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5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57화
57화.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누렇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백여 명의 아이들이 움직인다.
맨 뒤에서 바닥의 흔적을 지우며 따라가는 천강에게 방중과 소운이 다가와 물었다.
"천강! 근데 아까 돌멩이다가 뭐라고 쓴 거야?"
"그러게. 글도 배운 줄은 몰랐는데?"
"그냥 욕 좀 적었어."
"그래? 큭큭. 잘했어. 어후. 정말 속이 다 시원~하네."
소운이 천강에게 엄지를 치켜 올렸다. 이번 사건 한 방에, 그동안 있었던 안 좋은 감정은 모조리 씻긴 듯했다.
"자자. 그럼 빨리빨리 가서 만찬을 즐기자고!"
"오오!"
방중의 외침에 환호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아이들.
이 멋들어진 계획으로 인해 그들은 각기 양손에 고깃덩이들을 잔뜩 쥘 수 있었고, 그렇게 암운곡은 풍미관에서 성대한 첫날밤을 가지게 되었다.
***
쾅.
뱃살이 두둑한 중년 남자가 힘껏 탁자를 내려친다. 그 앞에 선 풍미관의 부책임자 종사는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동안은 쭉 지켜본다고 그랬다고?"
"예에……. 그, 그렇습니다."
대방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흑살마신이라니? 왜 그런 거물이 하필 이 시기에 이곳에 지나간단 말이냐."
투파창귀의 제자 분을 맞아, 첫 환영식이니 만큼 신경 써 공들인 음식이었다. 그런데 졸지에 매일 그런 식사를 준비해야 하게 생겼다.
"대충 준비했다간 문제 생기겠지?"
"그, 그럼요! 흑살마신 성격 모르십니까? 그 괴이한 성품에 과거 마인들도 고생했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암운곡만 그리 준비해줄 수는 없는 상황.
대방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종사에게 지시했다.
"마두들에게 진상품으로 바치기 위해 준비한 것들, 거기서 빼다가 요리하라고 해."
"예."
"그리고 2주간 일이 곱절로 늘겠지만, 불평하지 말고 잘 좀 부탁한다고 주방장에게 전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숫자가 숫자라…… 거의 가지고 있는 상등품을 모조리 사용해야 할 겁니다요."
대방의 얼굴에 주름이 잔뜩 늘었다. 본인들도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하는 양질의 고기다. 그런 걸 이리 내어줘야 한다니.
"종사야. 뭔가 좋은 방도가 없을까?"
"그럼 윗선에 알리시는 건 어떻습니까요?"
"그런데 자네도 알잖나? 이쪽에서 외부로 사람을 보내는 순간, 교주 쪽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 만약 그쪽 인력이 파견 나와 이곳을 조사라도 했다간, 우리가 해왔던 짓이 걸릴 지도 몰라."
고민에 잠긴 두 사람. 그때 종사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대방님! 그럼 딱 일주일만 기다리시죠."
"일주일?"
"예. 기억 안 나십니까요? 기경만회 때 가지지 못한 만남을 이번에 이 근처에서 하기로 했습니다요.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잠깐 들를 텐데, 그때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요?"
"오호라.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여울나무에선 주기적으로 외부 세력과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최근엔 계속해서 방해가 들어와 그게 성사되지 못했는데, 그로 인해 이번엔 풍미관 근처에서 회합을 가지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소식을 전달하고, 여차저차 실력자들이 함께 왔다면 그들에게 직접 처리를 부탁하면 될 일!'
대방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구만! 그럼 그때까지 애들보고 고생 좀 하라고 해."
"예!"
***
"오오오. 천강! 천강!"
이른 아침. 숙소 앞에 모인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소리 높여 외친다. 그들 앞으로는 갓 익힌 고기들이 풍성히 널려 있었다.
"야야. 냄새 맡아봐. 진짜 죽인다!"
"크으. 색은 물론이요, 냄새부터가 남다른 게 어제 먹은 것만큼이나 양질의 고기임이 틀림없습니다요, 선배!"
"자자, 애들 깨워서 데려와. 식기 전에 다 같이 아침 먹자!"
"오오오!"
그때 간밤에 준비할 게 많다고 해서 잠시 사라졌다가, 새벽에나 합류한 추밀 또한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이게 대체……. 이 귀한 고기가 어떻게?"
그도 그럴 게, 이건 교주와 마두들에게 올라가는 진상품에나 들어가는 것 아닌가?
"몰라요. 그냥 아침 식사라며 주고는 도망치듯 돌아가던데요? 추밀님도 어서 와서 드세요!"
"그, 그래."
그러나 말은 그리해도 아이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어제 천강이 돌덩이에다가 써놓은 글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 덕분에 이리 맛난 아침이 나온 것이라고.
"천강, 갈수록 괜찮은 후배야!"
사백동굴에서 털린 일로 안 좋은 감정이 있을 소운이 칭찬으로 일색하고.
"99번 녀석. 간만에 마음에 들라 하네."
두 번이나 매타작을 당했던 66번도 호의를 표한다.
"좀 싸가지가 없긴 해도 은근 마음에 든다니깐."
평소 깝죽대던 13번 또한 마찬가지.
뛰어난 음식은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암운곡 아이들 모두에게 호감과 존경의 대상이 되어 가는 천강이었다.
그때 2번 묵현이 천강에게 나아왔다.
"잠깐 단둘이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응. 그래."
황금빛 들판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묵현이 잠깐 주저하더니, 저 멀리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을 보며 나직이 입을 연다.
"그…… 고맙다. 덕분에 아침 잘 먹었다."
"와아.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어제 벌인 일이 좀 보람되긴 하네."
"그런데……."
천강이 뭐냐며 고개를 돌린다. 평소의 무미건조한 얼굴이 아닌 꽤 진지한 표정으로 묵현이 말을 잇는다.
"다음부턴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응?"
"흑살마신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애들을 위한다지만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아."
"그럼 난 이만 간다."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일행들에게 돌아가는 묵현.
'저 녀석…….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건가?'
천강은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웃었다.
***
"자. 그럼 밥도 잘 먹었겠다, 이제 일하러 가자 애들아!"
선두에 서는 추밀을 따라, 아이들이 그 뒤를 졸졸졸 따라간다.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 그 위를 환한 태양빛이 살포시 내려앉고,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을 바라보며 그 사이를 찬찬히 걸어 나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 있으니 반대편에서 여울나무 녀석들이 나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묘한 기운이 흐르는 두 집단.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워질수록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마치 개와 원숭이마냥 서로를 노려봤다.
"……."
폭풍전야의 고요.
무거운 긴장감에 주변 풀벌레들조차 소리를 죽이고, 금방까지만 해도 시원하게 불던 바람조차 멈추어 선다.
그때 여울나무 측에서 다짜고짜 선공을 날려 왔다.
"여어. 잘 잤냐, 쥐새끼들? 너희 작년에 잤던 그곳에서 또 잤다며?"
"큭큭큭. 거기 아직 그대로 남아있긴 하냐? 안 무너졌어?"
뭐라 반격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못하는 암운곡 아이들.
어제 고기를 훔치러갈 때, 저들이 묵는 숙소가 얼마나 좋은지 봤기 때문이다. 그걸 본 여울나무 놈들은 물 만난 고기마냥 더욱 기세등등 날뛰었다.
"와아. 나 같으면 그냥 밖에서 야영하고 말겠다."
"그러게. 솔직히 축사(畜舍)만도 못하잖아. 이슬 피하는 게 문제야? 자다가 무너질 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암운곡. 여울나무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끝은 곧 도래했다. 제일 후미에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던 한 소년의 귓가에 그게 들린 것이다.
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숙소 문제가 해결 안 되었네?'
어제는 옛 이름을 팔아먹었고. 어디보자. 그럼 오늘은…….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온다.
천강은 바로 동료들을 지나 암운곡 제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검지를 들어 올려, 한 남자를 가리키며 까딱까딱 흔들었다.
"야, 관리자."
"야, 야?"
여울나무 쪽에 서있던 관리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도 그럴 게, 명색이 그는 마인. 지금 이곳에 모인 훈련생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짐승이다. 명백히 상하관계가 분명하단 뜻이다.
그런데 뭐? 야?
"이게 지금 돌았……."
"내가 말이야. 어제 바로 이야기 하려다가,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아서 참았거든."
솔직히 생각 외로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혼이 반쯤 나갔었다. 오늘 아침도.
그래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 딱 마침 쟤들이 기억나게 해주네?
"야. 우리 숙소, 제대로 된 거로 준비해 놔. 알았지?"
"무, 뭣?"
"아, 뭘 두 번씩이나 말하게 해? 새로 준비해 놓으라고. 제일 좋은 숙소로. 오늘까지다?"
그러고는 아랫사람 대하듯 팔을 툭툭 두드려주는 천강.
그곳에 모인 모두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요구하고 나오는 천강의 태도에 놀란 관리자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소년을 살폈다.
떳떳한 기세나 강렬히 뿜어져 나오는 기운, 그리고 자신감을 넘어 고압적이기까지 한 자세가……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니다. 마치 마두를 코앞에서 대면한 것 같은 기분이다.
"저어…… 근데 혹시 누구신지?"
"천강."
"천……강이요?"
"음? 내가 누군지 몰라?"
"예. 그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온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재 마교에서는 천강이란 이름을 쓰지 않는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흑살마신의 이름이 천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년은 뻔뻔스레 대답했다.
"그럼 네 윗대가리에게 물어봐."
"예?"
"네 윗대가리들에게 물어보라고. 마인들 중엔 너만 모르는 것 같으니까."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남자. 그 때, 얼마 전 동기와 한 잔하며 나누던 대화가 그의 뇌리를 번뜩 스쳐지나갔다.
'자네 들었나? 이번에 천마의 아들이 암운곡에 들어왔다더군. 그런데 글쎄 묵범귀영의 기록을 깼다고 하지 뭔가?'
'하! 자네도 참. 그 기록은 역대 천마들조차 못 깬 기록인데, 그게 말이 되는가? 술이나 드세.'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니깐! 지금 마교 내에서는 그 일로 인해 아주 떠들썩하다고 하더라고!'
마교에서 새 이름을 지을 때, 조교들이 애들에게 조언을 하는 몇몇 부분이 있다.
앞 글자에 '천'을 쓰지 말 것.
현재 생존해 있는 마두의 이름은 쓰지 말 것.
괜히 잘못 썼다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천강이라고? 설마…….'
관리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년을 쳐다본다. 소년이 뒷짐을 지고는 오만한 표정을 짓는다.
그 자태가 비범한 게…… 일반인과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진짜로 소, 소교주?!'
남자는 크게 놀란 얼굴로 머리를 사정없이 위아래로 조아렸다. 그들이 극진히 대접했던 투파창귀의 제자와는 완전히 급이 다른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말 그대로 차기 교주가 될 인물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천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올라왔다.
'어차피 암살자들에게도 확정적으로 시달리는 거. 가짜 신분 조금 팔아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
그렇게 이번에는 천마의 소교주로 오해받는 부분을 이용해 숙소마저도 얻어내는 천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