체를 안 순간 파령문주는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점창.
삼십팔세의 말석에서 겨우 연명하던 몰락한 문파의 이름.
요즘 들어 점창삼황으로 인해 문파의 위치가 격상됐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무서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팔황문이 기습을 당했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창의 힘은 막강, 그 자체였다.
운상은 팔황문을 전멸시키고 은하문이 방어를 하는 전선으로 점창이 움직이자 본진과 떨어져서 무풍사의 진영을 반으로 가르며 전진했다.
뒤쪽에서는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운호와 운여가 따르고 있었는데 무인지경으로 벌판을 휩쓸며 촘촘하게 펼쳐진 무풍사 병력을 파괴했다.
수시로 초절정의 무인들이 나타나 전진을 막았으나 아무도 그들을 멈추게 만들 수 없었다.
절대의 경지를 넘어선 그들의 질주를 막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불과 일각 만에 무풍사의 진영을 관통한 운상이 첨예하게 맞서 있던 양측의 전선을 뛰어넘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소하령을 찾는 것이었다.
당운영의 죽음 앞에서 운호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역시 그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잃고 싶지 않았다.
운호에게는 미안했지만 그의 솔직한 심정은 하루라도 빨리 호남으로 돌아가 소하령을 찾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피가 튀는 전장 속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 걸까? 살아 있겠지? 그래, 살아 있을 거다.
“하령아, 하령아!”
미친 듯 움직이며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은하문의 진영을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뒤쪽에서는 운호와 운여가 여전히 호위하듯 그를 감싸고 있었는데, 누구라도 조금의 위해를 가해온다면 단숨에 검을 날릴 기세였다.
마치 거짓말처럼 피로 물든 사람이 나타난 것은 전선의 가장 끝자락까지 운상이 달렸을 때였다.
“오라버니!”
“하령아!”
그 예뻤던 모습이 온통 피에 젖어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어디서 뒹굴었는지 몸은 흙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운상은 즉시 그녀를 꽈악 끌어안은 채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소하령이 꿈틀대자 품에서 그녀를 떼어낸 운상이 급히 손으로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나 소하령은 가만히 운상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서 있기만 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운상은 자신이 다쳤을까 봐 옷자락 속까지 급히 헤집고 있었다.
“오라버니, 나 조금밖에 안 다쳤어요.”
“응… 응.”
“나, 안 예쁘죠?”
“아니, 예뻐.”
운상이 고개를 흔들며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소하령은 이 와중에도 운상에게 자신의 엉망이 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자꾸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뒤쪽에 서 있던 운호와 운여는 어느새 전장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귀 같은 전장의 소용돌이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하령의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더없이 따뜻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뜨거운 물기가 담겨 있었다.
“하령아, 고마워. 이렇게 살아줘서.”
점창의 본진은 팔황문을 전멸시키고 곧장 동쪽으로 이동해서 무풍사를 급습했다.
은하문과 치열하게 접전을 펼치던 무풍사는 배후를 고스란히 열어놓았기 때문에 점창이 후면을 치고 들어오자 금방 비틀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은하문 쪽에 가세한 운호와 운여가 선두에 서서 무풍사의 선봉을 격파하자 기세가 오른 은하문이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에 나섰기 때문에 전쟁의 양상은 급속도로 변하고 말았다.
적과의 전투에서 진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걸 의미한다.
더군다나 앞뒤로 양면 공격을 당한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결과 역시 그렇게 나타났다.
비록 무풍사가 신주십강에 들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은하문의 무력도 만만치 않았는데 뒤쪽에서 점창까지 치고 들어왔으니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풍사를 이끌고 있는 신창제 공찬은 피로 범벅이 된 채 사력을 다했지만 끝내 창을 땅에 꽂은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바로 운호의 흑룡검에 의해서였다.
운호는 신창제와의 대결에서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나 멀쩡한 모습으로 끝까지 전장을 휩쓸며 무풍사가 자랑하는 무인들을 쓰러뜨렸다.
승패가 갈려가는 상황에서도 운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혼신을 다한 전투가 사문의 제자를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끝난 것은 점창이 가담한 지 세 시진 만이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환상적인 노을을 만들어낼 때 점창은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구름은 피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살육의 현장에서 솟구친 피가 땅을 적시다 못해 구름까지 물들인 것 같았다.
수많은 시신들.
거의 이천에 가까운 무인이 주주의 구릉지 사이에 널브러진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구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혈지였고, 혈해였으며, 혈운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죽음을 만들어낸 것일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주주 벌판을 가득 채워 음습한 대지로 만들었다.
마치 구천 지옥의 붉은 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