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9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92화
92화. 암룡
오룡대.
화경 고수 다섯으로 이루어진 특수집단.
응당 어느 무림 고수건, 수련을 하다 진전이 더딜 때면 잠시 딴 길로 새곤 한다. 옆의 놈도 후계를 키우는데, 나도 후학이나 한번 키워볼까 하는 그런 순간이 말이다.
화경의 끝자락에 도달했던 만천옥주도 그러했다.
그에 재능이 보이는 다섯 아이를 모아 키웠으니, 그게 바로 오룡대였다.
다만 열다섯 즈음 되는 아이들을 모았기에 개성들이 다 달랐고, 싸우는 방식 또한 만천옥주 본인과도 꽤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티격태격 싸울지언정 서로를 굉장히 아낀다는 점이었다.
그랬기에 만천옥주와 오룡대, 그리고 그 세력 전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암룡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생각으로 그득했다.
'다 죽인다.'
오룡대를 죽인 도패천황.
만천옥주와 그 외 사람들을 죽인 투파창귀.
비록 도패천황은 죽었지만, 그 일을 시킨 흑도마황은 그 피 값을 대신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을 죽인 투파창귀와 그 집단도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
'남은 생…… 내 칼끝은 여울나무를 향하리라.'
어둠 속에서 암룡의 눈이 강하게 번뜩였다.
그러려면 일단 여기를 탈출해야 하는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어둠 속으로 쇠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약재 냄새가 은은히 풍겨온다.
'창고……인가?'
몸 상태를 확인해 봤다. 손은 손끼리, 발은 발끼리 묶여 있었다.
점혈이 되어 있을 뿐, 그 외에 별다른 조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내기도 어느 정도 모였으니, 점혈을 풀고 도망가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 탈출을 감행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온다.'
점혈을 풀고 도주를 시도할 것이냐, 아니면 얌전히 있다가 상대가 돌아간 후의 기회를 노릴 것이냐.
고민은 찰나에 불과했다. 기감이 밝은 그녀는 적이 보통 인물이 아니란 걸 파악했고, 곧바로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했다.
벌컥.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온다.
"일어났군."
"……."
"밥은…… 먹지 않은 건가? 먹어두는 게 좋았을 텐데. 도망갈 기회라도 노리려면 말이야."
일귀의 예리한 정곡에 암룡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귀는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들었다. 말을 못 한다고?"
끄덕.
암룡 그녀는 어려서부터 벙어리였다. 그에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 말을 듣고는 암룡의 팔을 풀어주는 일귀. 암룡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뭘 놀라고 그러지? 스스로 점혈도, 이 포박도 풀 수 있지 않았나?"
[ 원하는 게 뭐지? ]
슥슥. 암룡이 바닥에 글자를 적는다. 그걸 본 일귀가 대답했다.
"복수를 원하나?"
"……."
"그렇다면 네가 아는 걸 다 불어라. 우리 주군께 네 몸을 의탁하고 협조해라. 주군은 거래나 약조를 하면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 네 복수 또한 이뤄주실 것이다."
[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내 복수는 절대 쉽지 않다. ]
"주군은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 말하는 일귀의 눈엔 확신이 그득했다. 무영삼귀 자신들과의 약속도 그렇고, 교주와의 거래 건도 그렇고.
일귀가 아는 그의 주군은 신의라는 게 있는 분이었다. 능력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암룡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내 복수를 이뤄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교주뿐이다.'
정파나 사파는 애초에 이곳까지 진입도 힘들고, 자신들끼리 밥그릇 싸움하기 바쁘다. 무엇보다 여울나무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큰 세력은 교주 세력뿐.
[ 거절한다. 난 교주 쪽으로 가겠다. ]
"쯧쯧. 멍청한. 기회를 줘도 못 누리다니……. 좋다. 가라."
그러고는 진짜로 암룡의 속박과 점혈을 모두 풀어주는 일귀.
"……."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숲 안의 어느 작은 거처였다.
따스한 햇볕과 숲의 녹음, 마당의 채소들. 암룡은 순간 이곳이 자신이 알던 천산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치 그 속을 들여다보듯 일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저쪽으로 쭉 나아가면 아는 지형이 나올 것이다. 가라."
암룡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허공에 글자를 새겼다.
[ 정말인가? 이대로 보내준다고? ]
"그래."
사실 이리 행동하는 일귀도 속으로는 좀 복잡했다.
천강이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이게 정말 잘하는 선택인지 확신이 안 선 것이다.
'교주 쪽으로 간다는 건, 언젠가는 우리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뜻.'
그런데 주군께서는 대체 왜 이런 도박을 하시는 건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면서도, 일귀는 주군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시키는 일에 성실히 임했다.
"의아함이 들겠지. 그러나 이게 주군의 뜻이다. 네게 제안을 한 번 해보고 거절하면 그냥 보내주라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암룡의 얼굴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잘 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 지도. 그러니 회유하려 했겠지.
그런데 그냥 보내준단다.
무림에선 자기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적이 되는 법인데……. 특히나 마교는 거의 그게 확실시되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진짜로 이대로 보내준다고?'
고문 같은 것 없이 자유를 얻은 건 매우 기쁜 일이나, 도리어 그러한 부분들이 암룡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보내주겠다고 말을 했는데도 쉬이 발을 움직이지 않는 암룡을 보며,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일귀는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이 어딘지 아나? 오목골이다."
어? 오목골이라면……?
"내 주군은 흑살마신이시지."
"!!"
흑살마신.
50여 년 전, 마교의 간악한 무리를 일거에 소탕한 인물.
수십에 달하는 마두들과 수천에 해당하는 배신자들을 단신으로 처리한 그의 행적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설로 취급된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기경만회가 이루어지는 마을 중앙에 마교를 빛낸 인물들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
그게 바로 흑살마신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가 섬기는 주군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암룡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서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일귀에게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과거 여울나무가 지금보다 더 컸을 시절에도 흑살마신은 혼자서 놈들을 처리했다.
지금도 여울나무에서는 흑살마신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 정도로.
그랬기에, 복수를 이루는 데에는 어쩌면 교주 전체 세력보다도 흑살마신 하나의 가치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었다.
"가라. 왜 안 가고 있지?"
어서 가라며 채근하는 일귀.
그러나 가지 않는다. 제자리에 서서 우물쭈물한다.
"뭐하나?"
[ 너희 주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주군께선 지금 바쁘시다."
[ 그렇다면 그 제안에 응하고 싶다고…… 전해줬으면 한다. ]
"주군께선 단 한 번 제안하라 하셨고, 넌 그걸 거절했다. 그러니 거래는 끝이다."
[ 그런. ]
눈에 띄게 당황하는 암룡.
그러겠지. 엄청난 존재와 성사될 수 있었던 계약을 제 손으로 내던진 셈이었으니.
[ 혹시 다른 방법 없나? 조언을 해줬으면 한다. ]
"흠. 뭐……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 뭐지? ]
암룡의 급박한 손짓에 일귀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주군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한번 해봐라. 그럼 주군께서 네 일을 도와주실지도 모른다."
[ 정말로? 그렇다면 나 또한 흑살마신 그분을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 ]
"그런데 문제는 너의 뭘 보고 받아들이실까?"
그러자 암룡이 눈을 빛내며 손을 움직였다.
[ 걱정 마라! 내 가치는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
그러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하는 그녀.
아까만 해도 교주 쪽으로 달려가려던 녀석이 이젠 도리어 써달라고 역으로 매달리는 행태에, 일귀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며 그녀를 자신들의 숙소로 인도했다.
***
"……하여 주군께 충성을 바치길 원하고 있습니다."
"잘됐네."
일귀의 보고에 천강이 고개를 주억였다.
자고로 정보를 수집해오는 인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실력까지 있다면 더더욱.
만천옥주의 핵심 인력 중 하나가 들어온 것만으로도 앞으로 마교 내에서의 일이 훨씬 수월해지리라.
"정말 잘했다. 수고 많았다, 일귀."
"아닙니다. 전 그저 주군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 둘 다 잘한 걸로 하자. 일단 암룡 걔는 걔가 하던 방식으로 움직이게 놔두도록."
그래야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 테니.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창고에 괜찮은 암기들이 있는데, 원하는 거 몇 개 가져가라 하고. 당가 놈들이 신경 써 만든 거라 쓸 만할 거야."
"예."
"그래. 그럼 이만 가봐."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는 일귀가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천강 또한 지하수로 물속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그럼 어디 이제 궁금증을 풀러 가 볼까나.'
어둠 속 물속을 유영해 불빛이 은은히 비춰오는 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사백동굴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천강을 보고는 좋은 아침이라며 하나둘 인사를 하는 아이들.
내기로 물을 팡팡 털어내고 있으니, 기다렸다는 듯 한 소년이 천강에게 다가왔다. 그는 5년차 대표 소운이었다.
"여어. 선배 오랜만."
"천강, 오랜만이다! 요새 얼굴 보기 왜 이리 힘드냐?"
"나야 요 근래 바쁘게 움직일 일들이 좀 있었어. 요즘 마교가 꽤 살벌하거든."
천강의 말에 소운이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그거 말하는 거지? 다 큰 어른들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는 네 위치 물어보는데…… 어휴. 진짜 뭔 일 일어날까 싶어 애들이랑 한동안 숨죽이고 있었다, 진짜."
"별 일은 없었고?"
"그거 외엔 딱히 없지. 그냥 신입 교관들이 들어온 정도?"
"교관들은 어떤데?"
"그냥 그래. 이전 교관들보단 못하지. 뭔가 애정도 없고. 아무튼 좀 그래."
역시나……. 매수돼 들어온 이들은 이래저래 다 티가 나는구나.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시기적절하게 잘 왔다, 천강."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딱 봐도 고민 가득한 얼굴. 소운이 주변을 한번 슥 훑더니 말을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이 있는데 아주 죽겠다."
"어떤 면이?"
"실력은 있긴 한데 아주 싸가지가……."
"싸가지가 많이 없나 봐? 나와 비교하면 어때?"
"말도 마. 너는 그래도 맞는 말만 하는데다가 융통성이라도 있지. 걔는 뭔가 갑갑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손 한 번 봐주면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듣기로는 연화한테 한 번 탈탈 털렸다면서? 그런데도 그래?"
"어. 연화 말만 좀 듣지 아주 막무가내야."
역시나. 그 버릇이나 성격이 쉬이 바뀔까.
"그럼 소운 선배가 힘 좀 써보지 그래? 옛날처럼?"
천강이 웃으며 농을 건네자, 소운이 손을 흔들었다.
"야야. 나 이제 그런 불량한 짓 손 뗐다. 애들 지도해주기도 바빠. 나 훈련하기는 더 바쁘고. 무엇보다 고작 1년차 녀석에게 5년차가 나서봐야 뭐가 살겠냐. 나 떠나고 나면 그대로지."
"그것도 그렇긴 하네."
꽤나 설득력이 느껴지는 게 경험담인 모양이다.
아무튼 소운의 부탁에 고민에 잠긴 소년. 천강은 일부러 고심이 된다는 듯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러자 그 앞에서 소운이 두 손을 모아 제발-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사람 참 좋아졌다니깐. 그 누가 상상이나 할까. 눈앞에 이 소년이 작년까지만 해도 암운곡에서 제일 나가는 망나니 중 망나니였단 사실을.
"좋아."
"오오! 천강, 정말 고맙다!"
"대신 조건이 있어."
"윽……. 그럼 그렇지. 뭔데?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라면 내 다 들어주마."
"별로 어려운 건 아냐.
소운을 바라보며 소년이 생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