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사일 1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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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풍운사일 168화
운여의 말에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잠시의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고 대신 운몽의 성마른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 나왔다.
“운여,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어찌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사제, 잠시 기다려. 운여… 무슨 말인지 자세하게 말해보거라.”
“그게…….”
“사형, 아무 일도 아닙니다. 운여의 말은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운여가 입을 열려고 하자 급히 운호가 가로막듯 나섰다.
그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운곡은 여전히 운여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운여는 운곡의 강제에 의해 그 옛날 칠절문과의 전투 때부터 맺어졌던 당운영과 운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인연이 참 길고도 진하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방 안은 또다시 정적에 잠기고 말았다.
풍운대는 물론이고 자리를 함께했던 정탁마저 입을 열지 못했는데 그는 운여의 말이 끝나자 마른기침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바쁜 일이 있어 일어나겠네. 본문에 급하게 전할 전갈들이 쌓여 있고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일들도 많아 사제들이 떠나는 걸 지켜보지 못할 것 같으이. 어지러운 세상이니 어딜 가든 몸 보중 잘들 하시길 바라겠네. 자, 그럼 나는…….”
역시 연륜은 어쩌지 못한다.
정탁은 본산에서 내려온 사제들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즉시 자리를 피해 버렸다.
나가는 그를 배웅하고 다시 자리에 앉은 운곡의 표정은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하긴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운몽마저도 운여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는 고개를 돌린 채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다시 입을 연 것은 운곡이었다.
“운호!”
“예, 사형.”
“미안한 말이지만 무림 정세로 봤을 때 풍운대는 남부 전선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너의 사정이 그러하니 네가 당문으로 가고자 한다면 풍운대의 수장으로서 너의 당문행을 허락하겠노라.”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운호!”
“저는 점창의 제자로서 사사로운 일 때문에 사문의 지엄한 명을 거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음… 네 뜻이 무엇인지 알겠다. 하나 지금의 이 결정이 천추의 한이 될 수 있음을 어찌 모르느냐!”
“후회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저의 몫입니다. 사내로서 약속을 지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너의 약속이 무엇이었느냐.”
“그녀를 언제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찾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는 제 목숨이 다했을 때뿐입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래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는 제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 테니까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안타까운 눈으로 운곡이 물었다.
그의 말에 담긴 뜻은 차마 입으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슬픈 것이었기에 운호 역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탁자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참이 지났음에도 운호가 대답을 바꾸지 않자 운곡은 결국 힘든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우리는 반시진 후 여기를 떠나 호남의 영주(永州)로 이동한다. 전선이 위태롭다 하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할 것이고 도착하는 즉시 천왕성의 요충지를 때릴 생각이다. 다른 의견이 있느냐?”
“남부 무림맹에는 합류하지 않습니까?”
“가급적 무림맹에 합류하지 말라는 장문인의 말씀이 계셨다. 우리는 위기에 처한 무림맹에 도움을 주는 역할만 하면 될 것이다.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좋다. 그럼 다들 출발 준비가 끝나는 대로 길을 떠난다.”
호남에 구축된 남부 전선에는 천왕성 직속의 일곱 개 전투부대를 요홍이 직접 이끌었으며 예하 세력인 천검회와 수라맹, 천문이 전투에 참여했고 안휘에서 빠져나온 팔황문과 무풍사가 광서의 안복(安福)에 진을 쳤다.
그 외에 천왕성에 호응한 중소 문파가 무려 사십여 개나 참여했기 때문에 호남 인근에 모인 천왕성 세력의 병력은 거의 만 명에 육박했다.
그에 맞서는 남부 무림맹의 주축은 호천십문과 호남, 강서, 광동, 복건의 패주로 위세를 떨쳤던 신마문, 철기맹, 죽련, 파한문, 제천문 등이었다.
그러나 참전한 문파 중 무엇보다 강력한 세력은 구룡의 신성으로 떠오른 모산파였다.
무천십제 중 무검제가 이끄는 모산파는 남부 무림맹의 중심에 서서 전쟁을 이끌고 있었는데 강력한 무력과 도력으로 혁혁한 전과를 보여주었다.
남부 무림맹 역시 삼십팔세 중 열네 개 문파가 뭉쳤고 오십여 개의 문파들이 참전하면서 병력의 수는 천왕성에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지닌 무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다.
천왕성에서 나온 부대들은 대적불가의 위력으로 전장에 나설 때마다 적진을 휩쓸어 버렸기 때문에 남부 전선은 시시각각 호남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중이었다.
그동안 무림에 존재했던 어떤 문파의 부대들보다 강력한 무력을 지닌 자들이었지만 남부 무림맹이 이토록 형편없이 밀리는 것은 혈검쟁투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 컸고, 문파 간의 앙금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협격이 어려웠던 게 더 큰 이유였다.
적을 앞에 두고 아군끼리 싸운다면 전쟁은 해보나 마나였으나 그들의 분노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신마문이 주둔한 곳은 영주에서 이십 리 동쪽에 위치한 남악(南岳)이었다.
줄지어 이어진 산.
산맥이라 표현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산의 위치도 듬성듬성했으나 그럼에도 겹쳐 보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험준했다.
이곳에 신마문과 산하의 다섯 개 문파가 방어선을 친 것은 벌써 열흘도 넘은 일이었다.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
남악을 관통당하는 순간 성도인 장사(長沙)를 뺏기는 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남부 무림맹에서는 남악 방어선을 지키는 신마문의 후미에 은하문을 배치해서 교대로 천왕성의 돌파를 막고 있었다.
신마문의 풍호당주 나극수는 방어진지를 둘러본 후 천천히 전막으로 돌아갔다.
이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왼쪽 팔과 옆구리에 상처를 입었고 허벅지 쪽에도 피가 흘러나와 그의 모습은 혈인(血人)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전막으로 들어온 나극수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고 열린 틈으로 보이는 벌판을 노려봤다.
검에 의해 왼쪽 눈이 스치면서 시력이 반으로 줄었으나 벌판은 스산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이제 앞으로 이틀만 버티면 은하문과 교대가 되면서 후방으로 물러날 수 있다.
하지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천이백에 달하던 병력은 다섯 차례의 교전 끝에 육백으로 줄었는데, 그중 백오십이 신마문 병력이니 대부분 죽어간 자들은 산하 문파의 무인들이다.
전쟁에서, 특히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지닌 무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죽어간 자들의 눈이 아직도 선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팔다리가 잘리는 고통 속에서 죽어간 그들의 영혼은 온전하게 하늘로 올라가기 어려웠을 테니 참으로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
천왕성의 야욕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지에 대한 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 역시 고사리 손으로 검을 잡은 이후 지금까지 항상 영웅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무인의 의지를 키워왔다.
그 의지의 끝.
패주가 되어 지역을 호령하며 세력을 키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던 것은 어쩌면 천하통일의 야망을 신마문도 꿈꿔왔기 때문일 것이다.
천왕성은 마두가 아니었고 마귀도 아니었다.
오직 저들의 바람은 무인으로 태어나 강력한 힘으로 천하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자신은 그들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을 막을 뿐이니 대의를 쫓는 허수아비나 다를 바가 없다.
평생의 경쟁 상대이자 숙적인 제천문이 철혈문에 가담함으로 인해 신마문 역시 혈검쟁투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제천문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피의 동맹을 맺은 문파들과 연합하여 신마문을 압박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이유가 그것 하나뿐이겠는가.
판이 벌어지면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무인의 욕망.
그렇다. 바로 평생을 익혀온 칼을 꺼내어 피를 보고 싶어 하는 잔인한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인간사가 얼마나 우습단 말인가.
피의 동맹을 맺었던 천검회와 수라맹은 이제 적이 되어 이리의 이빨을 드러낸 채 목을 죄어왔고 그토록 미워했던 제천문은 아군이 되어 그들에 맞서 격렬하게 싸우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풍호당의 방어선은 남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산이었다.
성산은 남악의 중앙에 위치한 해발 칠십 장의 중산으로, 만약 이곳이 점령당한다면 뒤쪽의 오솔계를 넘어 남악이 관통당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들 뒤에는 신마문주 전륜왕이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오솔계를 막고 있었다.
성산을 막았던 병력은 이백에 불과했으나 모두 신마문의 정예로서 다섯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한 번도 정상을 뺏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섯 차례의 전투에서 팔십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병력은 단 백이십 명뿐이었다.
처참한 몰골.
그들의 몸은 온통 붕대투성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겪으면서 나극수 못지않게 많은 부상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전막 밖을 바라보는 나극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곧 천왕성의 공격이 재개될 것이며 이번 공격을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예감을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혈검쟁투를 거치면서 전력은 거의 반 이상이 손상되었고 주력 무인들도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상처를 치료조차 하지 못한 채 투입된 전선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천왕성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서 뛰어난 지리적 유리함을 안고 싸웠는 데도 겨우겨우 버텨낼 뿐이었다.
그들과 교대하면서 빠져나가는 은하문 무인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면서 힘들 거란 예상을 했지만 상황은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판을 가득 메운 채 다가서는 적의 병력이 마치 개미 떼처럼 보였다.
성산벌의 규모는 삼만 평이 넘는데 이곳을 통과해야 신마문이 지키는 남악을 전권에 놓을 수 있었다.
나극수는 칼을 들고 천천히 전막을 빠져나와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천왕성의 병력을 확인했다.
오로진격(五路進擊).
천왕성의 공격은 신마문이 펼쳐 놓은 방어선을 따라 다섯 군데로 분산되었는데, 이곳을 공격하는 건 바로 혈검쟁투 때 동맹으로 싸웠던 천문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신마문이 고전하는 것은 천문을 돕고 있는 천왕성의 주력 병력 때문이었다.
천문 역시 혈검쟁투를 치르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주력 무인들도 많이 잃은 상태였으나 천왕성의 주력 병력이 합류하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성산으로 다가오는 병력은 대충 봐도 삼백이 넘었다.
하지만 나극수가 신음을 흘린 건 그들 전면에 등장한 백에 달하는 붉은 전포 무인들로 인해서였다.
천왕성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일운강의 전대 중 하나가 천문을 지원하기 위해 나선 것이 분명했다.
이곳까지의 거리는 이제 백 장.
신법을 펼쳐 날아온다면 불과 일각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고개를 돌려 전륜왕이 지키는 오솔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생을 모셔왔던 전륜왕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수하들은 다가오는 자들을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비슷한 병력과 부딪치며 싸웠는데 이번은 거의 세 배가 많았고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불리하다고 도망을 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인으로 살아온 삶.
비굴한 연명을 택하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