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8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2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80화
80화. 저주받은 땅
"컥……. 대, 대체 왜……?"
한 남자가 오른팔을 부여잡고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 앞에는 머리를 말꼬리처럼 묶어 늘어뜨린 여인이 서서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아. 그냥. 눈에 거슬려서?"
푸확. 붉은 핏줄기가 머리 위로 솟구친다. 남자의 목을 자른 여인이 건곤권을 회수해 흐르는 물에 슥슥 씻어냈다.
"정말이지, 쓰레기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어. 퉤."
그녀는 음룡. 오룡대의 일원으로 뒤늦게 지하수로에 들어오는 떨거지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상류에서 거구의 남자가 다가왔다.
"지룡. 도망간 놈들은 다 처리한 거야?"
"그래. 이쪽도 막 끝난 모양이군. 다친 곳은?"
"내 실력 알잖아? 이런 놈들 천 명이 덤비다 한들 나에겐 상대가 안 된다고~"
"분명 화경급 고수도 하나 끼어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 화경이라고 다 같은 화경인 줄 알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6살에 무공에 입문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는 음룡의 행태에, 지룡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한 번 제 자랑을 시작하면 반 시진은 훌쩍 넘기곤 했다.
그런 그 때였다. 소교주를 암살하기 위해 하류로 갔던 동료 셋이 그들에게로 되돌아왔다.
"응? 천룡? 왜 돌아와?"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다."
"뭐? 함정? 그게 무슨 소리야?"
음룡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자, 그 옆에 서있던 광룡이 추가 설명을 보탰다.
"이무기가 살고 있다."
이무기? 그 대답에 지룡과 음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밑에 이무기가 살고 있다. 먼저 내려갔던 이들은 다 죽은 상태다. 우리 모두 그 열한 살짜리 소교주 놈에게 단단히 낚인 것 같다."
"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 천산에 이무기가 살고 있다니……."
이무기는 전설 속의 영물. 보통 이무기를 마주친 인간은 열에 아홉은 죽는다.
그래서 보통은 멀찍이서 그 덩치와 길이를 본 생존자들이 남긴 자료가 대부분인데, 다른 천년 묵은 뱀들보다 유난히 덩치가 큰 흑사는 그 덕에 이무기로 오인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몸짓 한 번 한 번에 급류와 파도를 일으키는 그 행태를 본 그들은 녀석이 이무기임을 더욱 확신했다.
"나 이무기는 한 번도 못 봤는데. 천룡, 나 잠깐 구경 다녀와도 돼?"
"아니. 우린 이대로 복귀한다."
"쳇. 그런데 진짜 이대로 복귀할 거야? 만천옥주님 화내실 지도 몰라."
"속은 게 거의 확실시 되는 이 시점에서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다. 나중에 다시 오더라도 정보의 진위부터 확실히 하고 온다."
그 말에 지룡이 물었다.
"혹시 아까 그 아이들이 거짓을 말한 건 아닐까? 어찌됐든 같은 동료. 뭔가 좀 켕기네만."
"사실 나도 그 생각을 좀 했다."
"그럼 돌아가서 몇 놈 붙잡고 고문이라도 하는 게 어때?"
그러나 반대하고 나서는 광룡.
"그 사실이 외부로 드러났다간 우리 모두 모가지다."
"에이. 안 들키게 하면 되지? 우리가 그런 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건곤권을 매만지며 음룡이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지휘자인 천룡은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고 생각하지."
그렇게 다섯 명이 상류로 올라서려는 그 때였다.
고오오-
상류로부터 거대한 존재감이 밀려들어온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을 돋게 하는 짙은 살기에 오룡대 전원은 무기를 움켜쥐고는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천룡, 혹시 이런 일에 현경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있어?"
"음룡. 호들갑 떨지 마라. 딱 봐도 현경은 아니다."
"아, 거참. 누가 모른데? 긴장감 풀어보려 한 한마디에 잘난 척 참 오지네, 지룡 새끼."
그리고 드러난 상대. 그는 자신의 몸통만한 두께의 도를 지닌 미안(美顔)의 남자였다. 그를 본 음룡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늘도 참으로 멋지시네요, 도패천황님. 산보 나오신 건가요?"
"그대들이었나, 바깥의 일은?"
"에이. 왜 우리들이라고 생각하시죠?"
도패천황이 등에 멘 도를 풀었다. 그로 인해 오룡대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건방지구나.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저희 아니네요. 그리고 설령 저희라고 쳐도,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요?"
"있지."
남자가 도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응집되는 강력한 기운에 흘러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그는 도를 휘두르며 나직이 외쳤다.
"적어도 명분은 서니까."
멈추었던 물줄기가 강력한 바람과 함께 뒤엉켜 쏘아져 나간다. 그것은 이내 용 형상을 띠더니, 지하수로 전체를 가득 메우며 오룡대를 향해 쇄도해 나갔다.
쿠구구구구.
"젠장! 넷 모두 내 뒤로 붙어서 엄호해!"
두 현경의 최고 전력이 암운곡 지하수로에서 맞붙었다.
***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구덩이 앞으로 한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다.
때 아닌 때 고비를 마주한 천강이었다.
'하필 내기를 사용할 수 없다니.'
몸을 내려다본다.
아직은 고사리 같은 손. 작달만한 팔다리. 근력을 발휘하기엔 왜소한 몸뚱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한 열다섯 정도만 되었어도 시도해 보았을 텐데.'
천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무저갱 안쪽을 들여다봤다.
연기 사이사이로 비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 멀리 붉은 기운이 언뜻 보이는 걸로 봐선, 한 마장도 더 되어보였다.
자리를 이동해, 이번에는 끈이 매달려 있는 곳으로 가봤다.
지상 한쪽 바위에 동여매져 있는 동아줄이 툭 튀어나온 절벽까지 쭉 이어진 뒤, 이후엔 밑으로 늘어져 있다.
절벽으로부터 제법 거리가 돼, 암석의 영향을 받진 않을 듯하다.
'줄을 타고 내려가도, 반 시진은 더 내려가야 한다라…….'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근력을 사용하지 않고 올라올 방법이.
천강은 혹시나 하여 품에서 천해지경을 꺼내 물어보았다.
"혹시 무저갱에 대해 아십니까?"
『무저갱은 천산에 자리한 깊은 구덩이다. 그곳은 일 년 내내 사기(死氣)가 그득해, 사람이 살기 어려우며…….』
"잠깐만요. 그 이야기는 무저갱에 대해 아신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그럼 혹시 무저갱에 내려갔다 올라올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부터 준비한다면, 5년 안에 오르내릴 수 있는 근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5년간 준비할 여유 없습니다. 당장 쓸 요행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침묵하는 천해지경.
이런……. 너무 어려운 요구였나?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백지 위로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무저갱은 저주받은 땅이다. 그곳의 암석은 기운을 어지럽히고 난잡하게 만든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오오! 천강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천해지경 왈.
『신체가 벽에 닿지만 않으면 된다.』
아…….
"그걸 누가 모릅니까!"
무슨 대단한 방법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네.
소년이 쓰러지듯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비급서가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며 천강을 내려다보았다.
'참 신기해. 어떻게 지 혼자 날아다니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잠깐. 날아?"
***
소년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금나한은 하품을 하며 그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대체 뭐하는 거지?"
하는 짓으로 봐선 포기한 것 같진 않은 상황.
그에 그냥 한마디 하고 쫓아낼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그 때, 갑자기 소년이 다가와 그의 앞에 무언가를 펼쳐놓았다.
"응? 이것은 뭐냐?"
"고기와 술입니다."
"나도 눈이 달려있으니 무엇인지는 안다. 그런데 왜 네 것을 내 앞에 펼쳐놓느냔 의미다."
군침을 흘리며 그것들을 바라보는 거구의 행태에 천강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천산의 보고로 돌아가서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금나한 님께서는 이곳에 계속 계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드십시오."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구나. 잘 생각했다. 오려거든 앞으로 10년 정도 꾸준히 훈련한 뒤에, 팔뚝이 내 반만 해지거든 그 때 오거라. 그땐 내 간단한 심사 후 허락해 주겠노라. 그리고……."
남자가 고기를 집어먹으며 말을 맺는다.
"이것들은 내 잘 먹도록 하마."
금나한이 고기들을 먹어치운다. 그 덩치에 걸맞게 단 두 입 만에 음식은 모두 사라졌다.
천강은 그의 손에 술을 쥐어주었다.
"이것도 마시지요."
"크으. 고맙구나!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기와 술인지!"
"평소에는 고기와 술을 못 드시는 겁니까?"
"그래. 상시 이곳을 지키느라 꼼짝 못하느니라."
"그럼 식사는 어찌 하시고요?"
"걱정 말거라. 오늘 맛나게 먹었으니 앞으로 백 년 정도는 끄떡없느니라."
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마치 밥을 먹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 아닌가.
그제야 그의 모습이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온몸에 자리한 기괴한 문양과 11척을 넘는 거대한 신장은 확실히 인간으로 보긴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정말 잘 먹었다, 소년!"
"아닙니다. 앞으로도 종종 음식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흠흠. 안 그래도 되는데……. 그것 참 마음에 드는 인간이로구나!"
술이 들어가서인지는 몰라도 흥이 돋은 금나한. 경계가 꽤 풀어진 걸 느낀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그럼 이제 바로 돌아가는 것이냐?"
"아니요. 잠깐 볼일 좀 보고 갈 생각입니다."
"음? 또 다른 볼일이 있었더냐?"
천강은 목을 좌우로 풀고는 무저갱으로 힘껏 내달리며 외쳤다.
"예. 천령초를 구하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자, 잠깐. 지금 뭐하는 게냐! 위험하다. 돌아와!"
그러나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동아줄이 자리한 곳까지 쭉쭉 나아간다.
'내게 음식을 베풀어준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에 온 힘을 다해 쫓으나, 백호의 가호까지 받은 천강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바람 그 자체.
금나한은 저 밧줄을 끌어당겨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소년의 무저갱 출입을 막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은 이내 크게 뜨였으니…… 소년이 밧줄을 잡지도 않고 그냥 구덩이 속으로 폴짝 뛰어내리는 게 아닌가?
"으헉?!"
금나한은 그대로 달려가 무저갱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뿌연 연기 탓인지는 몰라도 그 어디에도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이럴 수가……. 내게 맛난 음식을 제공해준 그 마음씨 고운 소년을 이리 보내버리다니.'
깊은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바로 혼을 내 돌려보냈어야 하거늘.'
***
금나한이 그리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그 때, 천강은 무저갱을 신나게 내려가고 있었다.
'된다, 돼!'
무저갱에 뛰어들기 전, 천강은 자신이 찾은 방법이 먹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낙엽 하나에 기를 실어 무저갱 안쪽으로 날렸다.
그것은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다, 이내 동아줄 근처에서 내기를 잃고 팔랑거렸고. 무저갱의 뜨거운 기운에 이끌려 서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천강은 그 위에 몸을 날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
'역시 암운신공이야. 초아에게 고마워해야겠어.'
고개를 내린다. 어깨에 멘 보따리 안쪽으로 낙엽이 두둑이 들어있다.
이 정도라면 반 시진 거리를 돌아다니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
천강은 낙엽에서 뛰어내려, 동아줄을 잡고는 밑으로 쭉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