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6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69화
69화. 기호지세
늦은 새벽. 늘 제일 먼저 불이 꺼지는 총책임자의 사무실에 웬일로 불이 켜져 있다.
그 안에는 심각한 표정의 두 사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사야."
"예, 어르신."
"이거 어떻게 하면 좋냐. 이번에도 암운곡이 수확량이 더 많다."
풍미관에서는 매년 상부에 그 수확량을 보고한다. 그리고 보고할 때, 각각 암운곡과 여울나무의 작황도 함께 전달한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가를 보고는 다음 한 해의 총책임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방은 매년 이런 저런 일을 꾸며왔다. 암운곡 담당 지역에 독을 뿌리는가 하면, 제대로 된 거름을 안 주는 등의 작업을 해왔다.
그럼에도 대방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우리 쪽 관리자는 23명이고 암운곡 관리자는 딸랑 1명인데. 왜 매번 결과가 이런 것이냐!"
"아무래도 풍수지리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요."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 종사였다.
"젠장. 그럼 어떡하지?"
"별수 없지요. 이번에도 슬쩍 하는 게 어떻습니까요?"
매년마다 그들은 암운곡 창고에서 곡식을 훔쳐, 자신들의 것으로 포장했다. 이번에도 그걸 하자는 뜻이었다.
"지금 추밀은 어디 있지?"
"아마 자고 있을 것입니다요."
"그래? 그럼……."
그런데 말을 하던 대방이 고개를 갸웃한다. 갑자기 지축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요새 흉흉한 일이 잦다 싶더니, 이제는 땅에 지진까지 이는…….'
그런 그 때, 종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 대, 대방님."
"왜 그래?"
"아니 그게…… 저, 저……."
종사가 검지를 들어 창밖을 가리킨다. 대방이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본다.
그 순간 대방은 볼 수 있었다.
20척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범이 뛰어오는 모습을. 그것은 순식간에 다가와, 총책임자의 건물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게 대체……?'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어. 미안합니다!"
***
기호지세(騎虎之勢)란 말이 있다.
범을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 내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 내리면 죽을 테니까.
천강은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놈의 등에 올라타는 거다.'
신수라 한들 형태는 호랑이. 등에 매달리면 녀석으로서는 떼어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멈춰 세워야 하는데…….'
그걸 위해 천강은 추격전을 시작하기 전 미리 돌멩이를 주워놓았다. 그리고는 놈이 방향을 트는 순간, 그걸 던졌다.
그 효과는 탁월했다.
백호가 멈춰 선다. 꽤나 화가 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은 아니리라.
그러나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는 법. 천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란 듯이 놈의 머리에 돌멩이를 한 번 더 던져주었고, 놈은 미친 곰 마냥 무식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
손짓 한 번에 대지가 갈리고, 발짓 한 번에 땅덩어리가 비산한다.
'워우. 확실히 신수는 신수. 장난 아니군.'
슬쩍 팔을 뻗어, 대지를 가르며 나아가는 강기에 손을 대본다.
팡! 내기가 얼마나 정순하고 고강한지, 북명신공으로 흡수를 해도 다 흡수 못하고 팔이 뒤로 크게 꺾인다.
'틈을 노려봐야겠어.'
천강은 몸을 낮추고는 호시탐탐 매달릴 기회를 엿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자세를 자유로이 전환할 수 있는 암운행보가 있는 한 그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기회.
쿠구구구구.
미꾸라지마냥 요리조리 도망치는 천강이 귀찮은지, 녀석이 힘껏 땅을 내려쳤다.
그러자 백호를 중심으로 30보 반경이 움푹 가라앉았다. 그 너머로는 땅덩어리가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강기로 이루어진 해일이라 불릴만한 위력.
그 속에서 천강은 고요히 몸을 은폐했다.
암운신공.
짙은 어둠이 천강의 몸을 덮어간다. 그 내기와 기척을 빠르게 지워나간다.
검은 안개에 뒤덮인 소년은 하늘로 솟구치는 대지조각에 매달려, 같이 하늘 위로 비산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공중에서 이동했다. 정확히 백호의 머리 위까지.
'됐다. 이제 남은 건 하강 뿐!'
검은 안개가 스르륵 땅으로 내려선다. 백호는 싸움이 끝났다 생각하는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도 신수는 신수라는 걸까? 번뜩. 하늘 위로 올려다보는 녀석.
'그러나 이미 늦었어!'
암운행보를 사용해 떨어지는 힘에 탄력을 더한다. 검은 안개 속에서 소년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백호의 이마를 붙잡는다.
후우웅.
벌레 털어내듯 곧바로 올라오는 백호의 앞발.
천강은 핑그르르- 팽이 돌 듯 회전해 그걸 피하고는 이내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힘껏 내기를 빨아들였다.
북명신공.
'좋았어. 등에 매달렸어!'
이제 남은 건 아침까지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 뿐!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은 늘 아침 해가 밝아오기 전에 사라졌다.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충분히 녀석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천강이었다.
크워어어-
백호가 몸을 이리저리 튼다. 천강을 떨쳐내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소용없어, 인마!'
북명신공의 특성상, 한 번 흡수를 시작하면 떨어뜨리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닌 바…. 천강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얼마 전 거대한 흑사 녀석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다만 한 가지 문제점.
후웅.
"어이쿠."
일반 호랑이와는 다르게 사람처럼 두 발로 설 수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녀석의 앞발이 등까지 나아온다.
천강은 그때마다 지천뇌공을 사용해 그 발을 필사적으로 쳐냈다. 놈은 수십 번을 시도하더니 더는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전략을 바꾸었다.
그것은 바로 땅바닥에 등 비비기!
온몸에 힘을 실어 체중으로 누르는가 하면, 높이 뛰어올라 등판을 바닥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래도 소용없어!'
천강은 온몸에 강기를 둘러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떨어질 땐 지천뇌공을 사용해, 그 속도를 최대한 떨어뜨렸다.
백호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크기가 좀 크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이제 갓 열 살 난 어린이의 체구라 앞발이 잘 닿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 이것도 버티는가 보자!'
갑자기 백호의 몸 안쪽에서 강한 기운이 응집된다.
강제로 반탄강기 비스무리한 걸 펼치려는 건가? 그런 천강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팡!
응집된 기운이 순간적으로 강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소년이 몸이 붕 떠오른다. 백호로부터 강한 반발력이 터져 나와 소년의 몸을 힘껏 튕겨낸다.
그러나 전생부터 흡공을 하며 이런저런 돌발 상황을 다 경험해본 천강이다. 이미 놈이 취할 만한 행동패턴은 다 머릿속에 있었다. 뛰어본들 천강의 손바닥 안이었다.
'인간들과는 다르게 고강하긴 하지만, 지천뇌공을 사용하면……!'
팡! 백호의 반탄강기에 맞춰 소년 또한 지천뇌공을 사용했다. 천강의 등짝에서 강한 파공음이 일며 튕겨져 나가려는 몸뚱어리를 제자리에 붙들어둔다.
'캬오오! 아직도 안 떨어졌어?!'
그러자 이번에는 강한 바람이 휘몰아쳐 소년을 급습한다. 땅에서 바위가 튀어나와 천강을 후려친다.
그런 대자연의 공격도 의미 없었다.
백호의 광활한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한, 얼마가 됐든 내기로 몸을 단단하게 감싸 안으면 됐기 때문이다.
'좀 떨어져라, 인간!'
백호가 다시금 날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 떨쳐내려는가 하면, 달리는 도중 보이는 장해물에 몸을 부딪치기도 한다.
총책임자의 건물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하필 불을 켜놓는 바람에, 백호와 천강의 알력싸움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어느덧 풍미관의 검은 하늘은 여명의 빛을 받아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
한 번은 주작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뭘 그렇게 시험을 까다롭게 보는 거야? 그냥 적당히 하면 안 돼?"
아무래도 녀석에겐 내가 깐깐한 시어머니로 비친 모양이다.
"까다로운 게 아니다. 청룡은 황족의 혈통, 넌 특이 체질, 현무는 인성과 덕을 보듯 나 또한 나만의 기준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껏 네 기준을 통과한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 아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한 번 잘 생각해봐. 네 말대로 특별한 인간, 좋다 이거야. 그런데 솔직히 네 시험을 통과하려면 못해도 생사경(生死境)의 경지는 되어야 하는데, 그쯤 되면 사실 더 이상 우리 힘이 필요 없잖아. 안 그래?"
그것도 그랬다.
"백호. 너무 시험의 규칙과 결과에 얽매이지 마. 적당히 네 마음에 든 인간이 나타나면 받아들이라고."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어휴. 똥고집. 진짜 딱 너 같은 놈 만나면 속이 다 후련하겠네."
***
그때 그 말이 이루어진 걸까?
세 시진 동안 꼼짝 않고 붙어있는 소년의 행태에 백호는 앞발 뒷발 다 들어올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야?'
이쯤 되면 등에 매달린 게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다.
꼬끼오-
날이 밝아옴에 수탉이 울음을 토해낸다.
내년에 농사를 짓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처참해진 풍미관 위에서, 백호는 밝아오는 새벽녘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여. 그대를 인정한다. 그만 내려와라."
"정말? 치사하게 말 바꾸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크워어! 신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야. 소년이 등에서 폴짝 내려온다. 천강의 얼굴은 까불거리는 것에 비해 꽤 핼쑥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해 등에서 떨어지는 순간, 말 그대로 죽음으로 직행이었기 때문이다.
백호의 눈이 소년을 고요히 응시한다.
"인간이여. 그런데 뭐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얼마든지."
"왜 돌멩이를 던졌지?"
소년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저히 달리기만으로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널 멈춰 세우려고."
"그 말은 홧김에 그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다?"
"그래."
"내가 화를 내며 역으로 달려들 거란 생각은 안 들었나?"
그러자 소년이 허리에 양 손을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지. 애초에 그걸 노린 것인데? 네가 잘하는 걸로 맞붙으면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더라고. 동물도 제 구역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잖아. 그래서 나도 내가 자신 있는 무대로 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어."
"그러다 죽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데도?"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 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피하고 막고 버티는 건 자신 있거든.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이겼잖아?"
하. 그 모든 게 계획이었다라…….
백호의 입 끝이 올라갔다.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기고만장하고 방자하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군."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백호의 생각이 바뀌었다. 이 소년은 단순히 최강의 무공을 지닌 인간이 아니다.
끈기도 있고 이기는 싸움을 할 줄 알며, 그걸 실행할 배포도 꾀도 있다. 백호는 이 소년에게 호감이 이는 걸 느꼈다.
백호의 앞발이 소년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