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4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2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43화
43화. 천산 기경만회
천산 기경만회(技競萬會).
매해 여름 열리는 연례행사로, 마교에선 꽤 중요한 명절이다.
교주인 천마가 주민들에게 얼굴을 비치는 몇 안 되는 날이기도 했고, 이곳에 훈련생으로 들어온 이가 처음으로 마교 주민들을 보고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계 폭풍이 닥치기 전에 이루어지기에, 어떤 면에선 큰 사고나 피해 없이 잘 지나가기를 바라는 기원제이기도 했다.
"기경만회! 일만 명의 마교 주민들이 모인다는 의미야. 향후 마교를 이끌 이들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고, 마교 주민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자리지."
초아의 설명에 천강과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쪽은 쪽팔린 게 장난 아니겠는데요? 경쟁이 여간 치열한 게 아니겠어요."
"뭐 쫌 그렇지? 후후."
기경만회라……. 전생에는 없었던 행사다.
마교의 꿈나무들을 관리하는 암운곡과 여울나무 두 곳을 붙여 경쟁심을 부추기고, 그로 인한 실력 증진과 함께 마교 주민들에게는 즐거움을 만든다니…….
흥미롭네. 누구 생각인지는 몰라도 나쁘지 않다. 자고로 실력 증진엔 경쟁자의 존재만큼이나 효과적인 것도 없지.
"천강. 무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누나가 다 사줄 테니까 말만 해!"
"연화 오면 같이 먹을게요."
"걔 오면 그 때 또 먹으면 되지?"
"아녜요. 연화 걔는 자기 빼놓고 우리끼리 뭘 먹었다? 아주 단단히 삐질 겁니다. 그치 아우야?"
"예, 형님. 삐지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주먹을 휘두를 지도 모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연화 그 꼬맹이는 먹을 것에 만큼은 진심인 애였다. 괜히 며칠 간 피곤 하느니 잠깐 식탐을 참는 게 나았다.
그래도 코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향기에 고개를 든다. 널찍한 거리와 그 양쪽으로 각종 노점들과 상가들이 즐비해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 거리는 50년이 지나도 그대로네.'
물론 건물들은 달라졌지만,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배치는 옛날 그대로였다. 중원이 식량난으로 허덕일 때도 마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던 탓에 그럴 지도 몰랐다.
거리 위로 갈색, 흑색 복식을 차려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조금은 특이하게 다가온다. 그때 웬 의미심장한 문구가 천강의 눈길을 끌었다.
"응?"
"왜 그래? 아, 저거?"
초아에게 이끌려, 무진과 함께 마을 중앙 광장으로 나아간다.
그곳에는 거대한 바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바위 주위로는 여러 글귀가 쓰여 있었는데, 그중 몇몇 글자가 천강의 눈을 사로잡았다.
『……묵범귀영, 흑살마신.』
이게 대체……?
'왜 내 별호가 여기 새겨져 있는 거지?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눈을 비비는 천강. 그러나 다시 떠 봐도 그대로다. 그런 천강의 행동을 오해한 초아가 웃으며 설명을 해준다.
"이것은 기념비야. 천마신교가 세워진 이래, 큰 공적을 세운 이들을 새겨놓는 바위지. 여기 보면 묵범귀영이 있지? 네가 기록을 갱신한 그분, 엄청 유명한 인물이라고."
그래. 그 인간에 대해서는 나도 질리게 들었다. 그리고 아마 일반 마인들 중엔 나보다 그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한때는 그가 북명신공의 비급서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스승과 열심히 찾고 다닌 적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고개를 들어 초아에게 질문.
"근데 그 옆에 흑살마신은 무슨 공적을 세웠길래 여기 쓰여 있나요?"
"아, 흑살마신? 그분은 비교적 최근에 새겨진 건데 말이야. 대략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 약 50년 전 신교가 외부의 세력과 배신자들에게 넘어가려는 순간이 있었어."
오호. 그런 일이 있었나?
가만. 잘 생각해보니 기억이 난다. 죽기 직전에 싸웠던 서열 1-10위의 마두. 아무래도 초아가 말하는 배신자들이란 그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시 천마는 북명신공의 비급서를 줄 테니 신전에 쳐들어오는 침입자들을 처리해달란 부탁을 했었고, 천강은 그 부탁을 받아들여 그들을 일망타진한 적이 있었다.
'그저 단순히 천마가 약해진 틈을 타, 지들끼리 합의보고 교주 자리를 넘보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만?'
초아가 말을 이었다.
"그때 이분이 나타나 그들을 일망타진 하셨지. 마두 83명과 마인 1,384명을 말이야. 그것도 단 하루만에!"
응? 마두 83명에 마인 1,384명?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눈을 끔벅이는 천강. 다시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니까 당시 우연찮게 교주가 비급서의 위치를 알고 있단 소식을 듣게 되었고, 찾아가니 내게 이리 말했지.
"북명신공의 비급서를 원한다고? 알겠네. 그런데 경쟁자가 좀 많네. 마교 서열 3위 추혼살개 기억하나? 지금 그의 자택에 가면 경쟁자들이 모여 있네. 자네가 마지막 참가자일세. 승자에게 그 위치를 알려줄 것이니 이긴 뒤 찾아오게."
그 말을 믿은 천강은 단번에 그곳으로 뛰어갔고, 문을 걷어찬 뒤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라 천강에게 달려드는 73명의 마두들.
"흑살마신?! 여긴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일단 조져!"
"죽엇!"
"하! 그래. 제일 강할 것 같은 놈부터 처리하는 게 인간다운 방식이지! 다 덤벼!"
그에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는데 그놈들 또한 배신자들이었다니.
'그러고 정작 찾아가니, 침입자들을 처리하면 직접 가져다준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었지.'
그러나 어찌할까. 비급서의 위치를 알고 있는 그는 갑이요, 그걸 간절히 원하는 천강 자신은 을인 것을.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인 1,384명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게 끝이에요?"
천강의 질문에 고개를 젓는 초아.
"그것 말고도 또 사고 친 게 있어요?"
"응? 사고?"
"아, 아녜요."
초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지금 하는 천산 기경만회(技競萬會) 있잖아? 이것도 50년 전 당시 흑살마신이 건의해 만든 거래."
"에에?"
뭐야. 나 그런 기억 없는데? 대체 누구야? 내 이름 팔아먹은 놈!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렇게 한참을 천강이 씩씩 거리는 그때였다. 천강과 그 일행 눈에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을 보는 순간, 들뜬 천강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야야, 독각귀. 그런 식으로 해서 언제 가겠냐?"
"빨리빨리 좀 움직여라, 엉?"
갈색 무복을 입은 열댓 명의 아이가 실실 쪼개며 걸음을 옮긴다. 그 앞으로는 한 아이가 절뚝거리며 힘겹게 몸을 움직이고 있다.
"아, 진짜 답답하네!"
뒤에서 발로 뻥 차는 누군가. 아이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 천강은 그 소녀가 왜 걸음걸이가 이상한지 알 수 있었다. 아이는 한 쪽 다리가 없었다.
"독각귀. 어여 일어나야지?"
"배고프다.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어디든 존재하는구만. 남들과 조금 다르다 하여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뭐 그런 부류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옆에서 무진이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저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진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마교다. 힘이 없으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다."
"형님! 그치만……."
옆에서 초아도 고개를 끄덕인다.
"천강 말이 맞아. 저들이 마교 주민이면 모를까, 아직 마인이 아니라도 마인이 될 아이야. 우리가 끼어드는 건 여러모로 도움이 못 돼."
그러나 그리 말하면서도 천강의 얼굴엔 씁쓸함이 올라왔다. 순간 맹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땡추 녀석도 딱 저랬었지.'
외모가 남들보다 추하고 못생겼다고 동기들에게 늘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고, 그러다 우연찮게 천강 자신과 만나게 되면서 그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같은 암운곡 출신이라면 어떻게 도와주긴 하겠다만, 하필 여울나무 쪽이라니…….'
세월이 흘러 많은 게 변해도 세상 돌아가는 건 늘 똑같은 법이다. 특히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은 더더욱.
요새 마교가 어떤 구도인지는 몰라도, 암운곡과 대립구도인 여울나무 쪽 일에 끼어들어 좋을 게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진정 사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펼쳐 뜻을 이루어낼 줄 알아야지.'
천강은 예의 없고 건방진 것들은 사정없이 두들겨 패도, 약자를 괴롭히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들을 혐오하고 벌한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 그에 움직이려는 순간, 무진이 말을 걸어왔다.
"그럼 형님과 누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무진의 눈을 쳐다본다. 꽤 진지하다.
어디 그럼 이번엔…… 우리 아우의 일처리 실력이나 좀 볼까?
"무진아. 지금 우리가 낄 만한 상황이 아니란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예. 형님."
"그래. 대신 사고 안치기다. 원만히 처리하고 오는 거야. 알겠어?"
"걱정 마십시오, 형님. 형님에게 배운 대로만 하겠습니다."
"응?"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뭔가 좀 불안한데.
'……기분 탓이겠지 뭐.'
무진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걸 본 초아가 뭐하냐며 천강의 등짝을 후려친다.
"야! 형이면 말려야지, 더 부추기면 어떡해!"
"남자라면…… 그것도 진정 마교의 남자라면, 상황이나 형편에 얽매일 필요 없죠. 안 그런가요?"
"그, 그야 그 편이 더 남자답고 멋있긴 한데……."
"어디 얼마나 잘 하는지 한 번 지켜보죠."
"괜찮을까?"
"솔직히 질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그 사이, 무진은 쓰러져 있는 소녀와 괴롭히는 무리 사이에 섰다.
"하……! 넌 뭐냐?"
"지나가는 소년."
"복식을 보아하니, 저기 굴속에서 지내는 쥐새끼 같은데……. 어디서 건방지게 암운곡 새끼가 끼어들어? 엉?"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고, 키도 머리 하나씩은 더 크기에 쫄릴 만하건만…… 무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신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야, 돼지."
"무, 뭐? 돼지?!"
"너 공자님이 뭐라 하셨는지 알아?"
무진의 질문에 모든 아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그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소녀도, 초아도, 그리고 그 주위 사람들도.
"공자님이 말씀하셨지. 하늘의 순리에 순응하는 자는 살고, 하늘의 순리에 거역하는 자는 죽는다. 지금 니들이 하는 짓이 과연 하늘이 원하는 일일까? 하늘이 노하는 짓은 아닐까?"
그 한마디에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도 말을 못하는 녀석들. 그래도 아직 어린 만큼 양심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인간은 간사하다.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내가 하는 건 괜찮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고 자연스레 써먹는다.
"그래서 뭐 이 새끼야! 마교의 교리 몰라? 힘이 절대적인 거!"
"아아. 알지. 근데 그것도 알지? 친구나 동료끼리는 서로 돕는 경우도 있다는 거."
"하! 그 이야긴 지금 저 독각귀년이랑 너랑 친구란 소리냐?"
"어."
"언제부터?"
"방금.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얜 내 친구이자 동료다."
무진의 뻔뻔스런 대답에, 상대는 물론 뒤에서 지켜보던 소녀까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주위에 몰려든 인파 또한 마찬가지.
초아가 고개를 돌려 천강을 쳐다본다. 천강이 한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린다.
"동생 교육 참 잘 시켰네?"
"……."
그때 정신을 차린 왈패무리 왈.
"푸하하핫. 이야. 독각귀 제법이야? 꼴에 계집이라고 그 행색으로 사내새끼도 꼬아낼 줄 알고. 어이, 참견쟁이 꼬맹이. 좋을 말로 할 때 그냥 물러나라. 너 이 많은 숫자를 상대로 자신 있어?"
그러나 천강에게 보고 배운 게 많은 무진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도리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화려한 언변으로 치장할 필욘 없겠지. 궁금하면 덤벼. 한 판 붙자."
"하……!"
무리가 두 아이를 둘러싼다. 그 주위로 인파가 겹겹이 몰려든다.
초아가 다시 천강을 쳐다봤다. 천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렇게 보니 완전 친형제네, 친형제야. 일을 아주 요란하게 만드는 게 피가 섞였다 해도 믿겠어, 천강."
"꼭 말로써 해결하는 게 원만한 해결법은 아니잖아요…? 때론 주먹이 더 빠르고 적절할 때가……."
"진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천강은 입을 다물었다. 여마인들을 상대로 말싸움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대신 머뭇머뭇하다 한마디 말했다.
"오늘도 역시나 예쁘시네요, 누님."
"어머멋. 정말? 고마워!"
잠깐의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오늘도 호감을 사고 있는 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