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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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5화
풍검문이 정확하게 안휘에 나타난 것은 이십삼 년 전의 일이었다.
풍도제 석송은 천왕이십오성의 일인으로 천왕오강에는 끼지 못했으나 무천십제에는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절대의 고수였다.
당초 계획은 안위에서 머물며 대계가 시작되면 무림맹의 후미를 치는 침투 부대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으나 청당전이 벌어지면서 북부 전선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신주십강에 속하는 풍검문.
풍도제 이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어 당문은 풍검문에게 치명타를 입고 연신 후퇴의 길을 걸어야 했다.
사돈지간이었지만 그것은 외부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을 뿐 그들은 원수보다 더 지독한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당문은 그들을 이용해서 청성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고 풍검문은 정략혼인을 통해 청당전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가졌다.
두 문파의 이해득실이 합쳐지면서 혼인은 성사되었으나 당문에서 풍검문의 야욕을 눈치채었고 시집간 당운영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게 된 후부터 두 문파의 사이는 급격하게 벌어졌다.
풍검문은 천왕성의 총사를 향해 스스로 직접 당문을 치겠다는 요청을 했다.
좋지 못했던 인연을 끈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버리겠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서로 간의 계략을 알게 되면서 언쟁을 통해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서로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들은 서로의 심장에서 흘러내리는 잔인한 피를 간절하게 원했다. 무인은 오직 검으로 말할 뿐, 하찮은 주둥이를 통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죽어도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당문은 풍검문의 전격적인 기습 전략에 휘말려 상당수의 무인을 잃었다.
한번 밀린 전선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형제처럼 지내온 황보세가가 옆에서 전력을 다해 도왔지만 풍검문에는 대도문이란 강력한 협조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황보세가마저 위험에 처했다.
연일 계속되는 후퇴.
전선은 자신들의 근거지인 당가타를 버린 채 섬서까지 밀려났다.
그 와중에 당문삼무 중의 일인인 외원당주 당추를 비롯해서 가문의 수많은 주력 무인들이 목숨을 잃어 이제 겨우 삼 할의 병력만 남았을 뿐이었다.
풍검문의 공격이 잠시 멈춘 것은 삼 일 전의 일이었다.
당문이 얼마 남지 않은 병력으로 풍검문의 치열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좌우를 받치고 있는 소림과 무당이 결정적인 순간 수시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병력은 계속 줄어들었고 남은 자들도 처참한 몰골로 변해갔다.
좌우의 전선이 천왕성의 전면적인 공격에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원 나갈 엄두조차 갖지 못할 만큼 그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구룡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들이 공격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천행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당문의 사정은 최악으로 몰려 있는 상태였다.
“지금 전황은?”
“좌방은 소천께서 오단을 직접 이끌고 출전하셨습니다. 이미 태백(太白)을 장악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우방은?”
“삼왕과 사왕께서 칠전과 함께 안강(安康)을 공략 중이신데 워낙 소림을 주축으로 한 무림맹의 방어가 탄탄해서 아직 뚫지 못한 것으로 아옵니다.”
청색 전포을 입은 사십 중년의 사내가 보고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태사의에 앉아 있던 풍도제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거대한 전막에는 풍검문의 주력 고수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석천도 끼어 있었다.
방금 보고를 마친 자는 풍검문의 전략을 맡고 있는 소환 철충이었다.
그는 천왕삼뇌에는 못 미치지만 대단한 전략가로 알려진 사람이었고 삼뇌와는 다르게 초절정의 고수였다.
풍도제가 잠시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좌중은 바늘 끝이 떨어져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이런 침묵을 깬 것은 풍도제의 장자 석천이었다.
“아버님, 이제 공격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소천께서 태백을 장악했고 왕자들께서 안강만 막아준다면 놈들은 고립무원입니다.”
“알고 있다.”
“혹여 청성이 움직일까 걱정하시는지요?”
“청성은 홍천에 웅크리고 있다. 그곳은 당문과 황보세가가 방어선을 친 석천과 불과 삼십여 리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전선에 투입되면 머리가 아파지는 경우가 생긴다.”
홍천은 당문이 방어선을 펼친 석천과 직선으로 삼십 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문평산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왕래를 하기 위해서는 족히 칠십 리는 걸리는 거리였다.
풍검문과 대도문이 청성을 공격권에서 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성의 방어선이 무당, 화산과 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부 전선은 한중(漢中)이 주전장이었으나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 홍천도 주요 전략 지점 중의 하나였다.
그랬기에 풍검문이 본격적으로 당문을 공격한다면 지원 나올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하지만 석천은 풍도제의 말을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그자들이 지원해도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우리 전력은 청성이 합류한다 해도 능히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파는 되겠지. 문제는 우리가 너무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음.”
풍도제의 걱정이 무엇인지 안 귀검 석천의 입이 굳게 닫아졌다.
당운영을 추적하면서 마검의 위치를 알게 되었지만 끝내 성에서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라도 그들을 죽이고 싶었으나 당시의 마검 옆에는 점창의 최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해야만 했다.
마검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당운영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그년을 죽이는 것이었으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뿐이었다.
혼인은 했으나 당운영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사고로 인해 물건이 서지 않는 고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임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략결혼이었고 당운영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증오를 갖게 된 것은 벌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과 행동 때문이었다.
혼인을 했으니 자신은 지아비였고 혼인을 했으니 그녀는 유부녀였는데, 늘 머릿속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하며 자신을 무시했다.
물론 사랑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그러고도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녀를 안을 수 없는 고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그에게 죽음 같은 고통을 심어주었다.
더러운 년.
죽여야 한다. 기회가 되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래야 죽음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풍도제의 고민에 입은 닫았지만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탈 정도로 답답해졌다.
만약 아버지가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면 또다시 불면의 밤을 새우며 고통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그를 도와준 것은 철충이었다.
“주공, 청성이 가세하면 물론 우리 전력이 상당 부분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격을 주저하시면 안 됩니다. 총사의 의중은 성의 주력이 구룡을 견제하는 동안 중앙에 있는 우리가 취약한 당문의 방어선을 뚫고 장안(長安)까지 함락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격을 안 하시게 되면 본성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수하들이 다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더군다나 청성이 지원하지 않을 가능성은 칠 할이 넘습니다. 놈들은 당문과 철천지원수가 아닙니까?”
“으흠.”
“주군!”
“정말 그 수밖에 없느냐?”
“예, 주군.”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면 선택할 수밖에. 우리가 비록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하더라도 대계에 지장을 줄 수는 없지. 공격은 내일 새벽에 결행하는 것으로 한다. 전략은 단 하나, 속전속결이다. 우리는 석천을 돌파하면 무조건 장안까지 진격한다.”
“존명!”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각 부대의 수장들이 한꺼번에 우렁찬 복명을 합창했다.
풍도제.
역시 일문의 수장답게 치밀한 심계를 지닌 자다.
어차피 공격할 거면서 모든 변수를 담아놓고 수하들에게 결정권을 반 이상 넘겨 스스로 우러나온 충성을 받아낸다.
먼저 위험을 견지시키고 그럼에도 공격해야 되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공격의 피해가 크게 되더라도 각 단의 수장들은 그에게 조금의 불복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풍운대는 사시(沙市)로 들어가 치료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사시는 남궁세가를 비롯해서 제갈세가 등 전통의 세가들과 삼십팔세 중 신극문과 대도천이 합쳐져 천왕성의 병력과 대치 중인 의창(宜昌), 송자(松滋)의 후방 백여 리에 위치했기 때문에 공격에서 안전한 곳이었다.
그들이 빠져나온 남부 전선은 망성(望城)에서 운곡의 예측대로 팽팽한 대치를 하고 있었는데, 양쪽의 병력이 집결하면서 일촉즉발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운호가 며칠간의 고민 끝에 운곡을 찾은 것은 오시 무렵이었다.
운곡은 가슴에 난 상처가 거의 아물어 이제는 기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운호가 들어오자 누웠던 몸을 일으켜서 맞아들였다.
“네가 어쩐 일이냐?”
“사형,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게 뭐냐?”
운곡이 묻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운호가 어렵게 입을 뗐다.
“사형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제라도 섬서에 가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커다란 위험에 빠진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음,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일이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운곡은 운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간해서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는 사제였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정도의 무력을 지녔음에도 언제나 공경한 태도를 유지했고 자신의 일보다 사문의 명을 우선했으니 언제 봐도 기꺼운 사제였다.
그런 사제가 걱정과 슬픔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운곡은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풍운대는 며칠 내로 망성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망성이 함락되면 호남이 천왕성의 수중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리되면 전선에 구멍이 뚫리게 되고 중부 전선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운호가 찾아와 자신에게 부탁을 하자 급격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무림의 안위도 중요했지만 그에게는 운호가 아픈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더군다나 북부 전선은 남부 전선 못지않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운호만 혼자 보내게 되면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운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같이 가겠다. 언제 출발하는 게 좋겠느냐?”
“사형,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풍운대는 망성으로 가야 합니다. 망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섬서의 일은 제 개인적인 일이니 저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느냐?”
“예, 사형.”
“그렇다면 운상과 운여와 함께 가거라.”
“저 혼자 가도 됩니다.”
“점창삼신룡은 점창을 상징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같이 움직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내 판단에는 곧 사문에서 본력이 내려올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황이 불리하게 되었으니 무림맹주인 소림은 결국 점창에게 손을 벌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출발해라. 우리는 본력과 합류해서 망성을 방어하도록 하마.”
“고맙습니다, 사형!”
“몸 보중 잘하거라.”
운곡은 운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푸근한 미소를 보였다.
분명 어렵고 힘든 길을 갈 것이다.
당문이 처한 상황은 어찌 보면 망성보다 훨씬 최악일 테니 운호의 앞길이 평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사제가 후회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창삼신룡은 그날 오후 풍운대의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났다.
그들이 있는 사시에서 당문이 방어선을 친 석천까지는 무려 삼천 리가 떨어져 있었으니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 오 일은 걸리는 거리다.
귀검 석천은 도열된 병력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참으로 지랄 맞게 당문이 방어선을 친 능선의 명칭이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석천이었다.
이것이 그녀와 자신의 악연을 알려주는 것일까?
풍검문의 좌측 칠 리 전방에는 대도문이 황보세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아침 출격 준비를 끝냈을 때까지 청성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정보가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알면서도 모른 체할 수도 있었다.
물론 풍검문은 주변 오십 리 주변의 수상한 자들을 전부 도륙해서 무림맹의 간자들을 모조리 잡아냈는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청성이 가담하게 되면 풍도제의 염려대로 전력에 많은 타격을 입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무림맹의 간자들을 척살했다.
청성이 가담하지 않으면 이번 공격으로 당문은 씨를 말리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오전에 석천을 말살시키고 저녁 무렵까지 장안까지 진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당운영을 찢어 죽이는 것.
그녀는 아직도 석천에 처박혀 마검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곧 만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