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7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77화
77화. 무제(武帝)의 사념
천산의 꼭대기에 자리한 신교의 신전.
그 안에서 집무를 보는 교주에게 한 사내가 들어와 예를 올렸다. 천수마검이었다.
"교주님."
"그래. 알아 왔는가?"
"예. 지금 수많은 마인들이 암운곡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못해도 사백에 달합니다."
"하하핫. 사백이라?"
교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많은 숫자라니.
그저 백 명이 못 되는 숫자가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새삼 현 마교에서 교주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만약 그 많은 수가 만약 내 자식에게 향했다면?'
천마가 머리를 흔들었다. 굳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할 필요는 없으리라.
"앞으로 한동안은 암운곡이 시끄럽겠군."
"그럴 겁니다. 일단 혹시 모를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흑철마괴에게 병력들을 전달했습니다."
"그래. 잘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의 주인공인 우리 소교주께선 잘 버티고 있다든가?"
죽어도 상관이야 없지만, 이왕이면 잘 커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게 천마의 마음이었다.
"혹여나 위험하거나 하다면 호위대를 붙여……."
그런데 교주의 질문을 받은 천수마검의 표정이 이상했다.
"교주님."
"음?"
"그건 전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천수마검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흑철마괴에게 들었는데, 암운곡에서 진즉에 튀었답니다."
"뭐? 아니, 어디로 말인가?"
"어디긴 어딥니까. 교주님께서 허락해주신 곳이지요. 그러고는 애들에게는 지하수로 하류 어딘가에서 수련한다고 했다는데…… 교주님도 아시잖습니까? 그곳을 찾고 뒤지려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정도로 넓다는 거."
"하하핫."
교주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설마하니 적들의 시선을 그런 식으로 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다들 헛짓거리를 하겠구만."
"예. 열한 살짜리 꼬맹이의 장난질에 아주 개 고생할 겁니다. 자업자득이지요."
그리고 그 시각.
실제로 그들은 물속을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하고 있었다.
마치 소교주를 먼저 발견하기라도 하면 교주의 반지가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다투어 경쟁까지 하고 있었다.
"저리 비켜! 반지는 내 거야!"
"무슨 소리!"
처음에는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하류로 우르르 달려 나가더니, 이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싸움으로 번져간다.
"죽엇!"
"하! 누가 그런 느려터진 공격에 맞을 성싶으냐!"
싸움은 금세 격해졌고, 이내 지하수로의 물을 붉은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
북명신공.
세상의 무학과는 그 원리가 반대라고 알려진 신비의 무공.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 무공의 이름을 아는 이조차 중원을 다 뒤져본들 채 열 명이 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전생에 천강은 이 비급을 찾느라 꽤 애를 먹어야만 했다.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지만이라도 알았다면 조금은 덜 고생했을 텐데…. 아무튼 천강이 맨 처음 이 비급을 본 것은 전생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손을 뻗는다. 북명신공의 비급서가 새하얀 빛을 뿌려대며 잘게 떨고 있다. 그것의 행태는 마치 부모에게 울음을 토해내며 도움을 청하는 아기와도 같았다.
천강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러자 곧바로 새하얀 빛이 온 시야를 가득 메웠다.
화아악-
서서히 잦아드는 환한 기운.
눈을 뜬다. 주변에 있던 각종 선반들이나 쌓아둔 비급서들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빛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서 천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여긴?"
- 그대인가? 내 부족한 무공의 길을 잇게 된 자가?
고개를 든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이 산발돼 허리 근처에서 나풀거리고, 덥수룩한 수염은 입가를 가릴 만큼 무성하다.
그 모습은 얼핏 걸인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나, 상의를 걸치지 않아 드러난 탄탄한 몸과 앞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안광이 그의 비범함을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천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 절을 올렸다.
"소인은 천강이라 합니다. 대인께서는 혹여 먼 과거에 본 무공을 창시하셨다던 무제(武帝)이신지요?"
- 아니다. 나는 무제(武帝)가 아니다. 그저 그가 남긴 미약한 사념의 일부일 뿐.
그가 천강에게 다가왔다. 머리에 손을 올리자, 천강은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 이것은 나의 유지를 이을 후학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무제(武帝)의 사념이 빛무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모여, 비급서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 먼 훗날 너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고대한다, 나의 후학이여.
화아악-
빛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사라졌다. 빛이 걷힌 그곳은 아까까지 천강이 자리하고 있던 천산의 보고 1층의 모습이었다.
고개를 내린다. 책 한 권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다. 천강은 그걸 집어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비급서의 모든 내용이 사라지고 백지로 변하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공기 중으로 흩뿌려지고, 그 내용은 고스란히 천강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며 덩달아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가. 북명신공을 완성한 이가 나타난다면 그 순간 발동하도록 조치를 해둔 것이었나?'
그때 천강의 손에 잡혀있던 책이 파르르 떨었다.
"무, 뭐야?"
깜짝 놀라 손을 펼치자, 나비마냥 팔랑팔랑 날갯짓을 하는 비급서.
이내 누렇게 빛바랜 백지 위로 검은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나의 후학이여.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
"죽어엇!"
"네놈이나 죽어랏!"
쾅. 쾅. 어둠이 그득한 수로 위로 번쩍번쩍 불똥이 튄다. 마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수 삼아 난전을 벌이며 끝없이 하류로 나아갔다.
'젠장.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
적삼혈마의 지시를 받아, 은밀히 이곳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잠입한 일영귀검 또한 마찬가지.
이대로라면 어떤 싸움이건 말려들 게 뻔하다 직감한 그는 좌우에서 짓쳐드는 공격을 피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이내 그는 어느 거대한 공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지금껏 나아오던 수로에 족히 열두 곱절은 더 되어 보이는 곳. 두터운 기둥이 중간중간 자리하고, 천정으로부터 미약한 빛이 새어 들어와 어두운 수로를 은은히 밝혀준다.
이 넓은 곳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치 이곳에 온 목적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하핫! 네놈도 죽어랏!"
한 대머리 사내가 자신만만하게 철퇴를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든다. 일영귀검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사내의 철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받아냈다.
"커헉……."
받아낸 건 그였으나 도리어 내상을 입고 튕겨져 나가는 철퇴 사내.
'확실히 앞쪽은 조무래기들이 그득하군.'
진짜배기들은 일찍도 늦지도 않은 채 적정한 시간에 도착하리라.
일영귀검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 하나에 매달려 지도를 꺼내들었다. 그곳엔 이곳 지하수로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그려져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있는 형태로군.'
한동안은 여기에 숨죽이고 앉아 상황을 지켜보면 될 듯하다. 이 위로 올라가면 지상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 같으니 이따 한 번 확인을…….
푸욱.
"응?"
일영귀검의 시선이 밑으로 향한다.
가슴팍에 칼날이 삐져나와 있다. 그 끝에는 그의 몸에서 나온 붉은 액체가 모여,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깨달음.
마, 말도 안 돼. 화경인 내가 눈치 채지도 못할 정도의 은신술이라고?
"큿. 네놈. 대체 정체가……?"
칼날이 도로 몸속으로 들어간다. 서서히 밑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그가 볼 수 있는 건, 구멍에 매달린 어떤 인물의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풍덩.
'그, 그래도 천만 다행이다. 천독불침이라 이 정도 독 따윈 조금만 있으면 해독…….'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이내 뚝 멈추어 섰다.
고오오-
세상이 고요하다. 물속에 있어 그럴까? 마치 어미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위에서의 요란한 싸움 소리가 마치 고동소리처럼 들려왔다.
그에 한껏 평안함을 누리고 싶어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스르륵-
거대한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요란한 틈을 타,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치 매우 거대한 존재가 물속을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부상을 입거나 죽어 물속에 잠긴 자들을 하나씩 집어삼켰고, 이내 서서히 시선을 돌려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것은 대체……?'
지옥의 사자(使者)가 입을 벌린다. 짙은 심연이 열리며 그 안으로 주위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망(蟒)?'
***
"일귀."
"예, 주군."
"내 거처 아래에 뱀 한 마리가 똬리 틀고 있는 거 알지?"
"그 덩치가 용(龍)만한 것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처음 본 것은 그의 주군과 지하수로를 통해 흑살마신의 거처로 나아갈 때였을 것이다.
그 길이를 오롯이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거대한 존재.
그렇게 큰 생물은 난생 처음 보았다. 주군이 뱀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응당 이무기라고 오해할 정도로.
이후로도 지나다 종종 보았는데, 천정을 통해 은밀히 이동하는 자신들을 다행히 녀석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 그 녀석. 내가 조만간 그쪽으로 사람들을 대거 보낼 거다."
"주군. 사람들이라뇨?"
"암운곡 애들한테 내가 그곳에서 수련할 거라고 이야기해뒀거든. 내가 소교주로 확정이 나면, 아마 너도나도 날 죽이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들겠지."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한 일귀가 물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일귀 넌 말이지."
그의 주군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목골. 내 거처로 올라오려는 놈들을 다 막아라. 그러면 나머진 그 뱀이 알아서 다 처리할 거다."
"근데 혹시나 역으로 당하진 않겠습니까? 그저 평범한 뱀이라면……."
"아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싸움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설령 일어난다한들 녀석…… 무진장 세거든."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오늘에서야 깨달은 일귀였다.
크오오오-
묵직한 음성이 지하수로를 쩌렁쩌렁 울린다.
잔잔하지만 존재감이 그득히 담겨있는 포효에, 서로 싸우던 사람들은 행동을 멈추고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영물이 어둠 속으로 몸을 크게 세우고 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은 사냥꾼과 같이 매섭게 번뜩이고, 입가에선 죽음을 알리는 음산한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진다.
스스슷-
잠깐의 고요. 그 속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이무기다!"
그리고 그건 그곳에 있던 모든 마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무기.
용이 되기 위해 천 년간 준비했으나 실패한 영물.
그렇기에 성격이 매우 포악한 경우가 많으며, 자연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에 보통 현경과 생사경 사이의 경지로 취급된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 존재는 마교의 현경들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한다는 괴물 중의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지금 흑사는 이무기가 아니었지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녀석의 덩치는 그곳에 있던 모든 인간들에게 절망감과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미친! 아니, 이무기가 왜 여기 있어?!"
"도, 도망쳐!"
마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