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71화
무료소설 풍운사일: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71화
길수(吉首)는 호남 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천왕성 남부 정벌군이 공략을 시도 중인 안록산과는 백이십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다.
세 명의 백삼 노인들이 길수에 나타난 것은 이틀 전 점심 무렵이었는데, 그들은 황우 객잔에 짐을 풀어놓고 어딘가를 나갔다가 저녁때면 들어오곤 했다.
그들은 점소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대하는 마음이 부드러웠고 음성은 조용조용했으며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잔돈푼을 쥐여 줬기 때문에 점소이들은 서로 그들을 시중들기 위해 다툼을 벌일 정도였다.
황우 객잔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하루 종일 들락거렸지만 그들을 주시하거나 경계하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옷은 깨끗하게 차려입었으나 체격도 작고 볼품없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상가의 뒷방 늙은이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에 요홍이 홀로 나타난 것은 노인들이 저녁을 먹은 후 객방에 들었을 때였다.
깊게 숙여진 허리의 각도가 허물어질 것처럼 깊다.
남부 총사령인 요홍은 노인들 앞에서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대신 입에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홍이로구나.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숙부님들을 모시려고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걸 보니 화검제가 가르쳐 준 모양이구나?”
“제가 워낙 고민을 크게 하다 보니 화검제께서 지켜보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언제부터 그리 입이 가벼워졌을까. 일이 있어 왔으니 모른 체하라고 말한 게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떠들고 다녔어!”
중앙에 앉아 있던 통통한 노인이 슬쩍 음성을 높이자 양쪽의 노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시늉이었다.
천왕삼공.
현 천왕성주 요환의 친우들로서 경천동지의 무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절세고수들이었다.
천왕성 내에서는 무천십제에 포함된 화검제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알려진 전대 고수들로서 요환의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워낙 오랫동안 칩거를 했기 때문에 천왕성의 사람들조차 그들의 이름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차례대로 일공, 이공, 삼공이라 불렀는데 중앙에 성마른 음성을 흘린 통통한 노인이 일공이고 우측의 백염 노인이 이공, 좌측의 머리숱이 적은 노인이 삼공이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잠시 후 일공은 고개를 숙인 채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요홍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어릴 적부터 지켜본 요홍이 난감한 모습을 보이자 슬그머니 마음이 풀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의 고민이 무엇이냐?”
“안록산에…….”
일공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던 요홍의 입에서 남부 전선의 전투 상황과 핵심 전술들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예 작정한 듯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두 토해냈는데, 삼공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없이 혀를 차고 있었다.
결국 풍운대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안록산전투의 상황을 끝으로 요홍이 말을 마치자 천왕삼공의 입에서 동시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기껏 몇 놈 때문에 전진을 못 한다는 게 너무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요홍의 고민이 황당한 것만도 아니었다.
풍운대에 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창삼신룡이란 놈들에 대해서는 총사인 천뇌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제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녔고, 중원에서 활개를 친다는 백대고수 중 여섯을 잡아냈다고 하니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자들이었다.
셋도 그런데 여덟이라면 더욱 이해가 갔다.
그런 자들이 무림맹의 부대와 공조해서 요충지를 방어한다면 평상시보다 두 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전선이 형성된 상태에서 그만한 병력을 뺀다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따를 테니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풍운대를 상대할 만한 고수들을 투입하는 것뿐이다.
아마 요홍이 자신들에게 온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성주인 요환의 부탁으로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비밀.
무림은 물론 천왕성의 사람들마저 모르는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왕성주인 요환의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주화입마에 빠진 것은 벌써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천왕검법의 마지막 초식 천뢰광참(天雷光斬)의 오의를 터득한 기쁨에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하다가 기혈이 뒤집히며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모습을 감춘 채 천하일통의 대계를 장자인 요문에게 맡긴다는 유지를 공공연하게 남긴 것은 천왕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요환의 마지막 고육책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천왕성의 전권을 틀어쥐고 있는 요문과 친우인 천왕삼공 자신들뿐이었다.
심지어 천왕성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천뇌 설운호도 몰랐고 요문을 제외한 자식들마저 모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극비 중의 극비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길어야 한 달.
그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며칠 전.
요환은 문득 천왕삼공을 불러 호남에 가서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거인, 천왕성주 요환.
젊은 시절 천하가 좁다 하며 질주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입술이 거칠게 부르트고 눈마저 제대로 뜨지 못하는 백발의 노인이 겨우 입을 열어 한 말은 한 여인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거침없이 달려온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라며 요환은 친구들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사랑했던 여인이란다.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이었으나 선부의 명에 의해 성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무림에 버려둘 수밖에 없었던 사람.
죽음을 앞두고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고 싶다는 요환의 부탁을 받자 천왕삼공은 이십삼 년의 칩거를 깨고 무림에 나오고 말았다.
찾아주고 싶었다.
평생을 같이했던 친구가 마지막 가는 길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의 수소문 끝에 간신히 그녀가 광서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일공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슬쩍 눈을 들어 이공과 삼공의 눈을 마주친 후였다.
칠십 년 가까이 살을 부딪치며 살아왔으니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싸움은 기껏해야 삼 일 정도면 끝난다.
하루가 아쉬운 그들이지만 천왕성의 대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 요홍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언제 공격할 생각이냐?”
“내일입니다. 남부군의 상황은 한시가 급한 상태라서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숙부님들께서 결정만 내려주신다면 전 전선이 동시에 공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대신 우리는 풍운대만 잡으면 즉시 떠날 것이다. 알겠느냐?”
“숙부님들의 도움을 소질은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신응이 속속들이 보내온 전갈에 따르면 전황은 무림맹 쪽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들의 세력에서 황보세가와 함께 버티던 당문은 뒤늦게 구룡이 지원군을 보내왔으나 끝내 근거지를 잃고 섬서로 후퇴하고 말았다.
선조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던 그들은 결국 수많은 가문의 정예들을 시신으로 남긴 채 당가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피와 눈물, 그리고 고통.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검을 두고 떠나야 했던 당문 사람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견디며 후퇴의 길에 올랐다.
팽팽하게 맞서던 북부 전선이 뒤로 밀리기 시작한 것은 당문이 후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구룡 중 화산과 종남이 방어선을 펼쳤던 녕강(寧强)이 함락당하면서 북부 무림맹은 한중(漢中)까지 밀려났는데, 천왕성은 여전히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부 무림맹이 아직까지 팽팽하게 맞서며 전선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중부 무림맹은 남궁세가를 주축으로 칠대세가의 다섯 가문이 모였고 삼십팔세 중 금철련 등 네 개 문파가 가세하면서 요환이 이끄는 천왕성의 중부군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의 전략가들은 중부 전선의 교착상태가 천왕성의 의중에 따라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란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과 북을 집중적으로 쳐서 어느 한쪽만 무너뜨리면 중부 전선은 자연스럽게 고사한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분석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도 마땅치 않았다.
그저 남부 전선과 북부 전선이 천왕성의 공격을 격퇴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니 무림은 태풍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했구나. 어떻더냐?”
운극과 운천이 후퇴로를 살피고 돌아온 것은 저녁을 먹고 풍운대가 전막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거의 하루가 꼬박 지나고 돌아왔는데, 먼지가 뽀얗게 묻어 흑색 전도복이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운곡의 질문에 운극은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대답을 해왔다.
꼼꼼한 운극은 분명 호북으로 빠져나가는 경로를 빠짐없이 둘러보고 온 게 분명했다.
“전곡이 뚫리면 익양 방어선이 뒤를 받칩니다. 하지만 익양은 평야 지대이니 전곡이 함락되면 후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테지.”
운극의 판단은 정확했다.
모산파가 익양에 방어선을 친 것은 안록산을 우회하는 적들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지, 주공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평야 지대에 방어선을 쳐 놓고 기다린다는 건 비세를 스스로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익양을 방어했던 병력은 안록산이 함락되는 대로 망성(望城)으로 후퇴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들은 늦을 것입니다. 소제가 봤을 때 지금 이동하지 않는다면 전곡이 뚫리는 순간 그들도 익양에서 천왕성의 공격을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무검제는 그리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어리석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익양을 버리고 망성으로 후퇴한다는 건 안록산을 지키는 병력을 전멸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방어선을 움직이지 못한 채 안록산의 전투를 지켜봐야 할 겁니다.”
“음… 그렇겠구나…….”
“만약 전곡이 뚫리게 된다면 우리는 익양과 반대 방향인 상덕(常德)을 통과해서 천자산(天子山)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 움직이면 천왕성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산파와 쾌활림이 위험하다.”
“당연히 위험하겠지요. 하지만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모산파는 신주십강 중의 하나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고 아직 주봉에는 패천방의 병력이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익양 방어선은 천천히 후퇴하면서 망성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을 따라가야 되지 않겠느냐?”
“풍운대가 성한 몸이라면 대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 제가 제시한 후퇴로는 우리가 더 이상 전투에 참전하지 못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구나. 수고했다.”
운극이 모든 보고를 마치고 뒤로 물러나자 운곡이 격려를 한 후 둘러싼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반시진 전에 날아온 전서에 따르면 전 전선의 천왕성 병력이 공격을 위해 전진 배치되고 있었다.
안록산뿐만 아니라 남악 전선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강서에서 숨을 고르던 팔황문과 무풍사까지 호남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안휘전을 치르면서 많은 전력을 상실했음에도 한 달여의 휴식을 취하고 나자 본래의 패기를 되찾은 채 피 맛을 보기 위해 달려오는 중이었다.
“이제 두 시진 이내에 천왕성의 공격이 시작될 것 같다. 나는 운극의 말에 따라 움직일 생각이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싸울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천자산을 넘어 호북으로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몸을 보중해다오. 너희들을 잃는 슬픔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부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지 말라.”
운호는 전막에서 나와 홀로 바위 위로 올라갔다.
당문이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섬서로 후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마음은 하늘을 날아 사천으로 달려갔으나 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운명을 건 일전을 남겨놓고 풍운대를 남겨둔 채 홀로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찢겨져 핏물 속에 잠겨 있는 상상이 자신도 모르게 자꾸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무사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신응이 전해온 서신에 따르면 당가타 일대는 당문 무인들의 시신으로 덮여 마른땅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했다.
아, 이 일을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그녀와의 약속을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고자 했다.
운곡에게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절망적인 상황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면 자신은 분명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것이 틀림없다.
풍운대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떠날 때 그녀는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언제까지 기다릴 테니 꼭 와달라는 말과 함께.
얼마나 무섭고 떨릴까.
적들의 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가냘픈 몸을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가야 한다.
가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두 번 다시 슬프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