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4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45화
45화. 마교 서열 1위
달빛이 너울너울 비치는 널찍한 공간.
지면으로부터 2척 정도 솟아오른 무대가 자리하고, 그 주위를 관람석이 빙 둘러 쳐져 있다.
이곳은 매해 기경만회가 열리는 경기장으로, 약 50여 년간 수많은 예비마인들이 마교주민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뽐낸 장소다.
그런데 아직 개회식도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시끌시끌하다.
"지금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이 신성한 기간에 마을 내에서 싸움질이라니요. 그것도 아직 마인도 안 된 것들이! 먼저 싸움을 건 암운곡 것들은 응당 벌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어허. 마교 주민들 앞에서 다 허락받고 한 것 아니랍니까? 그리고 제대로 콕 집자면, 사실 문제가 된 것은 그 1년차 어린 아이를 괴롭힌 여울나무 것들 아닙니까?"
쾅.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그리고 말 잘했소. 이건 우리 여울나무 숲 내의 일이오. 암운곡이 낄 자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마교 주민들이 싸움에 동의하고 나설 정도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도를 넘은 게지요. 오히려 암운곡 그 아이들에게 상을 줘야 할 것입니다!"
양 진형으로 나뉘어 티격태격 싸우는 사람들.
같은 이야기가 계속 지겹도록 반복되고, 언성만 커지는 걸 보면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이 등장했다. 천마와 그의 수행원 천수마검이었다.
"교주님 오셨습니까."
"신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기경만회의 핵심이 될 대전 경기장을 천마가 슥 한 번 둘러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한다.
"잘들 준비했구려. 양측 모두 수고들 많았소."
"응당 해야 할 일이었사옵니다."
"그리 책임감을 갖고 말해주니 고맙군. 아, 맞다. 내가 이리로 오면서 들은 것이네만……."
무슨 말이 나올까 하여 무리가 일제히 천마를 쳐다본다. 천마는 턱수염을 가볍게 쓸며 이야기했다.
"주민들이 암운곡을 참으로 좋아하더군. 여울나무 쪽은 실력도 좋지만 명성도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소."
"교주님. 그건 다 사정이……."
"대외적으로야 악명이 쌓일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신도들 앞에서는 명예를 쌓아야하지 않겠소이까? 내 말이 틀리었소?"
덤덤한 시선이 여울나무 숲 관계자들을 싹 훑는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교주님. 그래도 마을 내에서 싸움을 하는 건 옳지 않다 생각합니다. 주민들의 안전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까?"
"적삼혈마. 그대의 말에 동의하네. 뭐…… 1년차와 5년차가 힘자랑을 해봤자 얼마나 화려할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하하핫. 암운곡 관계자들이 교주의 말에 긍정을 표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식사들 맛있게 하시오. 아. 그리고 적삼혈마는 명월객점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게. 그곳 국수가 얼큰한 게, 술이랑 함께하면 참으로 맛있다네."
"……감사합니다."
밖으로 나오자 천수마검이 후련하단 얼굴로 천마의 뒤를 따라붙는다.
"간만에 시원하군요. 여울나무가 찍 소리도 못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그랬다. 이 얼마 만에 맛보는 통쾌한 맛인지.
"이 기세로 저들을 끝까지 몰아낼 수 있다면 제일 좋으련만."
"그렇게 될 겁니다. 그동안 흑살마신의 존재 하나 때문에 몸을 사리던 놈들입니다. 그런 그가 복귀했으니……. 아마 지금쯤 어찌할 바를 몰라,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긴장 늦추지 말게. 궁지에 몰린 쥐는 물기 마련이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닐세."
그런데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 앞으로 좋지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복도 저편에서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중년 남자가 찬찬히 다가온다. 특이하게도 그는 온몸에 주렁주렁 악기를 달고 있었다.
"신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간만이군, 투파창귀. 분명 폐관수련을 한다고 들었네만."
"마치고 나왔습니다. 제가 없으니 죽겠다고 적삼혈마가 어찌나 보채는지. 쯧쯧."
투파창귀가 턱짓을 한다. 천수마검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물러난다. 제 아무리 마교서열 13위인 천수마검이라도 교주를 제외한 마교 서열 1위에게는 덤빌 깜냥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찬찬히 어두운 복도를 거닐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투파창귀였다.
"적삼혈마에게 들었습니다. 여울나무의 재정과 인원감축을 지시하셨다고요."
"그러네. 올해 기준 3할 감축이네."
"좀 너무한 처사라 생각합니다만."
"너무한 처사다?"
교주가 걸음을 멈추었다. 자연스레 투파창귀의 움직임도 멈췄다.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
"지금 나보고 정파인을 천산 중심부까지 끌고 들어온 그 죄를 묵과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끌고 들어온 이를 벌해야지요. 그런데 정작 죄인은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추도마귀는 꼬리에 불과하오."
"그럴 리가요. 그자는 평소 욕심도 많고 틈만 나면 적삼혈마에게 불만을 토해내던 자입니다. 여울나무 관계자들에게 한 번 물어보시죠."
"이미 그동안 여울나무 쪽 인력들이 오목골에서 여러 차례 작업을 하다 걸린 게 보고됐소. 그날 괴기나한이 들이닥친 날에도 있었고!"
"설령 그런다한들 3할 감축은 너무한 처사라 생각합니다. 증거도 없이 의심정황만으로 그런 판결이라니요."
천마의 눈썹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면 3할 감축을 취소하고 적삼혈마에게 그 책임을 물어, 그 목을 치도록 하지."
"……1할 감축으로 해 주시지요."
"지금 교주인 내게 협상을 하자는 겐가?"
"협상이 아닌 신교를 사랑하는 자로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그럼 교주로서 확실히 말하지. 3할 감축 혹은 적삼혈마의 목이네. 자넨 어느 게 좋나?"
투파창귀의 입술이 잘게 떨린다. 그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마는 한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가만 바라봤다.
'이종진기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끝을 보았을 것을…….'
급작스런 투파창귀의 복귀에, 천마의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 마냥 복잡해졌다.
***
시끌벅적한 객점 한쪽 구석. 네 아이가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바로 천강 일행. 일이 끝났으니 이곳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은 그들은 음식을 시켜놓은 뒤 연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 건방진 꼬맹이 진짜 기다려야 해? 음식 다 식겠다. 식으면 맛없는데."
"누님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누님도 연화랑 티격태격 하는 거 싫을 거 아녜요?"
"뭐 꼭 그렇진 않아. 둔한 게 약 올리고 도망 다니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연화의 무공은 격투다. 초아는 암살과 경공이고.
사실 전혀 둔할 수 없지만, 나이차와 특성 탓에 연화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초아의 옷깃조차 스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초아는 늘 그걸로 연화를 꾹꾹 짓밟으며 짜증을 푸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엄연히 내가 위니까…… 언니로서 좀 참아주지 뭐."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벌컥 열리는 객점 문. 좌우를 살피다 천강을 발견한 연화가 후다닥 뛰어와 바로 합류한다.
"애들아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지?"
"애들아 미안해? 야, 나는? 너 나한텐 사과 안 하냐?"
초아가 버럭 소리치자, 연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응? 무슨 소리야. 나 이 음식들에게 사과한 건데?"
모두의 얼굴에 황당함이 올라온다. 그저 둘러댄 변명이 아니라 진심어린 눈빛과 태도였기에. 그때 연화의 눈에 처음 보는 아이가 들어왔다.
"어? 넌 누구야?"
"나, 난……."
"어. 걘 청청이라고 이번에 새로 사귀게 된 친구다."
"친구? 그래. 난 연화. 앞으로 잘 부탁해."
"으응."
갈색 무복을 입고 있으니 뻔히 여울나무 쪽인 걸 알 텐데도, 그런 걸 조금도 신경 안 쓰는 연화였다. 오히려 악수까지 청한 뒤 왈.
"옆으로 좀만 이동해줘. 나도 앉게!"
"응."
옆으로 슥슥 움직이는 사람들. 천강과 무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뭐지?'
그도 그럴 게, 늘 천강의 좌청룡 우백호를 자처하던 두 골칫덩이 중 하나인 연화가 갑자기 무진 옆으로 가 앉은 것!
사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어제 저녁. 초아와 연화는 단둘이 만나 음흉한 거래를 진행했다.
"언제까지 같은 문제로 싸우는 건 별로 효율이 없다고 생각해. 다투다가 진도도 못 나가는 경우도 허다하고 말이야."
"공감! 그러니 언니가 포기해. 솔직히 여자 쪽이 나이가 더 많다니…… 추하다고."
"무, 뭣?! 이 밥밖에 모르는 땅딸보가……!"
"뭐라고?!"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분위기. 그래도 상대적으로 이성적인 초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봐봐. 지금 또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면 시간낭비라니까?"
"움……."
아직 이해를 못하겠는지 연화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걸 본 초아는 그녀를 이해시키는 대신 맛나 보이는 당근으로 꼬드기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생각이 있어. 너랑 나랑 번갈아 가면서 격일로 천강에게 붙어 다니는 거야. 어때?"
"내가 붙어 있는 날에는 언니가 가까이 접근 안한다는 거야?"
"그렇지. 내가 붙어있는 날엔 네가 그러면 되는 거고."
"우와아. 좋아!"
그렇게 당사자는 쏙 빼놓고 거래를 한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수혜자가 초아였던 것.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 사실을 일체 모르는 천강과 무진은 그저 벙찐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거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아무튼 아까 이루어진 싸움을 떠올리며 천강이 무진에게 칭찬을 했다.
"무진아, 아깐 잘했다. 강한 힘이 있는데도 조리 있게 잘 싸우더구나. 그런데 녀석에게 붙잡힌 건 일부러 그런 거냐?"
"예, 형님. 놈이 그랬잖습니까? 너무 싱겁게 끝나면 구경꾼들에게 미안한 거 아니냐고. 그래서 일부러 위기에 몰린 것처럼 잡혀준 뒤, 형님이 가르쳐준 옆구리 급소를 가격했습니다."
말이 없을 뿐 늘 눈치가 빠삭하더라니……. 천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승리는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대신, 기고만장해서는 아니 된다. 당장 점혈도 뜻대로 잘 안 풀렸지?"
"예. 원래는 오른팔만 풀 생각이었는데 상체 전체가 다 풀리는 바람에…… 중간에 매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회가 날 때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계속 시도해 보거라. 언젠가는 뜻대로 잘 될 거다."
그렇게 천강의 훈화가 끝이 나자, 초아가 무진에게 고기를 건네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근데…… 어쩜 둘이 똑 닮았어? 진짜 두들겨 패는 것까지 비슷한 거 보고, 나 아까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니깐?"
그러자 무진에게 간 고기를 연화가 낚아채며 왈.
"아, 내가 그때 있었어야 했는데. 정말……. 오물오물. 마쉽당."
"천강. 지금 얘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쉽다일까, 맛있다일까?"
"둘 다겠죠."
"후우……. 못 말려. 거기 청청이라고 했지? 너도 어서 먹어. 나 돈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음 더 시키고."
"네에. 고마워요, 초아님."
"어? 내 이름 알아?"
"유명하시잖아요. 작년…… 기경만회 우승자……. 매우 뛰어나신 분이라고."
초아의 턱 끝이 치켜 올라가고, 코가 오뚝이 선다. 눈썹과 눈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린다.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청청에게 음식 접시들을 옮겨주었다.
"야, 많이 먹어! 지금까지 본 여울나무 출신 중 제일 마음에 드네!"
"가, 감사합니다."
물론, 청청의 앞에 놓인 접시의 태반은 곧바로 연화의 입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천강 일행이 맛난 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찾았다, 쥐새끼들."
"어디?"
"저기. 저쪽 구석."
"맞네. 저기있구만. 난 바로 애들 부르러 간다."
"그럼 우린 어디로 이동하는지 조용히 따라붙고 있을게."
"그래. 이따 보자."
은밀한 움직임이 천강 일행 주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