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0화
70화. 백호의 혼
"이봐, 청룡."
"말해라."
"힘을 나누어준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글쎄……."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찬찬히 대답을 해주었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 기력이 소모된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힘이 되돌아 올 때까진 꽤 피곤하다."
"그런데 왜 약쟁이들마냥 수시로 해대는 거냐?"
"간단하다. 그 정도로 그 인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이제는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백호였다.
그에 백호는 천강에게 앞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영롱한 빛 무리가 흘러나와 천강의 몸에 스윽 스며들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세 시진 간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해소되고, 뿌연 머릿속이 빠른 속도로 맑아진다.
"음? 이것은?"
"내 혼의 일부다. 너와 함께하며 네 마음과 정신을 보호해줄 것이다."
"보호해준다고?"
"그래. 앞으론 어떤 힘든 일을 겪어도 마음이 꺾이지 않을 것이요, 평생 잠을 자지 않아도 네 정신은 날선 검처럼 늘 또렷할 것이다."
눈을 감는다. 온산의 정기가 모여들어 나약한 몸을 받쳐주고, 그 정신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마치…… 그래. 소년은 호랑이 기운이 샘솟는 걸 느꼈다.
이것이 백호의 혼……!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백호로부터 다시금 빛 무리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천강의 주위를 맴돌다, 이내 왼팔에 스르륵 스며들었다.
소년이 재빨리 팔을 살펴본다. 어깨근처로 웬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있다.
"이건 또 뭐야?"
"그냥 가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 또한 널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네 몸을 보호하고 날렵하게 해줄 것이다."
"이야. 역시 신수쯤 돼서 그런지, 통이 크네?"
선물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주고 말이야.
눈을 감고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점검해 본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정순한 기운이 몸 주위를 맴돌고 있다. 감싸 안는 듯한 그 행태가 마치 보이지 않는 갑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단 행태만 봐서는 몸을 보호하는 용도처럼 보이는데……. 몸을 날렵하게도 해준다고?'
혹시나 하여 북명신공을 이용해 흡수해보려 했으나 전혀 딸려오지 않는 녀석들.
주먹을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다리를 내리쳐 본다. 그 순간 천강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설마.'
무언가 깨달음이 온 천강은 바로 발을 놀렸다. 그리고는 단숨에 들판 위를 내달려 보았다. 천강의 몸이 새벽하늘을 가르며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가볍다.'
마치 몸이 깃털이 된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굉장히 빨라!'
그랬다. 지금 천강의 움직임은 쏜살같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매우 빨라진 상태였다.
이전보다도 반 곱절은 더 빨라졌다고 할 만큼.
'그렇군. 그런 거였어! 이것들은 공기의 저항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거야!'
요 며칠 백호에게 고생한 게 떠오른 천강은 이번엔 방향전환을 시도해 보았다. 전력으로 뛰다가 왼쪽으로 틀어본다.
그 순간 뒤바뀌는 공기의 흐름.
기존에 나아가던 방향으론 속도가 확 줄어들고, 새로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는 그 어떤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백호 녀석이 보여줬던 움직임을 고스란히 재현해낸 천강이었다.
천강의 입에서 크나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음에 드는가 보군."
"물론!"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화경이나 현경이라 한들 인간은 인간.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에 고수들도 주기적으로 수면을 취하고, 큰 싸움 이후엔 피로해진 정신력을 회복해 줘야 하는데…… 천강에겐 앞으론 그게 필요 없단 의미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운데, 신체의 움직임 또한 발군!
전생에는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가는 암살자들의 뒤꽁무니만 바라보는 느림보 거북이였던 천강이 이젠 최고의 경공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어찌 마음에 안 들까?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아하니 나도 기쁘군. 그럼 난 이만 돌아가마.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그래. 잘 가라!"
"맞다. 떠나기 전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한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를 물어도 허락해 줄 테니까, 뭐든 물어봐."
진한 미소를 머금은 소년의 대답에, 백호 또한 작게 웃는다.
"어떻게 내 등에 매달릴 생각을 한 거지?"
사실 소년이 등에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작은 생각 하나가 소년에게 승리와 보상을 거머쥐게 해준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호는 그게 궁금했다. 어쩌다 그런 영감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눈썰미가 좋은 건가? 아니면 머리가 좋다거나?'
그러나 소년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 그거? 별거 아냐. 옛말에 호랑이 등에 올라탄다는 이야기가 꽤 많잖아?"
많은 정도가 아니다. 각종 파생된 이야기가 나돌 정도니까.
"그거 보고 나도 등에 올라타면 네가 어쩌지 못하겠구나 생각했어."
"하. 그 검증도 안 된 이야기를 듣고 목숨을 걸었다 이 말인가?"
"왜 이래? 검증이 안 되긴! 무려 책에도 기록된 이야기라고?"
꽤 오래되긴 했지만 전생에 분명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뭐였더라……? 에잇. 기억 안 나네. 아무튼!
그러자 백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책이라고 다 믿을 게 못된다. 거기에는 인간의 주관적인 해석과 상상력이 가미……."
"야. 글 쓰는 게 쉬워 보여? 그것도 다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하는 거라고? 상상해서 쓰는 게 더 어렵겠다!"
백호는 이마에 앞발을 짚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뭔가 대단한 인연을 만난 것 같았는데……. 왠지 속은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마냥 기분 탓은 아니리라.
"아무튼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인간. 다음에 또 보지."
백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던 천강의 두 눈은 크게 끔벅거렸다.
'와아. 무슨? 방금 신형을 쫓지도 못했어.'
이런 놈을 달리기로 잡으려고 했다고?
새삼 돌멩이 던지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천강이었다.
***
보름의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구미호의 출현과 지진이라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총책임자와 부책임자가 사망하는 큼지막한 소동이 있었지만, 가을걷이는 순조롭게 끝마칠 수 있었다.
최종 승리를 거머쥔 건 암운곡. 그러나 승패보다는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음에 감사하는 양 진영 아이들이었다.
풍미관을 떠나기 전, 아이들이 저마다 관리자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몇몇은 못 보겠네. 벌써 5년차라니."
"예, 추밀님. 어느새 그렇게 되었네요."
"특히 방중. 요만한 시절에 들어와, 벼에 대고 귀엽게 낫질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벌써 이리 장성하고."
"하하핫."
5년차들이 기분 좋게 웃고, 방중이 볼을 긁적인다.
추밀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래. 어디 갈 곳은 정했고?"
"중원에 나가서 일할까 생각중입니다."
"정보수집 쪽 말하는 거지?"
"예."
"힘든 길을 선택했네."
"그래도 그쪽이 제일 살만하잖아요. 후후."
"여자 보러 가는 건 아니고?"
"하하하핫."
다시금 터져 나오는 박장대소.
추밀이 검지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중원의 여자도 나쁘진 않지. 만약 괜찮은 여자를 구했다면 이곳 풍미관으로 오거라. 5년간 함께한 정으로다가, 내가 같이 살 자리와 집 정도는 마련해 주마."
동기들의 웃음 속에 방중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짜로 여자 보러 중원을 나갈 생각이었나 보다.
"자자. 그럼 이만 가자, 애들아."
초아의 지시 아래 줄을 서는 아이들.
천강은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제일 후미에 섰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추밀이었다.
"천강. 너도 잘 가거라. 내년에 꼭 다시 보자구나."
"예. 내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추밀님."
"그러고 보니 밤낮으로 바삐 움직이던데, 이곳에 와 원하는 바는 이루었니?"
음. 미완성이던 북명신공을 완전하게 하고. 이후엔 뜻하지 않게 신수를 만나 특수한 능력까지 얻게 되었으니…… 원하는 바를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차고 넘치게 받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예상치 못한 숙제도 생겨났다.
'인간의 몸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최대치가 정해져 있다니. 생각도 못했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간밤에 백호의 등에 붙어있다 보니 녀석의 내기를 강제로 흡수하게 되었다.
겨우 잠깐 붙어 있는 동안에도 다량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데, 무려 세 시진을 쉬지 않고 흡수했으니 그 양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천강이 기존에 가진 내공의 4곱절 정도 되는 양에서 더는 불어나지 않았다. 온몸에 기운이 가득 차 더 이상 들어찰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젠 슬슬 현경의 경지에 올라야 할 때인 거겠지.'
겸사겸사 소상혈을 제외한 다른 혈로도 내기를 흡수할 수 있도록 길을 뚫고, 무진이 하는 것처럼 기의 통로도 크게 넓히고.
'그건 그렇고, 다시 생각해봐도 대단하네. 무려 세 시진을 흡수했는데도 그 내기의 끝이 보이질 않다니.'
새삼 신수는 신수구나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 천강이었다.
눈을 감는다. 몸 주위로 정순한 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천강의 입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핫. 미소가 그득한 걸 보니 뜻하는 바를 이룬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천강. 너 또한 괜찮은 색시를 구한다면 풍미관으로 오거라. 이곳이 의외로 평온하고 살만 하단다. 만약 네가 온다면 내가 아주 큰 집을 지어주도록 하마."
"저기 추밀님. 저 이제 1년차에요."
아직 어린 애한테 대체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사람.
"그래?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곧 혼례를 올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예에? 아니, 대체 누가 그래요!"
암운곡 아이들을 인솔하던 초아가 갑자기 재채기를 한다.
'누가 내 이야기 하나?'
천강은 절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절대로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시 마세요, 추밀님!"
"근데 밤마다 단둘이서 나가는 걸 나도 몇 번 목격……."
"아, 그건 다 사정이 있어요! 생각하시는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알았죠?"
"하핫. 그래, 알겠다."
그러나 웃는 모습이 마치 믿기 힘들지만 믿어는 준다는 표정이다.
"자, 그럼 어서 가거라. 뒤쳐지겠다."
"예, 그럼."
소년이 타다닷- 뛰어 일행들 뒤에 따라붙는다.
긴 행렬을 만들어 암운곡으로 복귀하는 아이들을 보며 추밀은 한동안 팔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제일 뒤에서 영감마냥 뒷짐을 지고 가는 한 소년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요 며칠간 정말 재미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구나, 소년."
아니,
"흑살마신 천강."
배웅을 마친 남자가 한 차례 옷을 털고는 숙소로 돌아간다. 그가 서 있던 자리로, 새하얀 털이 서서히 떨어져 바닥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