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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4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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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흑살마신 47화

47화. 그들이 말 못할 사정

 

 

"야, 공격공격!"

"밟아!"

천강에게 달려드는 129명의 적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아니 승리고 자시고, 애초에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승부를 가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저 아주 간단한…… 복수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암운곡 애새끼 3명을 어떻게 묵사발 낼까 그것만 생각할 뿐.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아, 씨. 이런 미꾸라지 같은 녀석!"

"야! 그쪽이야, 그쪽!"

이건 무슨 상황일까.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 소년을 잡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다. 초승달이라 유달리 어둠이 짙은 밤. 여울나무 숙소 근방에서는 한창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웃긴 건 한 명 빼고 전부 술래라는 것.

'어떻게 할까나.'

곳곳에서 날아드는 손길과 날붙이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천강이 고심에 빠진다.

'역시 과한 건 좋지 않겠지.'

솔직히 이 녀석들의 공격 따위 그냥 피할 필요도 없이 맞아주면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북명신공이 발동하면서 이곳에 있는 이들의 내력을 모조리 빼앗아 버릴 것이다. 이미 5명의 기운을 흡수한 상황에서 더 흡수하는 건 미련한 짓.

그에 도망치려고 슬슬 몸을 빼내도 끝까지 에워싼 채 보내주질 않는다.

'그렇다면……!'

암운행보로 적의 코앞까지 뛰어간다. 그런 뒤 내기 운용을 완전히 멈추고는, 달려가던 관성을 이용해 팔꿈치로 적의 중요부위를…….

퍽.

"켁?!"

퍽퍽퍽.

"억."

"끅."

"꾸에엑."

갑자기 천강에게 달려들던 소년들이 가랑이를 잡고 고꾸라진다.

순식간에 제압된 4명. 그에 의심을 하며 몸을 사릴 만하건만, 너도나도 약이 올라 흥분을 한 탓일까?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의 눈이 도리어 번쩍 빛을 발했다.

"드디어 싸울 생각이 든 모양이구나!"

"덤벼라! 우리와 싸우기 전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매를 버는군.

적당히 몇 놈 손봐주면 물러날 거라 생각한 천강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서 있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든다. 대신 바닥에 꿈틀거리는 이들은 늘어난다.

"이쪽이야, 이쪽!"

"이쪽으로 몰아!"

"다들 모여!"

퍽. 퍽. 퍼억.

"끄오옷."

"커헉."

"끄으으……."

천강의 신형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무리를 완전히 뒤흔든다.

비전투인원이 빠르게 늘어난다. 그러다 남은 이들의 수가 약 50명 정도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곳곳에서 가랑이를 붙잡고는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끅. 끄윽……."

"젠장. 치, 치사하게."

"여어. 싸움에 치사한 게 어딨어? 내가 인질을 붙잡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이기기만 하면 되지. 그리고 급소 공격은 치사한 게 아니라 권장해야 할 사항이라고?"

"야, 이쪽이다. 잡아!"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몰려드는 아이들. 천강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암운행보.

"어, 어디 갔어, 이놈?!"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공이?"

"혹시 고수 아냐?"

"야. 고수였으면 기술 한 방으로 우릴 다 날려 보냈지, 거길 때리겠냐?"

"여기다! 이쪽이야!"

아이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간다. 그런데 뛰는 행태가 하나 같이 이상했다. 아이들 모두 한 손으로 중요부위를 가린 채 쫓아가고 있었던 것.

그 사이 또 한 명의 고간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어준 천강은 고민에 잠겼다. 이제 남은 이들이라곤 모두 여자애들이었기 때문이다.

'흠. 어떻게 하지?'

여자들 거기를 때릴 수도 없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굳이 더 제압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냥 연화랑 합류해 숙소로 돌아가자.'

빠르게 몸을 놀린다. 연화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그대로 내달린다.

천강이 질주하자, 그 방향에 있던 아이들은 자신의 가랑이를 가리며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천강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도주할 수 있었다.

"야, 쫓아! 잡아!"

"거기서어어어!"

 

***

 

"고, 고마워. 바래다줘서."

청청이 고개를 숙이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그녀의 손에는 탕후루가 들려 있었다.

"안에까지 데려다 줄까?"

"아, 아냐. 괜찮아."

"그래."

그것을 끝으로 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진은 머리를 긁적이고 청청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다. 둘 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대로는 시간이 쭉 흘러 버릴 듯하여, 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괜찮으면 내일도 우리랑 같이 저녁 먹을래?"

"저, 정말? 그래도 돼? 혹시 내가 폐가 되는 건……."

"폐는 무슨. 형님에게도 허락 맡았으니까 내일 여기로 데리러 올게."

소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검지를 세워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부터 시합이라 분위기가 험악할지 몰라. 여기까지 오면 위험할 수도 있어. 내, 내가 저기서 기다릴게."

"그래. 그렇게 하자. 그리고 뭐 달리 할 말은 없고?"

청청이 고개를 젓는다. 이미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을 무진이 했기 때문이다.

"그럼 들어가."

"응."

다리를 절뚝이며 소녀가 숙소로 들어선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기분 좋은 표정이 올라왔다.

'행복해…….'

이게 얼마 만에 찾아온 기쁨인지.

이곳에 온 뒤로는 매일이 지옥 같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밥도 먹고 웃을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덤.

그런데 내일도 만날 수 있다니.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에 들어선 순간, 익숙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소녀의 몸이 그 의지를 벗어나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늦었구나.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

"투, 투파창귀님. 제 방엔 어인 일로……."

"아아. 그냥 네 생각이 나서 들렀다. 오늘 마을에서 네 문제로 시끌시끌 했잖느냐."

떨림을 주체하지 못한 소녀의 몸이 바닥에 무너진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물었다.

"호, 혹시 직접 손을 쓰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면 쓰나? 애들 싸움은 애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법이지."

"설마. 그 말씀은……."

투파창귀가 메고 있던 끈을 하나 풀었다. 소녀 앞으로 툭 무언가가 떨어진다. 그것은 피리였다.

"그놈의 팔 하나를 가지고 오너라."

"못해요!"

투파창귀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청청은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못해?"

"하, 할 수 없어요. 그런 잔인한 짓……."

"……쯧쯧. 그래 알겠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피리가 스르륵 날아가 투파창귀에 옷에 매달린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방밖으로 사라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녀는 애써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오른쪽 허벅지를 쉴 새 없이 매만졌다.

"진정해. 다 끝난 일이야. 오늘은 괜찮아……. 폭풍은 지나갔어."

 

***

 

'날씨가 좋군.'

하늘은 청명하고, 초목은 여름을 맞아 푸르고 우거진다. 천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초록빛 물줄기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유영한다.

하늘에서 숲의 전경을 내려다보던 천마가 스르륵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경기장에 모인 수많은 이들 앞에서 나직이 개회식을 선포했다.

"현 시간부로 기경만회(技競萬會)를 시작하노라."

와아아아-

수많은 사람들의 열광 속에 무대 위로 두 소년이 올라온다. 그들은 각각 여울나무 숲과 암운곡 출신 훈련생이었다.

관중석을 향해 한 번, 그리고 서로를 향해 한 번. 포권을 취하는 두 사람.

심판을 맡은 마인이 팔을 치켜든다. 그리고는 왈.

"시작!"

"이번에는 어디가 이길 것 같나?"

암운곡 관중석. 결투를 벌이고 있는 두 소년을 쳐다보며 묻는 질문에, 비격창마가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울나무 쪽이 우세하지 않겠습니까? 흑학대신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끌끌.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 뭐 별 수 없지 않은가? 이미 시작점이 다른 것을."

"아무래도 그렇지요."

암운곡은 중원에서 고아들을 데려와 충원한다. 그게 여의치 않을 시, 가난한 집에 돈을 주고 사오거나. 즉, 그 대부분이 무(武)와는 관련 없는 아이들이란 뜻이다.

그에 반해 여울나무 숲은 각 문파에서 데려온다. 정파 사파 가리지 않는다. 외문제자, 기명제자, 속가제자 등등. 열두 살 밑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일이 시원치 않았으나, 요 근래 마교의 힘이 강해지면서 덩달아 중원에서의 입지 또한 넓어졌고. 신선환이 파다하게 보급된 이후로는 무인들의 힘이 나날이 강성해져, 꿈과 욕심 많은 아이들을 유혹하는 일이 참으로 쉬워졌다.

정파나 사파에서 잡다한 심부름만 하고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인생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마교에서라도 내 원대한 뜻을 펼쳐보이리라!

뭐 이런 식. 그러한 까닭에 암운곡에 비해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차를 음미하던 흑학대신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한다.

"그래도 결과는 늘 끝까지 지켜봐야하지 않는가? 끌끌. 작년 암운사신의 여식처럼 말일세."

"뭐,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그리 말하는 두 사람 모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작년 초아의 경우엔 이미 1년차 때부터 그 가치를 보이곤 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가 1년만 늦게 들어왔어도 묵범귀영의 기록은 그녀 때 깨질 수 있었을 것이었다.

"너무 크게만 밀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번에도 성적이 부진하면 재정적으로 크게 힘들…… 음?"

갑자기 말을 하던 비격창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까부터 지켜보던 경기장 결과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흑학대신. 이거……."

"허헛.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전체적으로 회의적이던 암운곡 교관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 올라온다.

'암운곡이 이기고 있어……?'

분명 가볍게 이길 거라 생각했다. 최근 10년간 전체적인 성적이 늘 암운곡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니까.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경기 결과에, 적삼혈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 암운곡과 여울나무의 경기 상황 : 암운곡 14승, 여울나무 2승.

"지금 이게 어찌된 상황입니까! 우리가 지고 있다니?! 그것도 저리 큰 점수차로……!"

그러나 대답을 하는 이가 없다.

"뭐라 말들 해보십시오!"

총 책임자의 호통에 몸을 움찔 떠는 교관들.

그러나 그들 또한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 지금 출전하는 암운곡 수준들을 보면 절대 질 수준이 아니었기에. 그런데 대체 왜……?

사실 그 이유는 천강에게 있었다.

'젠장. 밑에만 안 다쳤어도……!'

전날 술래잡기를 하던 중, 천강이 여자애들을 빼놓고는 모조리 고간을 때려댄 통에…… 다음날 하나같이 모두 멍이 들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암운곡 출신 한 명에게, 그것도 1년차 꼬맹이에게 여울나무 5년차 전체가 탈탈 털렸다는 사실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아이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고, 교관들 입장에선 애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밖에 추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암운곡! 암운곡!"

"역시 암운곡이다!"

"예나 지금이나, 암운곡이 최고다……!"

경기장 내로 암운곡을 칭송하는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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