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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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3화
운호의 검이 하늘에서 무겁게 내려오자 뒤로 물러섰던 일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아오는 검은 지금까지 마검이 보여주었던 검법과 근본적인 궤에서 차이가 있었다.
산악을 갈라 버릴 것만 같은 중압감.
아니다. 운호가 펼쳐 온 것은 그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일순간 만물을 베어버릴 것처럼 모든 시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해서 피할 방도조차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적의 승부수라는 걸 인식한 그는 자신의 검을 뒤로 당겼다가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천신무한검법(天神無漢劍法)을 익힌 이후로 지금까지 단 세 번밖에 펼친 적이 없었던 최후의 초식 파천지붕(破天地崩)이 거대하게 다가오는 운호의 검을 향해 날아갔다.
맹렬한 회전과 탄성.
그의 검에서 빠져나온 검기는 원형 방패를 형성시킨 채 운호를 향해 날아갔는데, 한 번 튕겨 나갈 때마다 분산을 이루며 배로 늘어났다.
지속적인 충격을 주어 적의 검을 둔화시키고 끝내 수많은 회륜으로 적의 몸을 혈무로 만들어 버리는 공포의 초식이 바로 파천지붕이다.
콰광… 쾅… 쾅!
두 개, 네 개, 여덟 개로 늘어났던 검기의 회륜이 마침내 셀 수 없이 증폭되어 운호의 몸에 집중되었다.
막으면 막을수록 조금씩 갉아먹어 마침내 무너뜨려 버리는 일공의 회륜은 운호의 몸에 끊임없이 상처를 새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운호의 눈은 한순간도 일공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침잠되었던 그의 눈이 일순간 번쩍인 후 들고 있던 검이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동안 회륜을 막아내기만 하던 흑룡검에서 강렬한 빛무리가 솟구쳐 나오며 일공을 향해 날아간 것은 방어를 뚫은 한 개의 회륜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을 때였다.
검기의 결정체, 검구(劍求).
빛무리는 구체를 형성한 채 일공의 가슴을 노렸는데, 회륜에 부딪칠 때마다 점점 커지며 일공을 따라갔다.
마치 자석처럼, 아니면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검구는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끝없이 일공을 노렸다.
급하게 뒤쪽으로 후퇴하던 일공의 신형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섰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신형을 멈춘 후 천지사방을 장악한 채 비산하던 검기의 회륜을 운호가 시전 한 검구에 집중시켰다.
마지막 승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고 검구와 검륜이 충돌하면서 굉렬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돌풍이 사방으로 난무했으며 흙먼지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져 내렸는데 주변 십여 장이 가득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신형이 확인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 흙먼지가 모두 가라앉고 나서였다.
운호는 일 장 정도 밀려난 채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였으나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일공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서지 못했다.
처참한 모습.
가슴은 반이나 갈라졌고 검을 들었던 오른팔은 삼 장 너머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머리 한쪽이 잘려서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금방이라도 숨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운호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일어나자 일공의 흐릿한 시선이 쫓아왔다.
피, 그리고 피.
운호의 몸은 온몸이 피로 도배되어 마치 혈인처럼 변해 있었지만 굳건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일공은 남아 있는 왼팔을 땅바닥에 붙인 채 운호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며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운호는 친구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섰다.
운상과 운여의 싸움은 백중지세였기 때문에 당장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피를 흘리며 운호가 다가와 옆에 서자 껌벅거리던 눈을 추스른 일공의 입이 간신히 열렸다.
그는 말하는 것조차 힘에 겨웠던지 떠듬거리며 겨우 하고 싶은 말을 뱉어냈다.
“굉장한… 마지막… 너의 검… 그것이… 무엇이냐?”
“사일검법의 마지막 초식, 후예사일이오.”
“후예… 사일…….”
“아직 내 경지가 모자라 태양을 베지 못했소. 단숨에 보내 드리지 못해 험한 꼴을 당하게 했으니 정말 미안하오.”
“크큭… 그랬구나. 그랬어. 그 옛날 천왕성의 꿈을 무너뜨렸던 전설의 검법이… 바로 그것인 모양이구나.”
“아마 그럴 것이오.”
운호가 고개를 끄덕여 답변을 해주자 고통에 젖어 있던 일공의 얼굴이 편하게 변했다.
그의 눈은 이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동공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운이 좋구나. 무인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무적의 검법을 볼 수 있었으니 어찌 후회가 남겠는가… 누군가 나에 대해서 묻거든 편히 갔다고 전해다오…….”
일공이 숨을 거두자 뒤쪽에 서 있던 천왕십수가 지체 없이 몸을 날려 전권으로 뛰어들었다.
한쪽이 무너지면서 접근을 방해했던 압력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틈을 빠져나오며 운호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부상을 입고 허덕이는 운호를 죽이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던 모양이었다.
선두에 선 운곡이 먼저 검을 들었고 풍운대의 나머지가 그 뒤를 따라 천왕십수를 향해 부딪쳐 갔다.
비겁함을 비난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원래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행위 중에서 가장 비겁한 것이니까.
난전(亂戰).
절대고수들이 벌였던 공간 중 하나가 무너지자 전장은 금방 난전으로 변해 버렸다.
숫자가 부족한 풍운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한문의 수장 천무도 황무와 파한칠도가 장내로 난입하자 천왕성 쪽에서도 신기전주 마황과 세 명의 당주, 그리고 신기오검이 뛰어들었다.
천무도 황무와 맞붙은 신기전주 마황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무림백대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천무도와 맞붙어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접전을 펼쳤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황무를 압도했다.
운호는 자신에게 다가온 천왕십수를 사형들이 가로막자 즉시 검을 돌려 운상 쪽으로 향했다.
천왕십수를 사형들이 어느 정도 막아주기만 한다면 천왕삼공 중 나머지 둘을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평상시였다면 운상과 운여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기에 운호는 잠시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이공의 후면으로 날아갔다.
천왕십수 중 몇이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으나 운호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이공의 등을 노렸다.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잡는다.
순식간에 전황을 파악한 운호는 반드시 이공과 삼공을 잡아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랬기에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단숨에 이공을 척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공은 절대고수답게 운호가 접근하자 운상에게 삼 검을 날린 후 급히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늦어 운호가 펼친 회풍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눈부시도록 기민한 대응이었지만 작정을 하고 돌진한 운호를 막아내기엔 이미 늦었다.
운호가 순식간에 십이 검을 찔러낸 후 뒤에서 공격해 온 세 명의 천왕십수를 향해 사일검법의 방어 초식 비화를 펼쳐 낸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쾅! 쾅! 쾅!
두 개의 신형이 동시에 날아가 일 장 너머에 처박혔다가 일어섰다.
하나는 이공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운호였다.
운호는 피범벅이 되어버린 몸을 뒤집어 일으킨 후 자신을 공격해 온 자들을 노려봤다.
치명상은 면했으나 적들의 공격으로 또다시 팔과 다리에 꽤 커다란 검상을 입고 말았다.
슬쩍 옆으로 신형을 돌리자 이공이 운상의 공격에 연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이공은 운호의 강력한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등과 옆구리에 커다란 상처를 입어 연신 피를 흘려내는 중이었다.
씨익.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낸 운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공을 처리한 것에 대한 만족스러움에 흘린 미소였겠지만 상대에게는 마치 악마의 것으로 보일 만큼 징그러운 웃음이었다.
비화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주춤 뒤로 물러났던 자들이 이를 악물고 공격을 재개한 것은 운호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검을 치켜세웠을 때였다.
천왕성이 자랑하는 초절정의 고수, 천왕십수.
셋이면 절대고수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막강한 무력을 지녔지만 그들은 단숨에 승부를 걸어오지 않았다.
운호의 몸은 피범벅인 상태였는데, 그의 몸이 기혈이 엉켜 내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속해서 운호를 괴롭혔다.
잠시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게 집요한 공격을 퍼부어 운호의 몸에 무수한 상처들을 만들어내며 숨통을 끊기 위한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그것은 운호가 만들어낸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였다.
어느새 이공을 죽여 버린 운상이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운상 역시 정상적인 몸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할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운호까지 싸움에 가담했기 때문에 전세는 금방 역전되고 말았다.
상처 입은 호랑이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나운 이빨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맹수들이었다.
헉…헉.
운상과 함께 세 명의 천왕십수를 쓰러뜨린 운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장을 확인했다.
이미 운상은 몸을 날려 천왕십수와 싸우고 있는 풍운대 쪽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자신은 전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으나 급하게 내공을 온몸으로 돌리자 조금씩 기운이 돌아왔다.
죽은피가 또다시 흘러나왔지만 운호는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가슴에 셋, 팔에 다섯, 등 쪽에 넷, 다리에 여섯 군데의 상처가 났다. 큰 것만 헤아렸으니 그 정도였지, 나머지 자잘한 상처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일공과의 최후 격돌에서 기혈이 엉켜 내공의 운용이 원활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천룡무상심법을 운용해서 풀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새가 없어 평소의 오 할도 되지 않는 내공만 움직였다.
천왕삼공 중에 둘이나 죽였고 천왕십수도 셋이나 죽였으나 여전히 전황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대로 싸움이 지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형들은 수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천왕칠수와 공방전을 주고받았지만 굳건히 방위를 점한 채 밀려나지 않았고, 운여는 삼공과 계속해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적들의 부대가 진형을 갖춘 채 다가온 것은 신기전주 마황의 검에 의해 파한문주 황무가 비틀거리며 세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싸움의 양상은 운호의 예측대로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황무전의 수장 양전이 선두에 나서며 돌격을 감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진격로의 중앙을 점유하며 싸움을 벌이던 풍운대와 파한문의 수뇌부들은 뒤쪽으로 급히 물러나 다시 진형을 갖추었지만 물밀듯 밀려드는 병력의 진격에 휘말려 난전에 빠져들고 말았다.
파한문의 병력은 방어선을 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진형을 허물어뜨리는 순간 전곡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싸움에 나서면서 황무가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풍운대는 뒤로 밀리면서 적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수없이 많은 적들을 주살했으나 적의 병력은 끝이 없었고 중간중간에 천왕십수가 공격에 가담해 왔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파한문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는 방어선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한계를 느낀 풍운대가 파한문의 방어선을 뛰어넘어 뒤로 물러섰다.
파한문주 황무와 수뇌부는 방어선의 전면에 서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방어선 뒤쪽으로 물러선 풍운대의 몰골은 전부 혈인으로 변해 있었다.
무려 한 시진에 가까운 난전을 펼쳤고 강적들과 상대하느라 그들의 호흡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상태였다.
가장 심한 것은 역시 운호였다.
운호는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고도 사형들을 보호하느라 가장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에 더욱 더 만신창이로 변한 상태였다.
하기야 부상을 입은 것은 운상과 운여뿐만 아니라 풍운대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운여는 결국 삼공과 승부를 내지 못했는데, 두 사람은 서로의 몸에 무수한 상처를 남긴 채 병력들의 진격으로 헤어지고 말았다.
뒤쪽에서 호흡을 고르던 운곡의 시선이 번들거리며 전장을 주시했다.
전장은 이미 천왕성 쪽으로 기울어져 방어선이 허물어지며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불과 일각도 걸리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력의 차가 너무 컸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전곡이란 지리적 유리함을 등에 업고 풍운대가 전면에서 막아내지 않았다면 전투는 훨씬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전곡은 이각을 넘기지 못할게 분명했기에 풍운대는 운곡의 결정을 기다렸다.
싸우든 후퇴하든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
한동안 전장을 노려보던 운곡의 시선이 힘겹게 뒤쪽으로 돌아왔다. 운곡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안광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운여!”
“예, 사형.”
“운호를 업어라. 우리는 여길 빠져나간다.”
“저들을 그냥 두고 간단 말입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선두에 서서 수많은 적과 싸웠으니 점창의 명예는 이로써 충분히 보였다. 이 싸움에서 진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뒤쪽에서 웅크린 채 소심한 전략으로 일관한 모산파의 실책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련 없이 여길 떠난다.”
“어디로 갑니까.”
“우린 운극이 제시한 대로 천자산을 넘어 호북으로 들어갈 것이다. 남부 전선은 모산파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 당분간 망성에서 버틸 것으로 판단되니 우리는 호북으로 들어가 일단 치료부터 하고 나서 추후의 행동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