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2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22화
22화. 보상
"어서 오시게, 흑철마괴. 정말 간만이로군."
"오랜만입니다, 흑학대신."
"그래. 무탈하신가?"
"예. 저야 늘 그렇지요."
암운곡. 총책임자의 집무실.
온몸에 흉터가 그득한 남자가 짧게 목례를 한다. 노인은 그런 남자에게 찻잔을 한 차례 들어보였다.
"어떻게 한 잔 하시겠는가?"
"괜찮습니다."
"여전히 차를 즐기지 않으신가 보군. 습관을 들이면 좋은 것을. 끌끌."
"차하곤 영 성미가 안 맞아서 말입니다."
노인이 껄껄 웃는다.
"하긴. 자네의 명성과 모습을 떠올리면 차보단 술이 어울리긴 하지."
노인의 손에 기가 응집됐다. 손에 들린 찻잔은 이내 뿌연 수증기를 내뿜기 시작. 노인은 차를 한입 음미하고는 고개를 두어 차례 끄덕였다.
"이번 기수엔 정말 뛰어난 아이들이 많더군."
"아무래도 중원이 살만 해졌나 봅니다. 전체적으로 체격이 건장해졌더군요."
"내 눈에도 그리 보이더군. 쥐 장수들이 고생 좀 하겠어."
세상이 살만하면 사람 데려오는데 힘이 든다.
전에는 굶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면 따라왔겠으나, 지금은 다른 방식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는 길에 두 마두 분을 만났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자녀들을 잘 좀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야지. 우리 마교를 짊어질 미래들 아니신가? 끌끌끌. 그런데 내 자네에게 긴히 물어볼 게 있네."
"말씀하시지요."
"이번 기수 99번 말이네만……."
흑철마괴는 잠시 멈칫했다. 노인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 아이의 정체가 뭔가?"
"……그냥 평범한 아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나에게만 이야기해 보시게."
"무엇을 말입니까?"
"허허. 뭐 자네 입장에서 선뜻 말 못하는 건 이해하네. 다만 내 이번에 그 아이가 흡공을 쓰는 걸 봐버리는 바람에 말이네."
흡공……?
흑철마괴는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조교 초아와 99번이 암실에서 은밀히 만남을 가지는 걸.
뭐하나 싶어 조용히 그 둘을 관찰한 흑철마괴는 볼 수 있었다. 99번이 그녀의 기운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던 것을.
"후우. 이거 어쩔 수 없군요. 예,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허허. 그랬군. 그랬구먼……!"
마공 중 상대의 기를 강탈하는 대표 무공으로는 천마신공과 흡성대법이 있었다. 흑학대신은 아무래도 99번을 천마의 아들이라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흑철마괴는 그걸 부정하지 않고 도리어 한 술 더 떠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쪼록 그분의 아이도 신경 써주십시오."
"걱정 말게. 내 꼭 그리하겠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흑철마괴가 밖으로 나가고, 조금 있으니 들어오는 비격창마.
"흑철마괴가 왔다갔네."
"예. 방금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물어보니 뭐라고 합니까?"
차를 한입 머금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인 왈.
"아니라는군. 그분의 아들이 아니라하네."
"그렇……군요."
"그러니 자네는 그 일을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본인이 맡은 바에 충실하시게. 내 자네의 과거를 모르는 건 아니나, 어련히 때가 되면 나타나지 않으시겠는가?"
과거. 과거라…….
아직 대기근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못한 시기.
어딜 가도 도적떼가 기승을 부리는 그러한 곳에서 힘이 없는 이들은 늘 첫 번째로 수탈의 대상이 됐다.
비격창마의 가족 또한 그러했다.
'제, 제발 그것만은……!'
'저희들에겐 아이가 다섯이 있습니다. 그걸 다 가져가시면 저흰 죽습니다요……!'
힘이 없는 이들은 소리쳐 울부짖어도 구원받지 못하는 세상.
어느 날 들이닥친 도적떼에 비격창마를 제외한 그의 모든 가족은 몰살당했고, 그 또한 그 칼 앞에 숨을 거뒀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들을 모조리 도륙내고 아직 어린 비격창마를 살려주었으니, 그가 바로 천마신교의 하늘 천마였다.
'괜찮느냐? 갈 데가 없다면 날 따라와도 좋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도적떼들은 정파 놈들이었다.
고기를 먹고 싶으나 돈이 없자, 복면을 쓰고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고 다닌 것이었다.
"어디 마교에 자네 같은 사연이 한 둘인가? 때가 되면 나타나실 터이니 너무 애타게 기다리진 마시게나. 그때 가서 충심을 보여도 늦지 않으니……."
당시 그런 식으로 마교에 들어온 이가 많았다. 이들 모두 천마에게 충성심이 높았고, 그 덕택에 배신자가 들끓는 이 상황에서도 아직까지 마교는 놈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흑학대신의 말이 맞다. 그분의 자녀가 아니라면 굳이 신경 쓸 이유는 없을 터.'
흡공이 조금 눈에 밟히지만 비격창마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끌끌. 잘 생각했네. 그건 그렇고, 어떤가? 차 한 잔 안하겠는가? 이번에 새로 들여왔는데……."
"감사히 받겠습니다."
차를 음미하는 비격창마의 눈이 살며시 감긴다.
30년 전의 과거가 스치듯 눈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그분의 자녀가 나타난다면, 내 목숨을 다해 충을 바칠 것이다. 간악한 정파 무리에게 이 마교가 무너지게 두지 않을 것이다.'
***
'운이 좋았군.'
흑학대신이 흡공을 인지하고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다면, 그걸 본 다른 이들 또한 동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은밀히 퍼져 나가겠지. 배신자들과 간자들의 귀에까지 말이야.
"흑철마괴님! 이쪽이에요, 이쪽!"
조교 초아가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든다. 얼굴에 흉터가 자욱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찬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꽤 오래 걸리셨네요? 무슨 이야기라도 나누신 거예요?"
"아니다. 그저 차 한 잔 하고 왔다."
"에에? 차 안 드시잖아요?"
"그렇게 됐다."
흑철마괴가 걸음을 옮긴다. 초아가 그 옆에서 살살 눈치를 보며 따라붙는다. 대강 왜 그러는지 직감한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개인 시간을 갖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다. 내일까지는 딱히 일정이 없으니."
"꺅! 감사합니다!"
대답을 주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소녀.
흑철마괴는 그녀가 향했을 인물을 가만히 떠올리며 작게 읊조렸다.
"너구리같은 늙은이. 이번에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어느 쪽 편인지를 말이야."
***
"99번! 누나 왔다!"
"아……."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 조교 초아의 등장에 세 사람의 얼굴이 각양각색으로 변모했다.
천강의 경우엔 귀찮음이 역력하고, 무진은 그저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연화는…….
"들어오지 마! 내 방에 들어오기만 해!"
그러거나 말거나 안으로 쏙 들어오는 그녀.
연화가 주먹을 휘두른다. 초아는 그걸 가볍게 회피하고는, 그대로 천강 뒤로가 그를 껴안았다.
"99번! 누나 안 보고 싶었니?"
"아아……. 예, 보고 싶었어요."
"후훗. 귀여워."
초아가 천강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천강은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했다. 그런 그의 눈엔 살짝 흥미가 돌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전 보다 기가 늘면서 자연스레 깨달은 사실인데, 천강의 예상보다 초아는 훨씬 더 강했다. 깨달음만 얻는다면 능히 일류를 졸업하고 절정에 도달할 만큼.
그것이 신기한 그는 자신의 등에 몸을 비벼대는 초아의 진기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제 고작 16살인데 이 정도라니……. 확실히 이전 세대에 비해 수준이 전체적으로 올라간 모양이야.'
50년간 내가 모르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건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녀의 내기는 이미 절정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 아줌마가!"
연화가 초아에게 다시금 달려든다.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걸 본 그녀는 이번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단번에 접근해 주먹을 내지르는 연화. 그러나 이번에도 초아는 가볍게 회피했다. 그로 인해 그 주먹은 고스란히 천강의 등짝을 가격했다.
퍽.
"켁?!"
"꺄악! 어, 어떻게? 괜찮아, 천강!"
"어이. 너 말이야……."
"미, 미안. 후엥. 미안행……."
어휴. 진짜……. 요 꼬맹이는 도저히 조심성이 없다. 손도 굉장히 매운 게, 가까운 시일 내에 방 크기가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훈련한답시고 벽을 깨부수고 다닐 거 아냐?
'그래도 뭐……. 덕분에 하나 깨달았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연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
금방 전 천강은 내기를 전혀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연화에게 기가 실린 주먹을 맞는 순간, 그녀의 진기가 체내에 흘러들어오더니 천강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임맥에 있는 기의 바다로 모여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잠을 자거나 넋을 놓고 있는 상태에서도 적의 기가 침투를 하면, 몸이 자동적으로 북명신공을 운용해 신체를 보호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문제는 충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해 근육에 부담이 꽤 쌓여버린다는 것인데…….'
뭐…… 슬슬 다른 곳에도 기의 통로를 만들어두긴 해야겠지.
북명신공은 단순히 엄지손가락으로만 상대의 기를 흡수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부위로 흡수 가능하다.
그러나 비급서의 글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흡수해야하는지를 몰라 그냥 지식으로만 놓아두던 차였는데, 연화의 조심성 없는 행동이 천강에게 활로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고맙다, 연화야."
"응.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에?"
갑자기 진심을 담아 고마워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이. 천강은 벙쪄 있는 그녀의 이마에 딱밤 한 대를 먹여주었다.
"아악! 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맙다면서 왜 때려!"
"너 임마. 방금 그 주먹 나였으니까 망정이지, 다른 애들이면 벌써 입으로 피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알아?"
"치이……."
"그리고 누님. 아니, 그걸 피하시면 어떡합니까? 동생 죽일 일 있나."
"에이. 그 정도론 안 죽어. 내가 널 모르니?"
그래도 미안하긴 한지, 머리 한쪽을 작게 긁적인다.
그때 방 밖에서 다량의 기척이 들려왔다.
"어? 초아? 네가 여기 무슨 일이야?"
"소용? 오랜만! 나 여기 99번하고 꽤 친하거든."
"……정말로?"
천강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는 소용. 초아가 천강을 뒤에서 꼬옥 껴안으며 묻는다.
"근데 넌 어디 가는 길이야? 다른 조교들까지 다 데리고?"
소용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초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교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존재하는 듯한데, 분위기로 보아하니 천강을 베개마냥 끌어안고 있는 요 여인은 그중 최고 고참인 듯했다.
"1위부터 10위까지 이들에게 보상 주러 가는 길이야."
소용이 주머니를 들어 보인다. 초아가 천강의 등에 매달린 채 양손을 펼친다.
"잘됐네! 그럼 99번 건 내가 할 테니까 나 던져줘."
"무슨 소리야? 걔 10등 안에 못 들었어."
"야, 농담 말고 어서 줘."
"농담 아니거든?"
"……정말로? 야, 99번. 저 말 사실이야?"
초아가 천강의 볼을 꾸욱꾸욱 잡아당긴다.
그걸 옆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던 연화가 짧게 주먹을 내지른다. 그러나 가볍게 피해 천강의 오른편으로 이동하는 그녀.
초아가 천강의 팔짱을 슥 낀다. 그에 질 새라 연화 또한 왼편에 앉아 똑같이 한다.
그 가운데서 천강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왜? 네 실력이면 1등은 충분할 텐데?"
그러자 소용이 코웃음을 쳤다.
"실력이 충분하기는……. 시험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인 거지."
"야, 네가 얘에 대해 뭘 알아? 얘가 1등을 못한 건 볼 것도 없이 사연이 있을 거라고."
"맞아요. 이번 기수 중 최강자는 천강이라고요!"
티격태격 싸울 땐 언제고 갑자기 한 목소리를 내는 두 소녀.
황당하단 표정이 소용의 얼굴에 올라왔다. 그녀는 방 밖으로 나가며 말을 이었다.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10위 안에 못 들었으니까 걔한테 줄 보상은 없어. 그 옆에 1번도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렇게 소용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른 조교들도 초아에게 짧게 목례를 하며 하나둘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