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9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93화
93화. 연화의 가문비기
천강이 생글생글 웃자, 소운은 긴장했다. 순간 괜히 부탁 했나 후회가 들 정도로.
그러나 다행히도 소년이 바라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현재 암운곡 세 끼 중 고기 들어가는 식사가 한 끼인가?"
"어. 작년 가을걷이 보상으로 들어오던 거 끝나서 이제 하루 한 끼만 고기가 들어가지. 왜?"
"그럼 선배가 선배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하루 한 끼 고기 더 먹을 수 있도록 지원 좀 부탁 해줘. 선배 졸업 전까지. 그게 내 부탁이야."
천강을 바라보는 소운의 표정이 이상하다. 설마하니 그런 부탁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한 것이다.
"왜? 어려워? 하긴 돈이 좀 들려나?"
"아냐. 그까짓 거 1년 정도는 문제없어. 그런데 왜 그런 걸 바라는 거야?"
"훈련할 때 고기를 먹으면 확실히 몸에 좋잖아? 밥 먹을 맛도 나고."
순간 소운이 말이 없어졌다.
"역시 좀 어려운 부탁이려나?"
"아, 아냐. 대신, 넌 신입 문제 확실히 해결해 줘야 한다?"
"걱정 마. 내가 누구야? 나 천강이야."
잘 부탁하다며 한 차례 손을 흔들고는 사라지는 소년.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운의 얼굴엔 홀가분함과 함께 작은 미소가 올라왔다.
"참…… 보면 볼수록 멋있는 놈이란 말이야."
겉으로는 싸가지 없고, 반말 하고, 퉁퉁 거려도, 이래저래 암운곡 애들을 매번 챙겨주는 걸 보면 말이다.
막말로 이번에 소교주 교육으로 시끌시끌할 때도, 혹여나 애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지하수로로 혼자 들어가지 않았던가?
'나도 조금만 더 변해보자!'
소운은 천강을 보며 스스로 무언의 다짐을 했다.
그 사이 천강은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는 화정마녀를 만나기 전 몸을 풀고 있는 연화와 그런 그녀를 멀찍이서 훔쳐보는 소교주 진악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악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상하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네. 듣기로는 마두의 자녀라고 하는데… 무슨 특수한 기술이라도 쓴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신교에서 제일 강하다는 교주의 아들인 자신이 그리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 없지 않은가?
'분명 의춘이 내게 그랬지. 내 나이 대 중에는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간간히 찾아오셔서 천마신공을 가르쳐 주실 뿐, 실질적으로 대련과 싸움은 그를 호위해주던 이가 도맡아 했다.
그리고 그가 확언하건대, 쥐 굴과 암운곡에서 자신을 상대할 만한 적수는 없을 거라 칭찬일색을 하였었다.
그런데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의춘 녀석. 나중에 만나면 잔뜩 잔소리를 해줘야지.'
그리 마음을 먹으며 진악은 눈에 힘을 더했다. 이렇게 지켜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을 쓰러뜨린 기술의 실마리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 그때,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열 살? 동기 중에는 못 본 얼굴이니 아마 선배인 것 같다.
누군지는 몰라도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는 그에게 진악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경고를 보냈다.
"꺼져라. 뒈지게 맞고 싶지 않으면."
이 정도 살기를 보내면 충분히 이해했겠지.
그러나 꿈쩍도 안하고 대신 하품을 하는 녀석.
"야. 너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여전히 대답이 없다. 대신 뚫어져라 무언가를 쳐다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진악은 녀석이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걸 깨달았다.
"하. 너 쟤한테 관심 있냐?"
그제야 소년이 자신을 돌아봤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너 쟤 이기고 싶냐?"
"뭐?"
"너 연화 이기고 싶냐고.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냐? 하루 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훔쳐보……."
"후, 후, 훔쳐보다니! 누가 훔쳐봤다고 그래?! 그 무슨 오해 살 소릴!"
"야. 목소리 낮춰. 주위에서 진짜 오해하겠다."
"……젠장."
이쪽에 무슨 일이 있나하여 쳐다보는 인파에, 진악이 고개를 숙이고는 소년 옆에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런 그에게 소년은 고갯짓으로 연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이리 멀리서 보면 뭐가 보이나? 좀 가까이 가야 뭐라도 보이지."
"그야 그렇긴 한데……."
"그럼 가자. 내가 기회를 만들어 줄게."
"어? 어어? 야, 잠만."
그러나 성큼성큼 연화에게 다가가는 소년.
'여기는 왜 하나 같이 상대 말은 안 듣고 행동이 앞서?'
진악은 투덜대면서도 그 뒤를 따라갔다.
천강이 약 20보를 거리에 접어들었을 때, 몸을 풀던 연화가 고개가 홱 돌아봤다.
"천강?"
"여어."
"언제 왔어!"
"온지 얼마 안 됐어."
"등 뒤에 그것들은 뭐야? 내 선물?"
천강의 등 뒤에 떠다니는 검은 안개, 암운신공에 둘린 신병이기들을 본 연화의 질문에 천강은 별 거 아니라며 대답했다.
"그냥 짐이야, 짐. 그건 그렇고, 간만에 한 판 어때? 시간 되나?"
"물론!"
연화가 바로 전투를 위한 몸풀기에 나섰다.
그 대답을 엿들은 주변 아이들은 주위로 빠르게 입소문을 날랐다.
"야. 천강이랑 연화랑 한 판 붙는데!"
"정말?!"
"야, 가자가자! 간만에 쌈 구경이다!"
채 일다경(一茶頃)이 지나기 전, 순식간에 주변을 메우는 구경꾼들.
굳이 몸 풀 필요가 없었지만, 천강은 일부러 느긋느긋 몸을 푸는 척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훈련을 지도하던 교관들까지 잠시 휴식을 선언하며 구경을 오는 걸 보는 순간, 몸 푸는 걸 멈추었다.
'대략 무대는 갖춰진 건가?'
천강은 진악을 무진 옆으로 보낸 뒤, 연화 앞에 가 섰다. 연화가 검지를 치켜들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준비됐어?"
"어."
"좋아. 그럼 간다! 대신 치사하게 천마신공 쓰기 없기!"
천마신공? 그 한마디에 진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행동에 기이함을 느낀 건 천강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진악뿐만 아니라 다른 신입들 모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흡공 말하는 거냐?"
"응. 그거. 그거 쓰면 답도 안 나온다고!"
"안 쓸 테니 걱정 마라."
"헤. 그렇단 말이지?"
연화가 자세를 잡고는 천강을 매섭게 노려봤다. 제법 어린 티를 벗어낸 기세에 천강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확실히 화정마녀에게 훈련 지도를 받은 영향인지는 몰라도, 많이 늘었네.'
자, 그러면 한 번 보여줘 봐. 대체 어떤 기술인지 한 번 알아보자.
파앙.
연화의 신형이 쏜살같이 뛰어왔다. 천강은 암운행보나 내기운용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하게 근육만으로 몸을 움직였다.
'일단 속도는 조금 빨라진 정도인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소교주의 쾌검들을 다 피했…….
그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퍽.
"말도 안 돼!"
"연화의 주먹이 천강의 얼굴에 닿았어!"
전생에 천강은 신법, 보법을 따로 배우질 못했다. 그래도 몸으로 수없이 체득한 게 어딜 가진 않는 법.
상대의 공격을 보고 본능적으로 경우의 수를 추리는 천강의 경험치는 그를 수많은 암살자의 손에서 구해주었고, 마두들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에 암운곡에서 애들이 펼치는 공격이야 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연화의 주먹이 천강의 예측을 벗어나 날아왔다. 분명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야 할 주먹이 천강의 볼을 때린 것이다.
"헤헷. 내기도 운용 않고 설렁설렁했다간 진다, 천강?"
"……새로운 무공을 습득했나보네?"
"응. 얼마 전부터 화정마녀 언니가 찾아와서 우리 가문비기를 전수해주고 있거든."
가문비기? 그것이었나.
천강은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상대의 경험치를 압살하는 기술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무공이란 말인가!
"근데 주먹 자체는 물주먹이 다 됐네?"
"응?"
"주먹이 너무 약해서 맞은 줄도 몰랐다."
"이익! 다칠까 봐 내가 힘 조절 해줬더니!"
"야. 힘 조절해줄 상대가 다 있지. 그런 식으로 해서 죽기 전에 날 한 번이라도 이길 수 있겠어?"
"천강, 너어……!"
연화가 볼을 부풀리더니 매섭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소녀의 양 주먹에는 검은 내기가 어려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며 날아드는 주먹 난타!
그 속에서 천강의 눈은 본인도 모르게 점차 크게 뜨이고 있었다.
'정말 흥미롭군. 마치 내가 피할 움직임의 방향을 예측이라도 하는 듯한 반응이야.'
순간 독심술이라도 익혔나란 의문이 들었으나, 연화라는 애를 보고는 그 가능성을 묵살했다. 저 성격에 독심술이라니…… 가능성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피하는 건 불가능. 막아도 막지 못하게 정확히 주먹을 꽂아 넣는다라…….'
그럼에도 천강에겐 이렇다 할 타격을 못 먹이고 있었으니, 인간의 관절은 참으로 신비로워 살짝 비튼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방어할 위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뭐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헉. 허억. 천강!"
"왜?"
수백 번의 주먹을 쉬지 않고 내지른 탓에 지쳐버린 연화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수련을 한 거야. 왜 더 괴물이 됐어!"
"괴물이라니?"
"너 나랑 싸울 때 내기 요만큼도 안 썼잖아!"
그 한마디에 좌중으로 술렁임이 일었다. 연화는 내기로 신체강화를 한 뒤 내가중수로 타격을 가하는데, 정작 천강은 내기운용을 하지 않았다니?
"심지어 너 때리는데 마치 쇳덩어리 때리는 것 같아. 내 주먹이 더 아프다고!"
천령초의 영향이었다. 천강은 천령초의 효과가 생각보다 더 대단하단 것을 깨달았다.
"그럼 역할을 바꿔볼까? 이번엔 내가 공격한다."
"자, 잠깐. 나 숨 좀! 후욱. 후욱."
재빨리 산소 공급을 하는 연화. 어차피 이기는 게 이 싸움의 목적이 아닌바, 천강은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연화를 향해 공격을 감행했다.
사삭- 사사삭-
접근해도 도망가지 않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주하는 소녀.
'오호. 이것 봐라?'
천강은 곧바로 손을 내질러, 그 자신감을 확인해 보았다.
'과연……. 다 피한다 이 말이지?'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매우 빠르게. 다양한 속도와 공격방법으로 공격을 가한다.
그에 따라 몸을 요리조리 내빼는 연화를 보며 천강은 조금씩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연화의 기술에 대한 확신을.
'내 팔이 뻗어 나가기도 전에 벌써 몸을 움직인단 말이지?'
즉 상대가 어딜 공격할지, 어디로 피할지 미리 알 수 있다는 뜻. 천강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올라왔다.
"어? 더 안 덤벼?"
"응."
"아, 왜! 더 덤벼! 너 아직 내기도 안 썼잖아!"
"쓰면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너랑 나랑 싸워서 내가 이기는 건 여기 있는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윽……. 그건 그렇지."
"근데 실력 많이 늘었네, 연화."
"헤헷."
천강의 칭찬에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싸움이 일단락되자, 구경하기 위해 모였던 이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두 사람의 대련을 통해 본인들이 깨달은 걸 잊기 전 확인하려는 것이다.
연화도 이마에 땀을 닦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훈련하러 가는 거야?"
"응. 화정마녀 언니랑 밖에서 따로 훈련해."
"그래? 그럼 나도 따라가도 돼?"
"날?"
"어. 다음 경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혹시나 화정마녀님과 너 수련하는 거 지켜보다 보면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천강의 속 보이는 말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진악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무림인은 자신의 수련과정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나 가문의 무공이나 비기 같은 거라면 더더욱.
"야, 지금 그게 통할 거라고 말을 한 거야?"
"넌 가만 있어. 너도 꼽사리 껴줄 테니까."
"아앙? 무, 뭐래! 내가 너희들 일에 왜 껴? 참네."
"왜? 싫어?"
"……아니."
그 사이 곰곰이 고민에 잠긴 소녀.
그러나 진악 말대로 연화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진짜로 거절한다.
"천강, 미안! 화정마녀 언니가 싫어할 것 같아!"
"킥킥. 그럼 그렇지.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이제 어쩔 거냐는 듯 천강을 바라보는 진악. 천강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것 참 아쉽네. 난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는데, 연화, 넌 내게 그 조금도 안 해주다니."
"선물? 뭔데?"
"방금 내가 오면서 소운 선배에게 부탁 하나 했거든. 요새 연화가 좀 살이 너무 빠진 것 같다. 보기 너무 안 좋다. 그러니 하루 한 끼 고기 식사 늘리자."
"정말로? 꺄악! 천강 고마워!"
"그런데 그거 취소해야겠네."
"에?"
신이 나 방방 뛰던 소녀의 눈이 거칠게 흔들거렸다.
천강이 그동안 겪어본 바에 의하면, 연화에게 고기는 절대적이었다.
마인들은 저마다 병적으로 한 가지씩 이상증세를 달고 사는데, 연화 같은 경우에는 그게 바로 식욕. 고기인 것이다.
'나중에 화경 달고 나면 어느 정도 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증세와 욕망을 떨치기 어렵지.'
천강은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없던 일로 하자고 해야겠다. 소운 선배! 소운 선배!! 어디 있…… 읍읍."
"천강. 죽고 싶어? 좋은 말로 할 때 나 따라와."
얼씨구. 태세전환보소.
"대신, 고기 취소 안 하는 거다. 약속한 거야?"
천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한없이 진지하던 연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얏호! 하루 세 끼 중 두 끼가 고기!"
참나. 그리 좋을까.
아무튼 이로써 연화의 기술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판은 깔렸다고 봐도 좋으리라. 연화는 어서 가자며, 천강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쭉쭉 이끌었다.
"천강,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고기를 물어다 준' 날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러나 대답은 활짝 웃으며 맞받아주기.
"암! 알지알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악의 얼굴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올라왔다. 그는 천강의 손짓에 넋이 나간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