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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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83화
83화. 선전포고
"소년……."
무저갱 밖. 한 나무 아래, 거구의 사내가 두 손을 모으고 있다.
그는 비통한 얼굴을 하며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주섬주섬 꽃 하나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이름은 듣지 못하였지만, 너의 선행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 선계에 올라가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사내가 합장을 했다.
"그러니 편히 가거라."
딱 그렇게 예를 올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응? 누구 죽었습니까?"
"으헉?! 너, 너어……."
죽은 줄로 알았던 소년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금나한은 소년에게 크게 호통쳤다.
"크흠! 넌 대체 생각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저 위험한 곳에 뛰어들다니!"
그러나 말은 그리해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혹시나 다친 덴 없나 살피는 거구.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그의 행동에 천강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왠지 금나한 님께 부탁해도 허락해 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당연하지! 그 위험한 곳을! 다친 덴 없느냐?"
"예. 다친 데 하나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후우. 그것 참 다행이구나."
야차와 같은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는 천강을 점잖게 타이르며 말했다.
"듣거라. 지금 네겐 천령초 캐는 일은 이르다. 조급해 하다 목숨을 버리지 말고, 몇 년 꾸준히 수련을 한 뒤에 다시 오거라. 아직 어리니 너라면 10년 정도면 능히 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 대신 배시시 웃는 소년.
"왜 대답을 안 하는 것이냐. 어서 대답을 하거라!"
그때 천강이 보따리를 들어보였다.
뭔가 하여 안을 들여다보는 거구의 사내. 이내 눈이 크게 뜨인다. 그 안에는 붉은 빛깔의 식물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금나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 대체 어떻게……. 무저갱은 숙달된 인도자가 함께하여도 그 목숨을 보존받기 힘든 곳이거늘!"
제 아무리 고수라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
현경조차도 저곳의 비밀을 아는 순간, 선뜻 그 안에 들어서길 꺼려한다. 이천 년의 세월 동안 그런 이들을 수도 없이 봐온 그였다.
그런데 이 소년은 꺼려하기는커녕 도리어 뛰어 들어가더니, 기어이 결실을 맺어 돌아왔다.
'지금껏 이런 인간을 본 적이 있던가?'
없다. 이곳을 지키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소년만큼 용기 있고 능력 있는 자를 보지 못한 금나한이었다. 그에 그는 진지한 얼굴로 소년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천강입니다."
"그래, 천강. 내 너의 이름과 용감함, 그리고 네가 베풀어준 선행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혹여나 선계에 가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천강을 세워놓고 한참을 칭찬 일색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팔불출 아비와 같았다.
"그런데 왜 이리 늦은 것이냐? 낮에 보여준 속도로는 금방 갔다 올 수 있었을 텐데."
"아. 중간에 이상한 놈을 만나서 고생 좀 했습니다. 얼핏 금나한 님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놈들이었는데……."
천강은 자신이 만났던 기괴한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막 자신을 도와주면 천령초를 채취해 넘겨주겠다고 하는데, 그 입을 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장사치와 같았습니다."
"후우. 놈들을 만나다니. 무사히 빠져나온 게 천만 다행이구나."
"대체 놈은 대체 뭡니까?"
"그것들은 지옥의 아귀들이다. 이곳에 수감된 이들을 찾아 먹어치우는 게 놈들의 행복이지. 수감자들에게 그들은 상위 포식자와 같다. 이곳에 발을 붙이는 한 그 자랑하던 내기는 전혀 쓸 수 없으니까."
그는 천강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놈들은 영악하기까지 하다. 연기는 물론 말을 아주 잘하는데, 그로 인해 처음 그곳에 발 들인 자들은 뭣 모르고 놈들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왜 그런 것들이 이곳에 있는 겁니까?"
전생에도 본 적 없는 놈들이다. 나름 스승님과 이곳저곳을 다 돌아다녀보며 기이한 영물들도 많이 봐온 천강이었지만, 저런 것들은 난생 처음 보았다.
"천산은 선계와 지옥이 미약하게나마 연결된 곳이니라.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들이 따라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지."
천강은 그 뒤로도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확실히 그는 인간이 아니었던 듯 여러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중에는 분명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천산 어딘가에 선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요?"
"그렇다. 한 번 찾아보거라. 대신 그 전에 현경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지금 네 경지로는 들어서는 순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니라."
선계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그저 그곳을 한번 엿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운이 좋다면 신선의 경지도 노려볼 수 있겠지. 암. 너라면 필히 가능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금나한 님."
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떠나야할 시간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고기와 술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크흠.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금나한 님께 이야기를 듣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흠흠. 그렇다면야."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꼭 사람만 그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늘 이곳에 혼자였던 금나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음식까지 베풀어주는 소년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그에 그는 천강에게 손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오늘 음식 빚은 추후 어떤 식으로든 갚도록 하겠다. 꼭 다시 오거라!"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천강은 절벽을 올랐다. 소년은 내려올 때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
똑. 또옥.
천정에서부터 밑으로 떨어지는 여러 물방울들.
그것들은 흐르는 물 위에 안착해 약간의 파문을 일으키다, 이내 그 흐름에 순응해 조용히 사라졌다.
암운곡 인근 지하수로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어떤 면에선 마두급 실력자들이 맞붙었으니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몰랐다.
무려 여섯 존재의 치열한 생사투.
만약 이곳에 천산의 영기가 흐르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암석이 다른 일반 암석에 비해 훨씬 단단하지 않았더라면, 지하수로는 진즉에 무너져 이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매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음에도, 지하수로로 들어선 이들 중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고작 한 명뿐이었다.
찰팍. 찰팍.
지하수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벽에 손을 짚으며 나아가는 남자. 그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를 내려 보더니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체력소모가 심해 일단은 이곳에 놔두고 다음에 되찾으러 올 생각이었다.
"버러지들이 발악을 하는 바람에……."
그의 온 몸은 검상으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마지않는 그의 잘난 얼굴에도 길게 검상이 두 개 그어져 있었다.
남자는 몸 안에 남은 쥐꼬리만 한 내기를 운행해, 출혈을 늦추었다.
"소교주는 다음에 와서 잡아야겠군."
거센 물살에 절뚝이며 그렇게 상류로 고요히 나아가는 그 때였다.
돌연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도패천황은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상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설마…… 이 모든 게 당신의 계략입니까?"
어둠 속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가벼운 바람소리가 나직이 돌아왔다.
그대로 날아가는 남자의 머리.
며칠 후. 마교는 떠들썩해졌다.
"이보게! 이보게에에!"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인가?"
"자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구만!"
헐레벌떡 객잔으로 뛰어 들어온 동료의 얼굴을 보고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인은 재빨리 술 한 잔을 주문해 그에게 내밀었다.
"하하핫! 역시 자네가 최고일세! 내 제일 먼저 자네에게 뛰어오길 잘했구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런가?"
"자네, 얼마 전 소교주 확정나면서 사람들이 대거 암운곡으로 몰려간 건 알고 있지?"
"그렇지. 그것도 자네가 제일 먼저 알려주지 않았나? 하핫."
"이번엔 그것보다 더 엄청난 소식일세!"
마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느 정도 소식이기에?
"아니, 글쎄……. 소교주를 어떻게 해보려고 들어갔던 사백여 명이 모두 시체로 발견이 되었다는 거 아닌가!"
"그, 그게 정말인가?! 말도 안 돼. 그 안에 오룡대가 참전한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닐세. 그 안에서 흑도마황의 제자 도패천황의 사체도 나왔다더군!"
쾅. 뒤로 넘어간 의자가 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의 동료는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이보다 더 했으니까.
"마교 서열 19위가 열한 살짜리 소교주에게 역으로 당했단 말인가!"
그 소문은 마교 곳곳으로 파다하게 번져나갔다.
저 위에 자리한 마교의 수뇌부들에게도.
"소교주의 실력이 생각보다 상당한가 보오."
"어쩌면 초절정이 아니라 화경일지도……."
그러나 만천옥주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흥. 허튼 소리!"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날아가는 이 마교에서 구르고 굴러 현경을 달고 무려 서열 3위까지 오른 자신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꼈다.
'분명 중간에 누군가가 개입한 게 분명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흑도마황 놈의 제자도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물론, 오룡대와 녀석이 서로 싸우다 자멸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려 화경끼리의 싸움이다.
상처를 내기로 지혈해 하루도 거뜬히 버텨내는 화경급 이상의 싸움에서는 자멸이라는 선택지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내력 싸움.
'하지만 5대1의 싸움이었으니, 말도 안 되지.'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건, 싸움이 다 끝나고 소교주가 나타나 그 목을 쳤단 이야기인데…….
아직 초절정밖에 안 된 꼬맹이가 화경을 쓰러뜨린다? 도리어 반탄강기에 얻어맞고 내상을 입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싸움은 일어날 수 없다.'
오룡대는 싸움에 미친 자들이 아니다. 피를 보는 걸 즐길지언정, 불리한 싸움은 절대 하지 않고 피하는 게 그들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모두 죽었다는 건, 하나.
'분명 누군가 끼어들었다. 오룡대나 도패천황을 압도할 수 있는 실력자가.'
하나 같이 발재간이 빠른 오룡대가 도주도 못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설마 암운사신이?'
그런 그 때였다.
싸아아-
스산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고개를 든다. 고요하다. 건물 내로 쥐 죽은 듯 적막감이 흐른다.
순간 머릿속에 드는 불편한 상상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 오너라, 연오야!"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밖으로 나가려는 그 순간, 갑자기 저 멀리서 흉흉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더니, 서서히 열리는 문.
툭. 데구르르.
열린 문틈 사이로 무언가 굴러들어온다. 사람 머리인데 낯이 익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만천옥주가 분개해 기염을 토해냈다.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방에서 수천 개의 구슬들이 날아든다. 그것들은 이내 만천옥주의 주변에 모여들어 빼곡히 진을 형성했다.
무려 현경이 내지르는 분노에 건물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크게 흔들거렸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이 된 상대는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팔을 들어올린다. 그의 몸에 매달려 있는 악기 하나가 빠져나와 그 손 위에 안착한다.
"어땠는가? 선전포고로는 적당하지 않았나?"
"암운곡 일도 네놈 짓이었구나, 투파창귀!"
"크크. 그래. 그동안 서로 눈치 보느라 못한 싸움, 슬슬 끝낼 때도 됐지. 안 그런가?"
"이노오옴!"
만천옥주에게서 수천 개의 구슬이 일제히 쏟아져 나갔다. 그 하나하나에는 두터운 성벽마저도 관통시킬 무시무시한 내력과 살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걸 마주하는 투파창귀의 얼굴엔 그저 미소가 그득했다.
쿠구구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