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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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8화
경계병이 있음에도 운호는 곧장 전막을 밝히는 횃불로 향했다.
야전에서 전막은 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경계병들은 전막에 불이 붙지 않도록 횃불에 바짝 붙어서 경계를 섰으나 운호의 공격에 수초처럼 흔들리다가 쓰러져 갔다.
풍검문이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던 판흥벌에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름대로 간격을 벌려놓았으나 전막에 불길이 붙자 성난 화마가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불길은 자연스레 다른 전막들로 옮겨갔다.
화재가 일어나자 잠에서 깬 풍검문 무인들이 불길을 잡기 위해 미친 듯 뛰어다녔지만 그들의 등 뒤에는 이미 지옥의 사신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미리 대비하고 상대해도 대적할 수 없는 자들의 기습 공격은 그들을 속절없이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
와아… 와아!
애꿎은 함성이 난무했고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병력들은 적을 찾지 못한 채 어지러운 발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운호는 유운신법을 펼쳐 불이 붙은 전막 사이를 귀신같이 움직이며 적들을 주살했다.
전막에서 뛰쳐나오는 적들은 끝이 없었고 죽여야 할 자들은 지천에 깔려 있었다.
내력을 아끼지 않았다.
내공이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르면서 기혈이 엉키지 않는 한 소모와 생성이 하나로 이루어졌고 신체는 극도의 균형 속에서 조화로이 움직였다.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은 운호가 펼친 검기의 물결을 자연스럽게 숨겨주어 누가 공격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탄강.
운호가 전막 사이를 누비며 펼친 것은 회풍의 산자결이었다.
한꺼번에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자결은 탄강이 근본인 초식이다.
운호가 빠져나간 곳은 시신으로 켜켜이 쌓여갔다.
공격해 온 자들을 확인하지 못하고 미처 대적의 의지조차 갖지 못했던 풍검문 무인들은 운호가 펼친 탄강에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삼삼오오 모여서 허둥대며 전열을 갖추던 무인들이 집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혈의 검귀들로 구성된 풍검문은 신주십강에 들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는데, 그 이면에 정립된 군기와 확고한 명령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마가 휩쓸고 정체 모를 적들에 의해 동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상황임에도 늦게나마 진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체계가 그만큼 잘 정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열을 구축하고 적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거의 한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그 한 시진 동안 판흥벌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단 셋에 의해 거의 삼백이 죽어 나자빠진 판흥벌은 전막의 불길에 의해 시신이 타면서 역겨운 냄새를 연신 뿜어내는 중이었다.
각 부대의 수장들에 의해 혼란을 멈추고 적을 확인한 풍검문의 무인들은 솟구치는 분노로 몸을 덜덜 떨어댔다.
확인된 적이 단 세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화공을 틈타 상당수의 병력을 줄여 버린 운호 일행은 판흥벌의 벌판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주변에는 수많은 적들이 진형을 갖춘 채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으나 운호뿐만 아니라 운상과 운여조차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절대의 반열에 들어서기 전이었다면 병력의 숫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운호는 운상과 운여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그들을 양옆에 매달고 적진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풍검문은 신주십강에 포함되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일반 병력이라면 몰라도 문주인 풍도제를 비롯해서 초절정의 무인들이 포위 공격을 한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은 운호가 흑룡검을 앞세우고 적진을 헤집었다.
막아온 적은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은 살상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북풍한설.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은 냉막함 속에서 그의 검은 혈류를 뿌려대며 천지사방을 휩쓸었다.
그의 검은 각 부대의 수장들을 노렸다.
병력의 중심에서 지휘를 하는 자들을 향해 날아가며 일격에 목숨을 거둬 나갔다.
수장을 잃은 병력은 날개 꺾인 기러기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운호의 신형은 질풍처럼 움직였다.
그가 가는 곳은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풍검문 무인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바닥에 나뒹굴었다.
운호의 막강한 위력을 보완하는 운상과 운여의 공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각 형태로 진형을 구축한 그들은 유운신법을 펼치며 동시에 풍검문 무인들 사이를 질주했는데, 그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전막을 태우던 불길마저 뒤로 누워 그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줄 정도였다.
또다시 반시진이 지나자 이백여 명의 병력이 바닥에 쓰러졌다.
단순한 병력의 손실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부대를 이끄는 단위부대장만 해도 거의 이십여 명이 주살되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병력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포위한 건지 모호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무시무시한 무력으로 수없이 많은 무인을 죽여 버리는 운호 일행은 풍검문 무인들의 눈에는 악마로 비춰졌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으로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운호 일행의 걸음이 멈춰진 것은 전면에서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경기를 내뿜으며 열세 명의 무인들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온전하게 내려선 것은 아니었다.
운호의 공격에 의해 타격을 입은 그들은 휘청이며 다섯 걸음씩 물러선 후 겨우 균형을 잡았는데, 그럼에도 완벽한 방위를 점한 채 운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타난 자들은 풍검문의 특수 타격대 풍검십삼풍이었다.
풍도제가 직접 길렀다는 비밀 병기로, 그들이 바로 풍검문의 암천이었다.
문제는 그들에 이어 왼쪽에 일곱 명의 적포 검객들이 칠성을 점하며 나타났고 오른쪽에는 다섯 명의 흑의 전포를 입은 도객들이 포위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풍검문이 자랑하는 풍검칠극과 풍검오천이라는 자들로 모두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풍검십삼풍의 선두에 선 석천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분노로 인해 얼굴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불과 두 시진도 안 되서 풍검문 전력의 오 할이 소멸되었으니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문주이자 아버지인 풍도제가 대도문주를 만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풍도제는 자리를 비우며 그에게 내일 있을 공격에 차질이 없도록 병력 관리에 만전을 기하라는 부탁을 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아버지를 어찌 볼 수 있단 말인가.
공격해 온 자의 정체가 마검이란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이각 전이었다.
워낙 전막을 태우는 화마가 강했고 병력들이 우왕좌왕 정신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적들이 공격해 온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누군가가 움직이며 수하들을 쓰러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대장들을 소집하고 긴급명령을 내려 적들을 압박하도록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거의 삼백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난 후였다.
더욱 환장한 것은 적들의 두 번째 움직임 때문이었다.
마치 철저하게 계획된 것처럼 놈들은 무서운 속도로 움직여 단위부대장들과 선봉들을 때려 부쉈다.
막고자 노력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방향을 돌려 다른 쪽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반시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차단을 할 수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포위를 했으니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놈들이 거의 오백에 달하는 병력을 죽였지만 그들 중 삼백은 낭인들과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었고 실질적으로 풍검문의 피해는 이백에 불과했다.
그것도 정예들은 그가 관장하면서 전투에 참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각 당의 당주들과 주력 무인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제 놈들의 발을 묶어놓은 이상 죽일 일만 남았다.
운호를 바라보는 석천의 눈은 광기에 젖어 번들거렸는데, 거의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공격해 온 자가 그토록 저주하던 마검이란 걸 알고 난 후부터 그는 독사 같던 심계마저 잊어버린 채 오직 분노에 젖어 있었다.
“마검… 이 개 같은 놈. 죽여주마.”
“너 같은 자에게 죽을 마검이 아니다.”
“비겁한 놈. 기습으로 이득을 본 주제에 건방을 떨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다. 내 기필코 네 목을 베고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그년 옆에 뿌리고야 말 테다.”
“…….”
“왜 말이 없나. 그년이 죽은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으…….”
“표정을 보니 알고 있는 것 같군. 어때, 직접 보니까 반갑지 않았어?”
“네가 한 짓이었느냐!”
“당연한 걸 묻는군. 내가 목을 베었다. 그런 후 사지를 하나씩 잘랐지. 그런 부도덕한 년에게는 과분한 죽음이었지만 그 정도로 봐줬다. 생각 같아서는 개의 먹이로 주고 싶었으나 바빠서 그렇게는 하지 못했어.”
“큭… 끄윽…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말했잖아, 지아비를 속인 갈보 년이라고. 그년은 지아비를 속이고 언제나 너를 생각하면서 더러운 짓을 일삼았다. 그러니 너도 똑같이 찢어서 그년 옆에 널어주마. 같이 저세상에 가서 실컷 놀아보거라.”
“으… 헉, 헉!”
석천의 독설에 운호의 입에서 길고 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점점 눈의 혈관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운상과 운여가 놀라서 급히 나서려 했을 때 운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채 석천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풍도제는 대도문주와의 협의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화광을 보면서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내일 있을 공격 회의를 위해 대도문이 있는 산야에 간 것은 세 시진 전이었다.
당문과 황보세가를 격파하고 장안을 함락했다는 기쁨을 나누면서 그는 오랜만에 대도문주와 술잔을 기울였다.
대도문주 사공후는 젊었을 적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막역한 친분을 쌓았던 사람이었기에 전략 회의를 마친 후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술자리를 가졌는데 어여쁜 가기까지 준비해서 주흥을 돋우는 바람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참으로 즐거운 자리였다.
무인으로 태어나 천하를 바라보며 웅지를 불태우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으나 친우와 함께 아리따운 가기를 품고 술 마시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독을 풀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얼근하게 취한 상태로 자신의 진지를 향해 느긋하게 돌아왔는데, 천천히 걸으며 정취에 젖어 달빛에 물든 능선을 넘었다.
대도문이 진지를 편 산야와 풍검문이 진형을 펼친 판흥벌은 불과 십여 리가 떨어졌을 뿐이다.
신법을 펼친다면 이각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풍도제는 월하풍경에 젖어 거의 반시진이 걸릴 만큼 친위 부대인 십팔신풍을 대동한 채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다.
화광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판흥벌로 들어선 그는 너무 기가 막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지옥.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자리를 비운 것은 세 시진에 불과했는데 판흥벌은 이미 지옥으로 변해 오백에 달하는 풍검문 무인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자 오십 장 앞에서 이백여 명의 병력이 누군가를 포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냉정을 되찾은 풍도제가 남아 있는 병력을 확인하고 천천히 한숨을 내리쉬었다.
신풍전과 천풍당을 비롯해서 꽤 많은 수의 진력들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수장들이자 자신의 수족들인 전주들과 당주들이 검을 굳게 잡은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불행 중의 다행이다.
수많은 병력이 죽어 나자빠졌으나 진력이 살아 있다면 언제든 회복할 방도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솟구쳤다.
급하게 병력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갈 때 포위망에 갇혀 있던 자 중 하나가 누군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보였다.
그냥 돌진이 아니라 폭풍 같은 질주였고 치켜든 검에서는 칠 척에 달하는 핏빛 검기가 하늘을 수놓으며 폭발하듯 날아가고 있었다.
어허… 어허.
도대체 누가 저런 신위를 나타낼 수 있단 말인가!
저 정도의 탄강이라면 자신조차 정면으로 받아낼 엄두가 생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급하게 움직이던 신형이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선 후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안 돼!”
비명과 같은 고함 소리가 풍도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릴 것처럼 뻗어나간 핏빛 검기의 끝에 자신의 아들 석천이 검을 든 채 이를 악물고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