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4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41화
41화. 흑살마신이 살아있다고
전생의 삶은 전쟁터였다.
열 살까지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싸웠고, 암운곡에 들어선 이후로는 자살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했다.
그런 삶에 그나마 햇빛이 들 날이 있었다면, 스승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승님……."
내 스승은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며 돌아가셨다. 이종진기라는 문제를. 물론, 그와 함께 불투명한 꿈과 희망 또한 주셨다.
- 흡성대법의 원류인 북명신공의 비급을 찾아라. 그리하면 살 수 있다.
그 이후로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몸에 매단 채, 아직은 죽으면 안 돼. 이놈을 쓰러뜨리고 비급의 단서를 찾아야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래…….
내 전생의 삶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이봐, 현경 나리. 삶은 전쟁이야! 현경에 도달하면서 어떤 고상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간절한 바람을 가진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천강의 눈에 핏발이 올라선다.
"그런데 고작 경지 차이 운운하면서, 칼춤 추는 계집마냥 설렁설렁 칼을 휘두르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아?!"
인간의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치열하고 뜨겁다.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네 패인이다!"
바득. 이를 꽉 다무는 천강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가진 진기의 곱절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몸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 증상은 무진이가 겪던 것과 비슷했다. 안에서 내기가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천강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여기서 멈추면 내가 진다. 그럴 경우 나도 죽고 무진이도 죽는다. 살고 싶다면……! 놈의 내기를 완전히 빨아들인 뒤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코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아주 조금만 더……!!'
그런 그 때였다.
"그만하면 됐다, 아가야. 네 승리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땅바닥을 발로 가볍게 내려친다. 그러자 딱 붙어 있던 두 사람은 그대로 반대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큭……. 사, 사학 어르신."
"선배님……."
"어린 아이라고 너무 얕보았구나. 그래도 명색이 무제(武帝)의 후학이거늘……."
"면목…… 없습니다."
"네가 진 걸 인정하느냐?"
현경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약조를 했으니 내가 이들을 맞이해도 문제가 전혀 없겠지. 천산의 보고로 데리고 오거라."
그것을 끝으로 천강은 정신을 잃었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린 건, 꼬박 하루가 지난 뒤였다.
"헉. 허억. 여기는……?"
"형님!"
"정신이 좀 드느냐?"
상체를 일으킨다. 한 번 본적이 있는 천산의 보고 1층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책상 하나를 제외하고는 훵한 곳. 그곳에서 천강은 웬 담요 위에 누워 있었다.
"사학 어르신. 인사 올립니다."
"그래그래. 끌끌."
"어떻게 무진이는 괜찮은 가요?"
"일어나자마자 이 아이 걱정부터 하는 게냐?"
나중에 크게 되겠구나. 속으로 감탄을 한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걱정 마라. 응급조치는 해두었으니."
"후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런데 응급조치라 하시면……."
"안타깝게도 내게는 이 아이의 체질을 고칠 방도가 없다."
"아……."
그리고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천강의 시선이 닿자 무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웃었다.
"형님. 전 무(武)를 익힐 수 없는 몸이래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혈맥이 막혀 기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땐 괜찮으나, 그것이 뚫리고 나면 마치 소용돌이처럼 주위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고는 생을 마감하는 체질이다."
"처음 들어봅니다. 그런 건……."
"아마 그럴 테지. 100년에 한 번 나타날 만큼 아주 희귀하진 않으나, 보통은 어떤 조치도 취하기 전에 죽어버리곤 마니까."
"그런데 형님 덕분에 전 살게 되었데요."
무진이 천강 앞으로 나아온다. 그리고는 꽉 껴안으며 말했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형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무진의 얼굴에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올라왔다. 그런 표정은 맹익 이후로 처음이었던 터라, 어색함을 느낀 천강이 하하 웃으며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평생 무공을 못 익히는 건가요?"
"아니다. 다만 네가 한동안은 고생을 해야 할게다. 좀…… 귀찮을 수도 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그에 설명을 시작하는 노인. 그걸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러니까 24시간에 한 번씩 점혈을 해야 한다 이 말이로군요."
"그래. 간단하면서도 힘든 일이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 말해도 알지 않느냐? 본디 진짜 힘든 일은 간단한 걸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니라."
틀린 말은 아닌지라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점혈을 해줄 짝을 만날 때까지는 계속 네가 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니 힘들 것 같으면 이야기 하거라. 원한다면 흑영대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겠다."
"근데 그곳에 들어가면 평생을 여기서 살아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럼 거부합니다. 동생을 이런 곳에 가둬둘 순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원하면 그리 하겠지만요."
천강이 무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 미안함을 갖지 않아도 된다. 편히 말하거라. 다만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난 너랑 함께 할 날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좋겠다."
"형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함께 다니고 싶습니다."
"그래."
"끌끌. 좋은 광경이로고. 그럼 결정된 것 같으니 내 점혈할 위치와 순서를 가르쳐주마."
***
"괴기나한님. 적삼혈마가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마교의 기계작업실.
실눈을 가진 사내가 들어와 까딱 고개를 숙인다. 그는 마치 제 집이라도 되듯 능숙하게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 노인 옆에 자리했다.
"이제 슬슬 결정하시죠? 저희가 인내심이 썩 긴 편은 아니라서."
"그러니까…… 여울나무 숲의 훈련장을 만들 것이니 오목골에 허가를 내어 달라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답을 주면, 더는 귀찮게 안 할 것이냐?"
"그렇지요. 물론 저희가 원하는 대답을 주셔야 괴기나한님께도 좋을 겁니다. 피차 죽은 사람 때문에 피곤할 필요 없잖습니까?"
엉큼한 놈 같으니라고. 맹익이 망치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따라와라. 교주님께서 막 돌아오셨다 하니 그 앞에서 확실히 이야기 해주지."
"좋습니다. 그보다 확실한 건 없겠지요."
괴팍한 인상의 노인이 작업실 인력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그대로 천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빛 이파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서늘한 공기와 함께 새하얀 눈과 얼음이 눈에 들어온다.
신전은 그러한 만년설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신전 문 앞에 도착하자, 신전 지킴이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용건을 물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교주님께서 복귀하셨다 들었네. 인사차 들렀네."
"예, 그럼 들어가시지요."
고요함 혹은 적막감이 감도는 어둠 속을 찬찬히 걸어간다. 복도를 지나 신전 중앙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눈에 대화중인 천마와 마교서열 13위 천수마검이 들어왔다.
"음? 적삼혈마와 괴기나한이로군. 이 시간엔 무슨 일인가?"
"교주님. 보고드릴 게 있어 왔습니다."
"보고할 일이라……. 듣고 있네. 말하게."
적삼혈마와 맹익의 시선이 교차한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는 실눈의 사내. 맹익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여울나무 숲에서 훈련장을 늘리고 싶다면서 오목골에 공사 허가를 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여울나무? 이미 그곳은 훈련장이 충분하지 않은가? 암운곡보다 더 클 터인데."
"그게…… 합격점을 높였는데도 날이 갈수록 훈련생들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지금도 상당히 비좁은 상태입니다, 교주님."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대기하던 천수마검 왈.
"그렇다 해도 여울나무와 오목골은 거리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사실 상당한 정도도 아니었다. 아주 많이 떨어져 있었다. 천수마검의 질문에 실눈의 사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터가 좋아 보여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터가 좋고 기운이 왕성한 자리라야 훈련 효과도 더 좋지 않겠습니까?"
"흠……. 논란이 크게 일만한 사건이로군. 그런데도 둘이 함께 왔다는 건 합의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봐도 좋나?"
"그렇습니다."
"그럼 결론을 이야기해 보게."
그런 그 때였다. 신전으로 네 사내가 나타났다. 그들은 기계진법과 일원들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어깨에 무언가를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다.
"신교의 하늘을 뵙습니다."
"그래. 근데 그것들은 무엇인가?"
맹익이 고갯짓을 한다. 부하들은 그것들을 천마의 앞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맹익은 슬쩍 티 나지 않게 적삼혈마의 표정을 살폈다.
늘 그렇듯 웃고는 있으나 살짝은 굳어 있는 얼굴. 그걸 본 맹익은 들고 온 것들의 보자기를 풀었다.
"최근에 오목골 흑살마신의 거처에 은밀히 침입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뭐, 흑살마신의 물건들을 훔치기 위해 뛰어드는 철없는 것들은 늘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여기 보시지요. 정파인입니다."
"뭐라?"
천수마검이 재빨리 그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교주에게 보고.
"아무래도 제갈세가 쪽인 것 같습니다."
"감히 이 마교에 정파인을 데리고 들어온 이가 있단 말인가? 누군가! 이 정파 나부랭이를 끌고 천산 내부까지 들어온 놈들은!"
교주의 분노에 신전이 크게 흔들거렸다. 맹익은 실눈의 사내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두 죽어 있어서 그 뒷배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 보시면…… 이 자는 서열 97위 마도추귀입니다."
"교주님. 마도추귀면 여울나무 숲 책임자 중 하나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적삼혈마에게로 향한다. 그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무고함을 토로했다.
"상황이 참 이상하지만…… 이건 누명입니다, 교주님. 누군가 여울나무와 제게 흠집을 내기 위해 꾸민 게 틀림없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천수마검이 성을 냈다.
"닥쳐라! 마도추귀는 네 수족 중 하나라는 건 대부분의 마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거늘!"
"진짜입니다. 저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혀주시길 간청하옵니다."
"교주님. 그냥 이자에게 총책임자로서 책임을 물으십시오!"
천수마검과 적삼혈마가 교주 앞에 고개를 숙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맹익이 말했다.
"교주님. 적삼혈마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증거가 미흡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사안이니, 여울나무 숲의 재정과 인원 감축을 건의 드립니다."
"……그래. 어딘가에서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겠지. 적삼혈마,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적삼혈마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대답했다.
"너무도 억울해 항소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으나, 마도추귀는 분명 여울나무 숲 관계자. 그 사실은 분명하니, 교주님의 명을 기꺼이 받들겠나이다."
"그래. 그럼 내년부터 한 해 예산과 선발인원을 올해 기준으로 3할 줄이도록."
"하해와 같은 은혜 받드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적삼혈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찬찬히 물러난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아귀와 같이 흉악했다. 예산과 선발인원을 줄이게 됨으로써, 오목골의 훈련장 건도 자연스레 묵살되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신전 복도로 빠져나가는 사내. 그런데 그 때, 맹익이 마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들을 누가 죽인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가 도착했을 땐 이미 죽어있었다 했지. 그게 누군가?"
"흑살마신입니다."
"뭣?!"
맹익이 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흑살마신이 복귀했습니다. 거처에 그가 남긴 필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대답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신전 밖으로 향하던 적삼혈마 같은 경우에는 그 실눈이 동그랗게 보일 정도로.
'흑살마신이 살아있다고……?'
적삼혈마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