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9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2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95화
95화. 기술의 정체
마치 피할 곳을 알고 날아오듯, 화정마녀의 주먹이 정확히 천강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팡!
"방금은 좀 위험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손으로 공격을 막아낸 천강이 방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왈.
"그런데 역시 연화보단 못하네요. 연화는 여기서 제 볼에 타격을 먹이는 데 성공했는데."
"이, 이 버러지가……!"
맹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정마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렇지만 천강의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연화 때하고는 다르게 더 선명히 느껴지는군.'
연화는 내기 자체가 적어서 파악이 힘들었지만, 화경이라면 다르다. 특히나 지금처럼 분노가 차올라 단순해질 때에는 더더욱.
그러나 싸움에 임하는 당사자가 분석까지 하기란 쉽지 않은 법. 특히나 북명신공을 제어하느라 정신 집중이 힘든 천강은 자신을 도울 도우미들을 소환했다.
'야. 너희들이 나 대신 분석 좀 해봐. 저 기술 어떻게 사용하는 것 같아?'
- 흠. 확실히 신기하구먼. 마치 어디로 움직일지 아는 듯한 움직임이라니.
- 내지르는 주먹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 알고 내지르는 게 맞는 것 같네.
- 독심술인가?
'독심술은 아닐 거야. 지금 눈앞에 여자나 아까 꼬맹이나, 성격이 세심하진 않거든. 단순해.'
- 하긴. 성정이 이런 불같은 이들은 독심술을 익히진 못하는 법이지.
- 그럼 대체 무슨 기술인 거지?
- 일단 단순히 느껴지는 걸로 봐선 눈과 관련된 기술이에요. 다량의 기운이 눈으로 이동돼 소모되고 있어요.
그런 그때, 화정마녀의 주먹이 천강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확실히 연화와는 다르게 속도 자체가 빨라, 발놀림만으로는 슬슬 피하는 게 한계였다.
"하. 그 도망치는 잘난 재주도 슬슬 끝이 보이나 보구나!"
화정마녀의 공격이 점점 더 방어를 뚫고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미약한 통증 속에서, 그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 소년. 아까보다 눈에 더 많은 기운이 어렸어요. 확실해요. 눈과 연관된 기술입니다.
- 내 생각도 동일하네. 눈에 너무 과한 기운이 응집돼 있어.
눈이란 말이지?
신병이기들이 파악한 내기의 흐름이니 아마 정확할 것이다. 그럼 이제 부위를 알았으니, 더 나은 정보를 얻어야겠는데.
퍽. 퍽퍽퍽.
그사이 생각할 틈을 안 주겠다는 듯, 사정없이 때려대는 화정마녀. 천강은 마치 모래주머니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신나게 얻어맞기만 했다.
"공격은 전혀 못 하고 맞는 게 네 자신감의 뿌리였나? 말만 그럴듯할 뿐 아주 잘 쳐 맞는구나! 이런 게 같은 화경이라니. 쯧."
천강이 변변찮은 반격 한 번 못한 채 맞기만 하자, 그녀는 더욱 신이 나 날뛰었다.
그리고 그런 화정마녀의 도발에 천강의 안광이 일순 번뜩였다.
'도발이라?'
좋아. 응해주지. 천강의 몸놀림이 일순 곱절은 빨라지고 노련해졌다.
암운신공.
갑자기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헛손질을 시작하는 여인.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이냐?'
- 허허. 확실하군.
- 소년이여, 눈에 더 많은 내기가 응집되고 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빗나가던 화정마녀의 손길이 다시 천강의 움직임을 따라붙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피해대면 더욱 내기를 할애할 거 같더라니.'
이제는 천강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진 기의 흐름.
몸 전체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유독 눈 주위에서 조금씩이지만 더 많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질 못했다. 천강이 바라는 건, 눈앞에 여인이 사용하는 이 기술의 비밀을 파헤쳐 자신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아주 다람쥐처럼 잘 피해 다니는구나!"
훅. 오른쪽에서부터 쓸고 지나가는 매서운 손길을 피하며 천강은 생각에 잠겼다.
제아무리 화경이라 해도 이리 맹렬히 움직이면 오래 싸우지 못할 테지. 혹여나 지나가던 이들에게 싸우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곤란한 상황.
그전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주먹을 주고받는 기회가 또 온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일단 방식을 바꿔볼까. 회피할 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거야.'
회피와 방어만 일관하던 소년의 기세가 돌변했다.
파앙. 허공을 가르고 쭉 뻗어나가는 손. 가볍게 고개만을 움직여 그 일격을 피해낸 화정마녀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오. 이젠 반격도 하는 거냐?"
"화정마녀님의 한계를 봤으니, 이젠 슬슬 싸움을 끝낼 생각입니다."
"그런 건방진……!"
팡. 팡!
손과 발이 바삐 움직인다. 둘 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천강과 화정마녀는 서로 딱 붙어 공수를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로 이리저리 돌면서 공격을 서로 주고받는 두 사람.
'공격할 때와 비교해, 내기 움직임은 변화가 없군.'
대신 한 가지 다른 의문이 천강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마치 전혀 보지 못했다는 듯, 화정마녀는 천강을 공격하다가 수시로 뒤에 있던 신병이기를 가격해댔다.
지금도 마찬가지. 서로 등을 맞댔다가 떨어지는 순간 다리를 쭉 뻗더니, 기어이 천강의 신병이기 중 하나를 또 걷어찬다.
- 아 씨. 뭐야? 나 또 맞았어.
- 큭큭. 승사, 오늘 일진이 안 좋구먼.
화정마녀 본인도 그것이 짜증이 나는지, 입 밖으로 투덜댔다.
"그것들 좀 치우면 안 되겠나! 방해된다!"
그리고 그건 천강에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설마.'
천강의 몸이 검은 도포자락으로 뒤덮이듯 검은 빛깔로 물들어간다. 그것이 완전히 뒤덮이는 순간, 화정마녀의 얼굴에 눈에 띄게 당혹감이 올라왔다.
"어어?"
여인이 갑자기 허우적댄다. 마치 물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처음 무술을 배운 아이가 주먹을 내지르는 것처럼, 주먹과 주먹의 연계가 뭔가 어설프기 그지없다.
화정마녀의 공격들이 갑자기 방향을 잃고 빗나가기 시작했다.
***
독목신공.
권광투마의 선조가 만들어낸 신비한 무공으로, 간단히 말하면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가문의 비기다.
이것만 있다면 사실상 동일 경지에서는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을 만큼 매우 뛰어난 기술이었다.
상대가 어딜 공격할지, 상대가 어딜 방어할지 미리 알고 있으니 어찌 아니 그럴까?
실제로 화정마녀는 얼마 전 이 기술로 무당파 장로와 싸워 이길 수 있었다. 힘들게 이긴 것도 아니요, 가뿐한 승리였다.
그에 상대가 천마신공을 익힌 소교주라 한들, 같은 화경이라면 그 상대가 안 될 것이라 생각한 화정마녀였다.
그래. 분명 그리 생각하던 터였다.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마, 말도 안 돼! 갑자기 독목신공이 안 통해?'
보이던 상대의 흐름이 돌연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짙은 안개에 몸을 숨긴 동물처럼, 흐릿하게만 보일 뿐 어디로 움직일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았다.
화정마녀의 얼굴엔 당황감이 그득해졌다. 덩달아 그녀의 주먹에 힘이 풀렸다.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던 그 주먹에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다.
'뭐야. 왜 안 보이는 거야. 분명 보여야 하는데!'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다.
본래 이 소년이 이리 신법에 능했던가? 한 치 앞도 예상을 못 할 만큼?
화정마녀가 그리 당황하는 사이, 천강의 입가엔 진하리만치 선명한 미소가 올라왔다.
대략 어떤 기술인지를 드디어 알아챈 것이다.
'그런 거였군. 상대 몸에 있는 근육과 내기의 움직임을 읽는 거였어.'
특히 내기.
고수가 되면 될수록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에 의지를 실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보통은 어떤 행동을 취하려 하면, 몸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내기가 의지를 받들어 먼저 움직이곤 하는데……. 화정마녀와 연화는 그걸 읽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천강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신병이기들에게 물어보았다.
- 확실히 일리가 있군.
- 네, 가능성 있어요. 다만 문제는 수련 방법이네요.
그랬다. 방법은 알았는데, 문제는 수련 방법인가?
공수를 주고받던 천강이 거리를 확 벌렸다.
자신감이 떨어진 화정마녀는 그런 천강을 쫓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이쯤 하는 게 어떻습니까? 화정마녀님이 생각보다 강하셔서 저도 슬슬 지치네요."
"좆까. 끝까지 해."
"그러고 싶지만, 이곳 마교에서 모든 힘을 다 써버리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무슨 철천지원수 사이도 아니고요."
그제야 화정마녀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약해진 이들을 호시탐탐 노리며 사냥하는 종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특히 마교는 더더욱. 그녀 또한 그저 그런 놈들에게 사냥감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은 것이리라.
"근데 무승부면 내가 너흴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만?"
"대신 다른 걸 걸죠."
"흥. 아까야 네가 날 도발해서 그렇지, 지금도 그 수가 통할 것 같으냐?"
통할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왔다가 도로 삼켰다. 그 한마디면 도발은 사실 충분했으나, 이제부터는 그녀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제가 연화의 주먹을 맞고 그 기술이 궁금해졌듯, 화정마녀님도 방금 제 기술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니 매일 하루 한 번! 간단히 대련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 둘 이곳에서 같이 수련하게 해주십시오."
"흠……."
화정마녀가 고심에 잠겼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 천강에게 되물었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못 끝낸 싸움마저 해야겠지요. 제가 또 호기심을 목숨만큼이나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미친 새끼. 그래. 이왕 시작한 싸움, 끝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실패인가?
순간 그런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도 화정마녀가 흉흉한 기세를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좋다. 하루 한 번 대련. 대신, 너희는 폭포 아래쪽을 써라. 50보 거리 내로 들어오는 건 금지다."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그렇게 천강과 진악은 연화와 같은 장소에서 수련하는 것을 허락받게 되었다.
***
짙은 어둠. 습기가 자욱한 어느 공간.
두 사람이 횃불을 들고는 어둠 속을 밝히며 나아가고 있다.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던 남성이 앞서가는 동료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봐, 들었나?"
"뭘 말인가?"
"최근 요 근처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군."
"예끼, 이 사람아! 꼭 이곳을 지나갈 때 그런 불안한 이야기를 해야 쓰겄나?"
그 또한 들은 적은 있었다.
최근에 요 189번 구역에 투입된 인원들이 있었는데, 모두 실종됐고 그들을 찾기 위해 나선 이들 또한 모두 행방불명됐다고.
물론 지금 이곳과는 거리가 좀 되니 뭔 문제가 있겠냐마는, 아직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안이라 듣기만 해도 괜히 불안함이 드는 사내였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여 일 마치고 돌아가세. 괜히 늦었다가 괴기나한님께서 화 내실라."
그런데 뒤에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보게, 자네. 어디 갔나?"
없다. 아무도 없다.
각자 횃불 하나씩 들고 있었기에 뒤처졌다면 그 불빛이라도 보여야 했건만, 그의 눈앞에는 짙은 어둠만이 자욱했다.
"여, 여보게……."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때 그 심연과 같은 공간에서 남자는 문득 서늘함을 느꼈다. 온몸에 털들이 오소소 돋을 만큼, 싸한 기운.
횃불이 돌연 확 꺼진다. 이윽고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어둠 속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