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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4화

4화. 냉장고

 

 

"끙. 이 짓도 오랜만에 하려니 더럽게 힘든데?"

칠흑 같은 어둠 속.

조그마한 굴을 한 소년이 벌레마냥 기어간다.

굴은 머리를 똑바로 세우면 천정이 닿을 만큼 매우 좁다란 곳이었다. 그 안을 천강은 온 몸을 사용해 끙끙 대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뻗어버린 소년. 천강의 입에서 욕설이 한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진짜 좆같네. 이런 저질 체력이라니."

자괴감이 든다. 이 좁은 굴에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그냥 평범하게 밖에서 수련해도 다른 애들보다 훨씬 앞서갈 수 있는데.

'아냐. 스승이 그랬잖아. 뭐든 남들보다 앞설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그게 하나둘 모여 내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강호와 마교에서 내 목숨을 지켜줄 것이라고.

천강은 휴식을 취해 체력을 보강한 뒤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총 13번의 휴식을 취한 뒤에야 좀 커다래진 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일단 첫 고비는 넘겼군."

몸을 일으켜 벽을 짚으며 찬찬히 나아간다.

빛 한 점 없어 눈을 뜨고 있긴 한지, 똑바로 나아가고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천강은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세 시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곧 천정이 다시 낮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몸을 차갑게 만드는 서늘한 기운도.

'다 왔군. 이제 앞으로 반 시진.'

다시 몸을 수그려 기기 시작한다. 숨이 차고 턱턱 막혀도 입 밖으로 욕설을 힘차게 내뱉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곤 너무 힘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을 때, 손끝으로 벽이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드디어……!'

그런 희열의 기쁨도 잠시, 천강은 마음을 탁 가라앉히고 가만히 바닥에 귀를 댔다.

아무런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소리도. 기척도.

천강은 과감히 벽 옆에 있는 장치를 눌러 작동시켰다. 그러자 막다른 벽이 옆으로 움직이며, 돌연 환한 빛이 천강의 눈을 때렸다.

그리고 서서히 적응해 맑아지는 시야.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살핀다. 아무도 없다. 대신 수많은 선반과 그 위로 각종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바로 먹을 것들이었다.

'이것들을 보니 고생한 보람이 생기는구만.'

천강이 암실로 일부러 들어온 이유. 그건 바로 이 음식들 때문이었다.

천산 마교에는 세 개의 커다란 냉장고가 있다. 산 동굴 안쪽 자리한 이 굴 또한 그 중 하나. 굴은 꽤 커, 쭉 돌아보는 데에만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왕이면 고기 종류가 좋겠지.'

인간이란 신기한 생물이다. 마치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금속처럼 몰아붙일수록 점점 더 강해진다. 끝을 모르고 성장한다. 특히 어릴 때는 더더욱.

다만 문제는 아무리 단련해도 잘 먹지 못하면 근손실이 일어난다는 것.

체력단련을 위해서는 우선 잘 먹는 게 중요하다. 천강은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생고기는 안 돼. 야채는 백날 먹어도 근육이 안 붙으니 의미 없고. 흠……. 생쌀은 좀 그런데……. 어디 괜찮은 거 없나?'

그때 천강의 눈에 띤 물건들.

한 쪽 선반이 가죽 주머니로 가득 진열되어 있다. 하나를 집어 열어보니, 그 안으로 육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네.'

이것들은 음식 조달이 힘든 지역으로 원정을 가는 마인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주머니 하나당 아껴 먹으면 한 달은 족히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천강은 주머니 두 개를 챙긴 뒤 이번엔 마실 것을 찾았다.

그러나…….

'물은…… 없네.'

오로지 술뿐이다.

별 수 없이 과즙이 많은 열매 위주로 챙기고. 천강은 나왔던 굴로 다시 들어섰다.

발끝으로 꾹 눌러 입구를 닫은 뒤, 다시 벌레마냥 바닥을 박박 긴다.

'후우. 오늘 체력 단련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봐도 되겠군.'

온몸에서 질러대는 비명에, 천강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을 묵묵히 기기 시작했다.

 

***

 

퍽. 퍽퍽퍽.

거대한 공동. 수많은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다.

그곳엔 5명의 소년이 한 아이를 둘러싼 채 흠씬 밟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을 그리 밟은 이후에야 그 아이에게 물었다.

"야, 98번."

"으응?"

"다시 한 번 물을게. 교관이 한 말이 사실이야?"

교관이 한 말이란, 99번이 66번을 죽기 직전까지 뚜드려 패는 바람에 암실에 갇혔다는 이야기다.

그 통보를 들은 무리는 크게 술렁였다. 66번이 누구던가? 체격만으로 치면 무리 중 제일 아니었던가? 그 압도적인 덩치에, 쥐 굴 아이들은 그저 제발 자신은 녀석의 장난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개처럼 쳐 맞아 입원중이란다. 쥐 굴 무리 중 최약체로 평가되던 99번에게.

"사실 덩치만 컸지 별거 아니었던 거 아냐?"

"그럴 지도 몰라."

"어쩌면 쟤들도……."

물론, 66번 일행들은 하나 같이 강하다. 체력단련 시간에 마지막까지 버티는 애들 중엔 66번 일행이 모두 포함될 정도로.

그들은 그것을 통해, 20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멋대로 횡포를 부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 하나로 그들은 그 장악력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98번을 이리 추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치사한 수를 쓴 건 아닌가 하여. 그걸 입 밖으로 꺼내게만 만들면 어느 정도 사태는 수습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목숨을 건 싸움에 치사한 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아직 이곳 마교에 온지 얼마 안 된 어린 아이들이라 생각하는 게 좀 어설픈 거였다.

'치사한 수를 쓰긴 했지.'

98번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이 66번에게 무자비하게 얻어터지는 동안 뒤에서 남자의 급소를 가격했던 99번의 모습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선전포고에 불과했고. 그 뒤로 99번은 신비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며 66번을 철저히 농락했다.

독수리와 같이 재빠르지만 품위가 있었다.

범과 같이 매서웠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싸움 내내 여유가 충만했다.

말 그대로 예술 그 자체.

마치 질리도록 싸움을 해 본 탓에, 상대가 어찌 나올지 두세 수를 앞서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99번이, 과연 그 치사한 수를 쓰지 않았다고 이기지 못했을까?

98번 소년은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얼얼하다. 너무 많이 맞았는지 몸이 무겁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놈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면, 방금처럼 계속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잘못하면 죽을지도.'

그러나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방금 전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정정당당한 승부였어. 66번은 99번을 단 한 번도 때리지 못했고, 계속 얻어맞다 결국엔 쓰러졌어.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소년의 대답에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인다. 주위 녀석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새끼가! 아직도 그런 감싸는 말을……! 야, 다시 밟아!"

주위 있던 이들이 발을 든다. 98번은 눈을 질끈 감고는 다가올 고통을 대비했다. 그러나 발길질은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적당히들 하지."

"하! 웬 년이…… 어? 1번?"

다섯 명의 소년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다.

현재 쥐 굴에는 암묵적인 강자가 일곱 존재했는데, 1번은 그 중 한명이었다.

"1번이 움직였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거지?"

지켜보던 아이들이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한다. 그걸 지켜 본 다섯 아이들은 1번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뿐만 아니라 타격이 너무 클 거라 판단한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제 3자는 빠지지. 그러다 다친다."

"풉. 가능은 하고? 한 번 해봐."

"하? 이게 미쳤나. 왜? 우리가 못할까봐?"

소년들이 험악한 얼굴을 하며 여아를 향해 다가간다. 여아 또한 자세를 잡는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그들 사이로 흘렀다. 싸움을 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구경꾼들도 앞으로 일어날 싸움을 말없이 집중했다. 그리고 한 남자아이가 팔을 휘두르며 싸움은 시작됐다.

그러나…….

후웅.

"흥. 겨우 그런 느려빠진 몸놀림으로 입을 털었다 이 말이지?"

엄청난 속도로 안쪽으로 파고드는 1번. 그녀는 남자 아이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한 뒤, 포위망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왔다.

"컥……."

녀석이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다른 네 아이가 주춤한다. 행동이 매우 재빨라 단번에 기세가 꺾인 것이다.

"어때? 더 할래?"

"제, 젠장."

"영 뭐하면 니들 대장이라도 데리고 오던가."

소년들이 한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가만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2번 어때? 너도 나랑 한판 할래?"

그러나 고개를 젓는다. 그 행동에 네 아이는 쓰러져 구역질 중인 아이를 이끌고 그에게로 돌아갔다.

"흥. 시시하긴."

손을 탁탁 털고는 98번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는 그녀. 98번은 그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사를 표했다.

"도, 도와줘서 고마워."

"너 도와준 거 아냐. 그냥 녀석들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선 거지. 예전부터 별로였는데 오늘은 진짜 심하네. 몸은 괜찮아?

"아, 응."

98번이 옷을 툭툭 털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1번이 물었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계속 그렇게 대답한 거야?"

"아…… 그거?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멍청한 거야, 아님 순진한 거야? 그리 말하면 맞을 거 몰라? 없는 말이라도 지어냈어야지."

1번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98번이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치만…… 걔는 나랑 형제인 걸. 분명 실력으로 이겼는데, 마치 더러운 수를 쓴 것 마냥 매도하는 걸 마냥 볼 순 없었어."

"뭐야. 둘이 혈육이었어?"

"아, 그건 아니……."

그러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그녀는 뭐 그럼 그럴 수 있지 라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는 그걸 정정해주려는 98번의 말을 자르고는 말했다.

"그래도 일단 살아야 형제 얼굴도 보고 할 거 아냐. 이 답답아."

"아, 응……."

"앞으로 쉬는 시간이면 내 옆으로 와. 네가 그토록 실력을 자신하는 99번이 나올 때까진 내가 보호해 줄 테니까."

그렇게 98번은 잠시나마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그로부터 5일 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 소년의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사십칠, 사십팔."

그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다. 근육이 혹사되면서 자연스레 나오는 떨림이었다.

"사십 구우……."

천강은 부들거리는 팔을 접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오십! 후우. 진짜 더럽게 힘드네."

그래도 확실히 잘 먹고 잘 쉬니 근육이 붙는 게 느껴졌다. 아마 이 속도라면 쥐 굴 졸업 전에는 제법 쓸 만한 몸뚱어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

바닥에 드러눕는다. 시원한 바닥에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이 잦아든다.

암실에 온지도 벌써 4일이 지났다. 이곳에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천강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신체는 바뀌어도 어릴 적부터 꾸준히 단련해오며 느낀 시간의 흐름들이 대략 오늘 중으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으리란 걸 암시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나.'

천강은 가만히 바닥을 굴러다니며 고민에 잠겼다.

'이제 5일. 아직 마공을 쓸 줄 아는 녀석을 상대하기엔 근육이 덜 붙었단 말이지.'

그리 한참을 굴러다니길 잠시, 천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정한 것이다. 어찌할지를.

"좋아. 한 놈 더 가자!"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암실의 문이 열렸다. 동굴 밖으로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어이. 건방진 꼬맹이, 살아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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