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8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5화
75화. 목걸이
천산 앵화고목 뜰.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는 그 속에서, 약관(弱冠)이 살짝 못 되어 보이는 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에 마음이 빼앗길 만하건만, 명상에 빠진 남자에게선 그 어떤 미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명상에서 깨어난 것은 두 명의 손님이 찾아왔을 때였다.
감겨 있던 남자의 눈이 서서히 뜨인다.
"이런. 제가 수련을 방해한 건 아닌가 싶군요."
"아닙니다, 백의마제. 간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교주님."
"거기. 천강도 오랜만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건네는 소교주의 인사에, 스물 중반 즈음 되는 사내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행태가 못마땅한 그의 스승이 째려보자, 천강은 마지못해 한마디 내뱉었다.
"예~예. 소교주님, 평안하셨습니까?"
"자네도 잘 지냈지?"
"저야 뭐…… 못 지낼 게 있나요?"
"하핫. 그래. 그런데 백의마제.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소교주의 질문에 백의마제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받으시지요."
"이게 무엇입니까?"
"천산의 보고에 계신 어르신께서 일전에 교주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셨다면서, 이걸 소교주님 선물로 전달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소교주가 그걸 받아든다. 문양이 독특할 뿐, 다른 특이한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인 제게 단순히 목걸이를 주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예. 훗날 깨달음을 얻고 기연을 얻는다면, 이것이 천산의 보고 비밀 장소에 들어설 수 있는 열쇠가 될 거라 하셨습니다."
"비밀 장소라……. 그것 참 멋지군!"
목걸이를 들어 햇빛에 비춰보는 소교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올라왔다.
나무에 기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강의 입이 삐쭉 튀어나왔다.
'좋겠네. 소교주라 천산의 보고에도 들어가 보고, 선물로 비밀 열쇠도 받고.'
인생에 불만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이럴 땐 부모나 뒷배가 없는 게 꽤 서러운 천강이었다.
그에 그는 몸을 돌려 숲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야, 이눔아! 아직 스승이 볼일이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게냐!"
"수련하러 갑니다, 수련! 천천히 볼일 다 보고 오십셔!"
***
'한때는 그걸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지.'
천산의 보고 내부. 잠시 자리를 비운 사학 어르신을 기다리며 천강이 손바닥위에 놓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아련함이 그득했다.
천강은 이 목걸이를 다시 되찾게 된 경위를 가만 떠올렸다.
세 시진 전.
교주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천강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일단 현경에 진입할 수 있는 활로는 열었군.'
이제 천산의 보고로 찾아가, 사학 어르신이나 일전에 한 번 맞붙었던 현경에게 부탁한다면 현경이 되는데 필요한 조언들을 받을 수 있으리라.
물론 그것에 대한 빚은 오로지 교주가 질 것이지만.
'그럼 어디 바로 가볼까?'
그러나 그 전에…… 아직 해야 할 일 하나가 그의 뇌리에 남아 아른거렸다.
약 55년 전. 기억 속의 물건이.
'천산의 보고 비밀 장소. 3층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열쇠가 필요해.'
그 열쇠란 바로 지금 천마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
그에 천강은 슬그머니 교주에게 운을 뗐다.
"교주님."
"말하거라."
"제가 교주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만, 지금 이 상황 수습 가능하십니까?"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느냐?"
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싶어도 암운곡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너도나도 다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후우. 일단 공식적으로 발표를 할 생각이다. 쥐 굴에 대한 소문은 가짜이며 네가 진짜라고."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시지요. 제게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천마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마주한 천강은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 교주님께서도 좀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암운곡을 조기졸업 시켜주십시오."
"뭐? 지금 당장 말이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천마. 소년은 그런 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한 1-2년 정도면 됩니다."
"흠. 아무리 그래도 조기졸업은……."
"저보다 못한 이들도 마인들로 활동하고 있는데, 사실 능력만으로 따져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랬다. 지금은 기운을 철저히 숨기고 있지만, 흑철마괴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눈앞에 소년은 화경.
앞으로 몇 년 사이에 마두들과 경쟁을 할 만큼 실력이 출중한 이를 조기 졸업시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할 경우 내 쪽에도 더욱 이득이고 말이지.'
한 명이라도 마두가 더 많다는 건, 그만큼 세력과 권세가 강성해진다는 의미였으니까.
교주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조기졸업 시기를 결정하도록 하겠다. 대신 네가 내놓는 의견이 제법 괜찮아야 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듣고 나시면 나쁘지 않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겁니다."
소년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암운곡에 있는 소교주를 불러, 소교주 교육을 시키겠다고 하십시오."
"오호라. 소교주 교육이라?"
천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게, 소교주 교육은 일반적으로는 암운곡을 졸업한 이후에 시작한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암운곡 안은 마치 치외법권과 같은 구역. 교주의 손이 잘 닿지 못하는 바, 괜스레 소교주의 신분을 미리 공개했다가 사달이 날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교 역사상, 암운곡 시절에 소교주 교육을 받다 죽은 이들이 꽤 되었다.
"그러나 전 사달이 날 이유도 없고, 설령 사달이 난다한들 교주님의 진짜 자제분에게는 그 어떤 피해도 가지 않을 것이니 나쁘지 않은 방법 아닙니까?"
"하핫. 정말이지 좋은 방법이로군!"
생각대로만 된다면 지금의 떠도는 소문을 모두 잠재우는 건 물론, 다시는 진짜 소교주가 나타났다느니 뭐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조기 졸업까지 시키면서 빨리 빼내려 든다면, 적들은 확신을 갖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교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강 또한 마찬가지.
사실 각각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역시 아직 어리군. 소교주 교육을 진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을 굳이 밝힐 이유가 없는 교주는 입을 다물고. 그 앞에서 천강 또한 속으로 웃었다.
'자. 그러면 지금쯤 기분이 좋아졌을 테니, 우리 소교주님…… 아니, 이젠 교주님이지. 우리 교주님에게 내가 진짜 원하는 걸 받아볼까?'
방금 던진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본심을 감추기 위한 화두일 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예를 올리고 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척 하다 멈칫 한다.
"아, 맞다. 교주님."
"음? 말하거라."
"제가 교주님의 아들이라는 걸 증명할 만한 물건 하나를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없어도 되긴 하나…… 한 번씩 그걸 보여 달라 하는 이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응당 내 아들이라면 내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 흠. 그럼 어떤 게 좋으려나."
교주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러나 천강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열한 살 된 꼬맹이에게 줄 만한 게 마땅치 않겠지. 무기를 쥐어 줄 수도 없고 말이야.'
제일 적절한 건, 반지나 목걸이 같은 조그마한 것.
그러나 현재 교주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분명 신교 대대로 전해져오는 반지가 있었던 걸로 아는데, 양 손이 빈 걸 보면 아마 진짜 소교주에게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는 천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하나.'
제발 목걸이. 목걸이! 목걸이 목걸이 목걸이…….
그런 천강의 염원이 하늘에 닿기라도 한 걸까? 교주가 목에 찬 목걸이를 천강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것은……?"
"오래전에 선물로 받은 것이다."
"특이한 문양의 목걸이군요."
이미 몇 번씩이나 자세히 본적이 있지만, 새삼 처음 보는 척 연기하는 천강. 교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딱 그뿐이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럴 리가. 똑똑히 기억한다.
그 날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하던 스승의 말을.
- 훗날 깨달음을 얻고 기연을 얻는다면, 이것이 천산의 보고 비밀 장소에 들어설 수 있는 열쇠가 될 거라 하셨습니다.
"혹여나 다른 걸 원한다면 말하거라."
"아닙니다. 어차피 상징적인 용도로 필요한 것이니 이거면 충분합니다."
소년은 손에 놓인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님! 아니…… 일처리는 스승님과 제가 다 했는데, 왜 공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한 교주가 낼름 한답니까?'
'세상 이치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거다. 쌓아두면 나중에 다 네게 돌아올 것이니라.'
'아니, 스승님! 늘 그러셨잖아요? 욕심을 내라고. 약한 마음먹으면 빈털터리 되는 흉흉한 시대라고! 근데 양보를 하다뇨? 싫습니다. 이 목걸이 제가 가질 겁니다!'
'예끼! 때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잠시 접어두는 일도 필요한 법이다! 헛소리 말고 이리 내놓거라!'
천강의 입가에 스윽 미소가 올라왔다.
'결국은 스승님 말대로 되었네요.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때 양보한 이것이 제 손에 들어오리라고 말입니다.'
소년은 그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
"들었는가?"
"교주께서 이번에 소교주 교육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신 거?"
마교 내 자리한 객잔. 술을 같이 마시던 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에 들었지. 솔직히 쥐 굴에 진짜가 나타났다느니 하는 말…… 난 처음부터 안 믿었어. 말이 돼? 교주의 자식도 아닌데 묵범귀영의 기록을 깼다는 게? 얼토당토않는 소리지."
"그러게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낚인 거였다.
"그리고 만약 쥐 굴에 진짜 소교주가 들어왔었다고 치자. 그게 소문이 돌겠는가? 어떻게든 겹겹이 비밀을 쳤을 건데?"
"다들 낚인 거지. 쯧쯧. 그거 듣겠다고 술값을 날린 내가 바보같구만."
그렇게 확 타오르던 소문의 불길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일 아쉬움을 표하는 건, 여울나무 세력이었다.
암운곡 교관들의 단체 사망 사건 이후, 어느 정도 숨통을 튼 그들은 호시탐탐 판세를 뒤집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군요. 소문이 그저 소문이었다는 게."
"그러게 말입니다. 쥐 굴에 진짜 소교주가 있었으면 정말 딱 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로써 소교주가 확실시 되었으니, 우리로선 이득이로군요."
적삼혈마의 말에 호접일검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예? 이득이라니 어떤?"
"옛 기록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교 역사상, 암운곡 시절 소교주 신분을 드러내고 살아남은 이가 채 1할이 못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차기 교주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그를 죽여 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소교주의 신분이 확실하게 드러났으니, 교주 사람인 일필일사는 몰라도 다른 현경들은 모두 움직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비단 그들만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후후."
사람은 능력이 없음에도 늘 높은 걸 꿈꾼다. 현경들뿐만 아니라 잡다한 놈들까지 모두 다 꼬일 것이다.
"그럼 저희는 따로 공격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예. 이번 일로 그동안 미온적이던 흑도마황님께서도 움직이실 터. 우리는 그 사이 최대한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교주 쪽이 소교주로 정신없는 이때야말로 그동안 미뤄오던 일들을 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단 눈엣가시인 것들부터 처리해야겠지요."
적삼혈마의 실눈이 안광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