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8화
78화. 천해지경
배가 고프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흰 눈이 내리는 시원한 계절을 맞아 잠시 바깥으로도 나돌아 다녀보았으나,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한 난 겨울의 혹독한 계절을 겨우 다섯 끼로 버텨야만 했다.
그러고 찾아온 봄.
발길이 뚝 끊긴 지하수로를 바라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빼앗긴 기운은 100년 치에 불과하지만, 복구하는 데엔 300년도 부족할 거라고.
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우울해하고 있을 때였다.
'음? 뭐지? 갑자기 뭔가 맛난 기운이 느껴지는데?'
스르륵 둥지를 벗어나 본능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간다.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혈향과 진한 기운들이.
그러다 마침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난 볼 수 있었다. 상류에서 쉴 새 없이 흘러들어오는 먹이들을!
크오오오-
기쁨의 벅찬 함성. 흑사는 울부짖었다.
***
"다들 튀어!"
"씨발.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사람들이 싸움을 멈추고 일제히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모처럼 찾은 먹이들을 쉽사리 내어줄 수는 없는 법!
흑사는 꼬리를 홱 움직였다. 그리고는 대뜸 그들이 흘러들어온 입구를 틀어막았다.
"젠장! 나가는 길이 막혔어!"
"다른 길을 찾아! 어서!"
가로막힌 출구 앞에서 마인들이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어떤 이들은 다른 물길을 찾아 올라가고, 또 어떤 이는 그냥 하류로 도망쳤다.
그러나 흑사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저 잽싸게 몸을 움직여 먹이들을 낚아채되, 주로 천정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이들을 위주로 노렸다.
쿠구구구구.
위에서부터 흙부스러기가 쏟아진다. 벽에는 지진. 지하수로의 물은 마치 태풍을 만난 것 마냥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이, 이무기가 날뛴다!"
"용이 되지 못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은 흑사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작년에 겪었던 슬픔이 떠오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하늘로 올라갔을 텐데…….'
그놈의 망할 인간 때문에!
크오오오-
마치 그날의 슬픔을 잊겠다는 듯 흑사가 더욱 크게 날뛰었다. 그로 인해 죽어나가는 건, 천강을 암살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살수들이었다.
"젠장. 이대로는 모두 죽고 말아! 다들 모여. 놈을 잡는다!"
"그래. 어떻게도 죽는 거, 녀석을 잡아보자고!"
서로 싸울 땐 언제고 갑자기 의기투합을 하는 사람들. 그러나…….
팅. 티딩.
깡. 깡.
검기를 사용해 흑사의 몸을 때려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때려도 때려도 흠집조차 나질 않는다.
"이게 무슨……?"
"이거 정말 생명체가 맞긴 맞는 거야? 금강석 덩어리 아냐?"
그들의 사기는 금세 곤두박질쳤고, 거대한 지하수로에는 금세 절망감만이 맴돌았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츄아악-
한 사내의 검격이 녀석의 가죽을 가르고 피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오오오!"
"공격이 통했어!"
"대체 누구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된다. 남자는 검강을 갈무리하며 주변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놈의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면서 시선만 끌어라. 나 죽영마검이 틈틈이 일격을 먹이겠다!"
"죽영마검?!"
"죽영마검이면 가까운 시일에 마두에 들 거라 소문이 자자한 실력자가 아닌가!"
절망감으로 그득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차올랐다.
그들은 흑사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며, 그가 일격을 먹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드는데 협조했다.
"죽어랏!"
크오오오-
죽영마검의 검이 흑사의 몸에 상처를 만들어낸다. 이무기의 비늘이 갈라지고 피가 튀는 걸 본 다른 마인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오오오. 제 아무리 이무기라 한들 검강 앞에서는 무의미하구만!"
"과연 화경!"
"오늘 우리 이무기 잡는 거 아닌가 몰라!"
그리고 죽영마검의 생각도 동일했다.
'몸 자체는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 이대로 백여 번만 더 칼질을 하면 저 목을 베어낼 수 있겠어.'
물론 같은 부위를 계속 공격한다는 게 쉽진 않지만, 자신 같은 화경 고수에겐 거뜬한 일. 죽영마검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그 때였다.
'응?'
갑자기 이변이 찾아왔다. 마인들을 뒤쫓던 이무기가 돌연 입을 벌리고는 머리 위로 쳐드는 게 아닌가?
푸화확-
"이, 이것은…… 독?!"
"커, 커헉."
"끄어어어억."
곳곳에서 비명이 퍼진다. 피부와 살은 물론, 내성이 없는 이들은 뼈째 스르륵 녹아내린다.
그리고 죽영마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내가 겨우 독무 한방에……."
이무기가 독무를 내뿜는 걸 보자마자, 천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귀는 곧바로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는 오목골로 나와 구멍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온 초록빛 독무가 하늘 위로 올라가다 바람에 날려 옅게 흩어진다.
'끝났군.'
주군께서 오목골로 들어서는 입구만 잘 막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흑사는 천정 구멍을 통해 도망치려는 이들부터 노려 삼켰다.
그 행동이 얼마나 집요한지, 놈의 탐욕이 내다보일 정도로.
마치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녀석의 의지가 강력히 전달되어 왔다.
'그러면서도 하류나 상류로 도망치는 이들은 방생하는 분위기였지.'
뱀은 영악한 동물이다. 특히 놈은 용이 다 되어가는 영물.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귀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커, 커억……."
"살……려줘……."
하류로 도망치던 이들을 수백 마리의 독사가 달려들어 물어뜯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 그것들은 어둠 속에 숨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흑사의 영역에서 그들이 빠져나오는 순간 달려든 것이다.
온몸이 마비된 그들에게 남은 건, 그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는 것 뿐.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화들짝 놀라며 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마인들을 다 먹어치운 흑사가 놓친 먹잇감을 회수하러 온 것이다.
'후후. 이것으로 밑으로 흘러간 놈들은 다 먹었고, 이제 상류로 올라간 놈들을 기다리면 되나?'
몸집이 작을 적부터 천산의 지하수로를 돌아다녔다. 아까 틀어막았던 길 하나 외엔 다른 수로에는 출구가 없다. 그러니 반드시 되돌아오리라.
'이것으로 대략 10년은 회복!'
그렇게 천강 덕에 승천일을 조금은 앞당기게 된 흑사였다.
***
천산의 보고 1층.
천강은 자신의 눈앞에 떠올라 팔랑거리는 비급을 가만 바라보았다.
무제(武帝)의 사념이 모여 만들어진 그것은 형태를 갖추자마자 대뜸 천강에게 물었다.
『나의 후학이여.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천강이 대답했다.
"현경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누렇게 변색된 비급 위로 기존의 글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글을 형성하였다. 그것의 대답은 이러했다.
『현경이 되고 싶은 자여, 10가지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그럼 자연스레 현경에 오를 수 있으리라.』
소년의 미간이 크게 좁혀졌다.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라…….'
말은 쉬웠다.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실천하려니 답이 나오질 않는다.
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그러나 이렇다 할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도리어 점점 미궁에 빠져들면서 아리송한 기분만 드는 상황.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걸으면서 사색을 하면 낫지 않을까 해서였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서류를 살펴보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천강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래. 좋은 만남은 있었느냐?"
"예. 이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제(武帝)의 비급이로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분명 겉면에 새겨진 북명신공이란 글자는 지워졌을 텐데?
"그것 때문에 올라가보라 했던 것이니라. 끌끌."
"그러셨군요."
하긴. 첫 만남에 북명신공을 익힌 걸 알아본 노인이다. 비급서 또한 오랜 세월 이곳에서 보관되었을 테니, 알아보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어째 고민이 있는 얼굴이로구나."
"아, 예. 실은…… 현경에 대한 깨달음을 이 책이 가르쳐 주었는데,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뭐라 쓰여 있는데 그러느냐?"
천강은 비급서를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대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그리 웃더니, 이내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연 무제(武帝)다운 답변이구나."
"예에?"
"옛 기록에 따르면, 무제(無際)는 등선하기 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한데모아 천해지경이라는 신병이기를 만들었다. 그 비급이 바로 그 신병이기이니라."
이 종이쪼가리가 신병이기?
고개를 갸우뚱 하는 천강의 귀로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그걸 위해 한 달간 토끼 뒤를 따라다닌 적도 있었단다. 그는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네게 가르쳐준 것이니라."
10가지의 다른 생명체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무제(武帝)가 성공한 방법.
"하지만 너무 난해해서 고민입니다."
그랬다. 본디 무공서들이 불친절한 건 알고 있었지만, 깨달음을 주는 부분까지 두루뭉술하니 너무도 답답한 천강이었다.
차라리 토끼 천 마리를 잡으라고 했으면 속 시원했을 텐데.
"흠. 그냥 어르신께서 가르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에게서도 대답을 들어보고, 비급서와 노인 중 더 쉬워 보이는 쪽을 선택해 깨달음에 도전해 보려는 천강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아이야. 넌 무제(武帝)의 무공을 이었다. 그러니 응당 그 가르침을 받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너무 막막하단 말이지.
지금껏 이렇다 할 인연도 없이, 거의 혼자 살다시피 해온 천강에게 자신 외에 다른 생명체를 이해한다는 건 매ㅌ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천강의 기색을 눈치챈 걸까?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나 말고 그 천해지경에게 물어보거라."
"어? 그게 가능한 가요?"
"끌끌. 아무렴! 그것은 말 그대로 무제(武帝)의 지식과 경험을 담은 정수이자 두뇌. 다양한 주제로 질문은 물론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을 게다."
소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설마하니 그런 기능이 있을 줄이야!
천강이 녀석을 붙잡고는 물었다.
"혹시 현경에 대한 깨달음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검은 글자가 빠르게 새겨진다. 천강은 기대에 찬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나비처럼 날아다니는데…….』
"장주(莊周)가 한 말이군요.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설명 부탁드립니다."
『자연의 흐름 속에 나를 투영해 그것과 하나가 되다보면, 자연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게 되고. 비로소 그것이 천지와 하나가 되는…….』
"잠깐. 잠깐만요! 너무 길어요. 좀 간단하게 말해주세요."
『자연은 곧 나, 내가 곧 자연.』
"아니, 그건 너무 간단한데요. 조금만 적당히 자세히."
『자연에는 의지가 깃든다. 그 의지를 심는 건 사람이다…….』
으아악! 소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사념체라 하더라도 그 근본은 무림인. 어떤 질문이건 알쏭달쏭 두루뭉술하게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 천 년도 더 된 사람 아닌가?
'망했어. 이런 뼛속까지 무림인을 스승으로 만나다니!'
천강의 미간이 크게 좁혀졌다.
그냥 나도 한 달간 토끼 뒤나 쫓아다녀 봐야 하나?
저 알 수 없는 말을 들으며 하루 종일 앉아있느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저딴 게 무슨 신병이기…….'
그런 그 때, 천강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천강의 시선이 천해지경에 가 닿는다. 그것은 마치 꽃 위에 앉은 나비가 제 날개를 살랑살랑 움직이듯, 바닥에서 지 혼자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천강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