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3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31화
31화. 사신
늦은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암운곡의 벽면에 은은한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위로는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밑바닥에서는 시원한 물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마치 자장가와 같은 포근함이 맴도는 그 때, 야음 속으로 찬찬히 움직이는 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암운곡 불침번들이었다.
"하아……. 5년차인 내가 암운곡 불침번을 서는 날이 다시 올 줄이야. 후배들은 좋겠어? 응? 내가 1년차 때는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인데 말이야."
"하하핫.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선배님."
"죄송합니다."
2년차, 3년차 후배는 선배의 눈치를 보며 아부를 떨었다.
자고로 법보단 주먹이 가깝다 하지 않은가? 일단은 당장 살기 위해서라도 그 비위를 맞춰주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선배님은 1년 안에 졸업하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전…… 그런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하긴……. 너 몇 년 남았지?"
"전 2년 남았습니다."
"저는 3년이요……."
"쯧쯧. 개 불쌍하네. 이번에 3년차면 내년부터는 완전 꺾여서 일 하나도 안하는 거였는데 말이야. 어떡하냐?"
"뭐…… 그냥 운이 없었다 생각해야죠 뭐."
그래도 대답과는 다르게 크게 불만은 없는 3년차였다. 일을 안 하던 4, 5년차가 합세하자 자연스레 일을 하는 주기가 확 줄어든 탓이었다.
오히려 가끔 기분 전환 삼아 하는 정도?
심지어 그 조차도 신입시절 고생해 숙련도를 잔뜩 쌓은 선배들이 있던 탓인지, 금세 끝나버려 사실 힘든 게 전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한 거 끝까지 죽는 소리 하며 아부를 떠는 후배들이었다.
"뭐 그냥 하다 보면 어느새 졸업하지 않겠습니까?"
"불쌍한 놈들. 내가 진짜 확! 그 천강인지 뭐시긴지 하는 녀석 손을 봐줘버려? 엉?"
"하핫. 말만으로도 위로가 됩니다, 선배님."
"그러니까요. 그래도 나이가 더 많은 선배님이 참으세요."
그러나 띄워주니 더욱 기가 살아난 5년차는 후배들을 이끌고 성큼성큼 천강이 있는 숙소로 향했다.
"좋아. 결정했어! 내가 말이야. 선배로서 너희들을 위해 한 번 움직여주지!"
그렇게 천강의 숙소에 도착한 그때였다.
"어? 넌 뭐냐?"
어둠 속으로 한 인영이 보인다. 천강이 묵고 있는 숙소 앞에서 누군가 가만히 서서 굴 안을 바라보고 있다.
그를 보는 순간, 세 사람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망자라도 되듯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5년차의 질문에 찬찬히 고개를 돌리는 녀석.
"……여라."
"뭐?"
"……을 죽여라."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그때 한 차례 바람이 위에서 불어닥쳤다.
사아아-
세찬 바람에 세 사람이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는 하던 추궁을 마저 하려는 그 순간,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어?"
"무, 뭐지?"
"선배님. 바, 방금 저기에 사람이 서 있지 않았습니까?"
그 존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재빨리 상하좌우 주변을 살피는 이들.
"찾았어?"
"아뇨. 없습니다."
"분명 복식은 암운곡이 아니었습니다만……."
"허어……. 이게 대체……."
고개를 들어 암운곡의 벽면을 바라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은하고도 아련한 달빛이 너울너울 비치고 있다.
"우리가 헛것이라도…… 봤단 건가?"
***
요즘 이상하다.
수시로 싸한 기분이 들고, 잠깐 긴장을 늦춘다 싶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천강은 고개를 돌려 지하수로 한 쪽을 가만 바라봤다. 어둠 속으로 잔잔한 물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 외에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천강? 왜 그래?"
"아뇨. 그냥 누군가 지켜보고 있단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
천강이 바라보는 곳을 똑같이 살펴보는 초아. 이내 고개를 갸웃.
"뭐 없는데? 좀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런가 봐요."
"그건 그렇고, 이젠 잘하네. 물 위에 낙엽 놓고 떠있을 줄도 알고 말이야."
발밑을 내려다본다.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로 몸이 둥둥 떠 있다.
"아직 멀었죠."
"겸손하긴. 지금 네 나이에 그 정도면 진짜 말이 안 되는 거야. 보통은 약관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데 누님은 잘만 쓰시잖아요?"
"나야……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 그런 거지. 하늘이 내린 신동, 초아!"
그러면서 말한다.
"어느 날 하늘이 열리고 그 가운데로 보자기에 둘린 채 한 아기가 내려왔는데, 그게 바로 나였데."
"누가 그래요?"
"우리 엄마가. 그래서 내 별호는 천출신동으로 하려고. 하늘에서 난 특출난 아이! 어때?"
정말 못 말려. 천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근데 너 한 삼일 쉬기로 했다며?"
"아아……. 예. 잠깐 깨달음을 위한 수련이라고 할까요? 암운곡 수로를 돌아다니며 생각을 좀 정리하려고요."
"아하? 하긴. 그게 필요한 시기긴 하지. 나도 그 깨달음이 와야 초절정에 도달할 텐데 말이야."
초아의 경지는 현재 절정이다. 그녀 소매의 문양이 그 증거였다. 마교에서는 그 등급에 맞게 소매에 수를 놓아준다.
다만 천강의 옷에는 아직 그 어떤 수도 놓아져 있지 않았는데, 암운곡을 졸업할 때까지는 사람 취급을 안 해주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라고?"
"네."
"그럼 너 없는 동안 나도 가만 앉아 사색이나 해야겠다. 으차차……! 그럼 다시 시작할까?"
초아가 전방으로 낙엽을 던지며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낙엽 한 번 밟고, 물 수면 세 번 밟고.
다시 낙엽 한 번 밟고, 물 수면 세 번 밟고.
천강도 조용히 낙엽을 날리며 그 뒤를 뒤따른다. 아마 이 정도 수준이라면, 혹여나 급박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흑사로부터 도망치는 데에는 큰 문제없으리라.
'어떤 놈인지 일단 얼굴만이라도 함 보자구나.'
***
"그럼 나 갔다 올게. 잘들 훈련 받고 있어."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응, 안 돼."
따라오겠다는 연화에게 딱밤 한 대 먹이며 거절한다. 천강은 무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넌 나 돌아오기 전까지 뭘 배울지 정해놓고."
"예, 형님."
쥐 굴 졸업관문 1-50위 보상. 그것은 암운곡에서 교관 한 명을 선택해 배울 수 있는 권리다.
생각할 시간은 2주가 주어지고. 아이들은 선배들이 받는 수업을 지켜보며, 그리고 여러 무기를 잡아보며 어느 게 자신과 잘 맞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 번 선택하면 절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신중 또 신중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전생에는 50위에 못 들어서 남들 하는 거 보고 따라했었지.'
초아로부터 받은 식량과 목검 단도를 확인한 천강이 수로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고는 단도를 물에 띄우고는 그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갔다 온다. 3일 후에 보자."
"예, 형님. 다녀오십시오."
"응. 잘 갔다 와!"
***
동동 물에 떠 떠내려가는 목검 단도 위에서 가만히 서서 사주를 경계한다. 물의 흐름이 느려서인지는 몰라도, 지하수로와 그 어둠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생각보다 넓네.'
암운곡 시절 훈련 받는다고 고생한 탓에, 졸업 이후로는 지하수로를 아예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교에 오랜 기간 몸 담고 있었던 천강에게도 지금 이곳은 처음이었다.
갈수록 넓어지는 지하수로의 모습에 천강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너무 넓은데……. 놈을 찾을 수 있으려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간간히 바깥으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점 정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불편하다. 위기 상황엔 더욱 더.
물론 기를 펼쳐서 파악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화경이 아닌 이상에야 함부로 기를 낭비할 순 없었다.
그때였다.
찰팍.
'음?'
고개를 뒤로 돌린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분…… 탓인가?'
물소리를 잘못 들었던 모양. 하지만 혹시나 흑사 일수도 있기에, 천강은 기를 펼쳐 주변을 한 번 싹 훑어보았다.
그러나 주변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없었다. 천강은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어둠 속으로 몸을 슥 들이밀었다.
그렇게 두 시진 즈음 흘렀을까.
갑자기 지하수로의 폭이 확 넓어지더니, 거대한 공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미약하게나마 흐르는 걸로 보면, 단순히 고여 있는 물은 아닌데.'
그러나 수로 폭이 암운곡에 족히 열두 곱절을 넘어서는 걸로 볼 때, 천산의 지하수가 다 모이는 곳이지 않을까 추측되었다.
목검 단도가 기둥과 기둥 사이로 찬찬히 이동하며 천강을 인도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출렁.
갑자기 전방에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미약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응? 물의 흐름과 반대로 이는 파도라니?'
설마…….
바로 체온을 차갑게 갈무리하고 가만 지켜본다. 파도가 한 차례 천강과 목검단도를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려앉힌다.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지는 광대한 기운.
고개를 내린다. 때마침 한쪽 벽면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와, 지하수로의 깊은 바닥이 내비친다.
'하, 하하핫.'
물속을 고요히 유영하는 거대한 몸뚱어리. 천강은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대체 이런 놈을 어찌 잡으라고 알려주신 거야?'
길이가 족히 200척은 더 돼 보이고, 몸통 두께도 9척은 되어 보인다. 심지어 체급뿐만 아니라 기운도 범상치 않았다.
'이건 뱀이라기 보단 용인데……?'
그 와중에 제일 신경 쓰이는 건, 녀석이 독을 사용하는 종류라는 것.
온 몸을 흑요석 같이 치장한 녀석이 스르륵 움직여 한곳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놈의 은신처가 저쪽에 있는 모양이다.
천강은 놈의 은신처 방향을 확인하고는 몸을 풀었다. 암운곡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화경 달고 다시 오자.'
지금 싸워봤자 녀석의 간식거리 밖에 안 된다. 일단 어디 사는지는 알았으니, 조금 더 성장해 다시 오도록 하자.
그에 천강은 주머니에서 낙엽들을 꺼내, 전방으로 날리며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갈 때였다.
섬뜩.
갑자기 밑에서부터 강하게 쏘아져 올라오는 살기.
천강은 재빨리 몸을 날려 벽에 착 달라붙었다.
촤아악.
물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온다. 그는 곧바로 천강이 붙어 있는 벽 반대편에 붙어 서서,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핏발이 선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매섭게 빛을 발한다.
"너냐? 사랑에 빠진 계집 마냥, 날 쭉 따라다닌 게?"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있나. 아주 낮밤으로 쫓아다녀서 언제쯤 모습을 드러내나 궁금했다고?"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은 적을 살피는데 정신이 없었다.
'뭐지, 이 녀석? 인간이 맞나?'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명에는 기가 존재한다. 풀에도 그리고 동물에도.
심지어 죽어 움직이는 것들도 사기라는 게 존재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놈에게서는 그 어떤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짙은 살기만이 생성되어 나직이 전해져올 뿐.
"너…… 정체가 뭐냐?"
"난 괴물. 사신. 어둠을 삼키는 더 큰 어둠. 무림인들을 이 세상에서 없앨 유일한 존재……."
"너 낮술 먹었냐?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리고 오늘…… 네놈의 목을 가져갈 자다."
놈이 몸을 움츠린다. 천강 또한 자세를 잡는다.
"하! 당나귀가 당근 갖다 버리는 소리하고 있네. 가능은 하고?"
천강과 녀석이 동시에 튀어 올랐다.
"마교의 소교주 천강, 죽어라……!"
그리고는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도로 다시 떨어졌다.
파앙.
벽에 매달린 두 사람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간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교차한다.
'이 자식……. 북명신공이 안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