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4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6화
116화. 교주의 증표
교주의 증표.
그것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신검과 성화다. 꺼지지 않는 불꽃과 천지를 가를 능력을 지닌 무구.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엔 공통점이 있었다.
갖고 싶다고 함부로 빼앗을 수 없으며, 진정 얻기를 원한다면 특정 장소로 가서 자격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하늘의 길, 천로(天路)라 부른다.
"그곳으로 가려면 그게 필요해. 그 안엔 천마신공의 구결과 신검이 봉인돼있는 위치가 적혀있어."
신검(神劍).
신검은 일반적인 신병이기들과는 다르다.
주인이 원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소환되고. 쓰임새가 끝나면 본인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천강은 반지를 들어 올려 바깥쪽과 안쪽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안쪽으로는 천마신공 심공의 구결이…… 바깥으로는 신검의 위치가 기록되어있는 건가?'
천마신공은 필요 없다. 천강은 반지를 돌려가며 바깥의 글씨를 읽어보았다.
『추운 계절을 지나, 잠을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고. 따스한 온기에 앵화가 흐드러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에 온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니, 그곳이 바로 하늘의 길이로다.』
어딘지 알 거 같다.
천산엔 유독 앵화나무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 있다. 현 교주가 소교주 시절 훈련할 때 자주 애용하던 곳.
'천산 앵화고목 뜰이로군.'
천강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오자, 진악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선배, 뭐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음?"
"진짜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거야. 나 교주 되어야 하니까."
"걱정 마라."
애초에 천마의 자리 따위 관심 없다. 그저 천강이 요 소교주 꼬맹이를 궁지로 몰아넣어 반지를 챙긴 건 오로지 신검(神劍) 때문.
'그거 하나만 있어도 투파창귀와 할 만할 거야.'
다만 문제는 앵화고목 뜰이 여울나무 숲 근처에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다. 천강이 알기로 하늘의 길은 딱 그 시기에만 열렸다.
'쓰여 있는 구절들을 참고해볼 때, 경칩(驚蟄)을 지나…… 춘분(春分)의 때로군.'
지금 시기는 하계. 곧 태풍이 몰아칠 것이다. 올해는 글렀고 내년은 되어야 한단 뜻.
진악이 다가와 천강의 몸을 흔들었다.
"선배. 나 이거 진짜 먹는다? 흡수하는 거 도와줘야 해."
"너 지금 경지가 어떻게 되지?"
"나? 절정이지."
"그럼 잘됐네. 오늘 환골탈태 마치고 한 달 안에 화경으로 들어간다."
"그게…… 가능해?"
애초에 초절정도 아니고 절정인 상태다. 환골탈태에 성공할지도 의문이 드는 진악이었다.
"옛적엔 절정이랑 초절정 구분이 없었어. 화경 경지의 벽이 너무 높다 보니, 초절정이란 게 생겨났지."
결국 두 경지는 하나다. 능숙함의 차이만 좀 있을 뿐. 그러니 될 거다.
'기경팔맥이 다 뚫리고 나면 화경의 깨달음은 자연스레 찾아온다고 했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천마의 피니 그 미친 재능이 어디 가진 않았으리라.
"넌 걱정 말고 잘 따라오기만 해."
***
총책임자 집무실.
고심이 깊은 얼굴을 한 채, 두 사내가 앉았다. 호접일검이 문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물었다.
"희한하군요. 왜 이렇게 조용하죠?"
소교주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훈련까지 멈추고는 교주 쪽과의 일전을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적들은 너무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적삼혈마님."
"확실히 뭔가 이상하군요. 벌써 15일이 지나가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호접일검의 질문에, 적삼혈마의 두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깊은 주름이 지고, 눈두덩에는 짙은 음영이 맴돌았다.
"이 이상 대기하면 불만이 터져 나올 겁니다. 어떤 행동이라도 취하셔야 합니다."
안다. 다만 여울나무라는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는 만큼 함부로 행동을 취하기 힘들었다. 작은 지시 하나에도 그 여파가 어마어마하니까.
그런 연유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대기하고 있는 그때, 총책임자 사무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투파창귀였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예, 어르신."
"큭큭큭.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예? 그게 무슨……."
이해를 못 하겠단 표정을 짓는 호접일검에게 투파창귀가 고갯짓했다.
"지금 당장 가서, 영약 전달한 새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호접일검이 나가고, 단둘이 남은 공간에서 투파창귀가 적삼혈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제대로 뒤통수 맞았다는 걸 말이다."
적삼혈마가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으나, 벌써 15일이 흘렀다. 기경만회가 끝나고 몰아치기 시작한 태풍이 어느덧 잠잠해지고 있었다.
"이제 곧 무더위가 시작될 것인데, 계속 전투 태세를 갖추게 한다면 불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쯤에서 멈추거라."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만년설삼에 상급 영약 8개. 여울나무 1년 치 예산이 그대로 증발했다는 사실에 적삼혈마의 다문 입술이 새하얘졌다.
"아니다. 여우처럼 영악한 녀석이다. 애초에 너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을 지도 모르지."
호접일검이 사람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번 영약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
안 그래도 투파창귀의 지시라는 거짓에 속아 영약을 잘못 전달한 일로 한 차례 고초를 치른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남자는 투파창귀 앞에 엎드렸다.
"부,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내 다시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하문하십시오."
"그때 소교주의 시체를 분명 확인했다고 했지?"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예."
"혹시 그 시체에 상처가 있었더냐?"
"어, 어, 없었습니다. 전 당연히 독에 당한 상처니, 없을 거라고 생각을……."
"녀석의 피부색은 어떠했지?"
"창백했습니다."
"그게 다냐?"
"……예에."
퍽. 남자의 머리가 뒤로 꺾였다. 그리고는 몸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미간에서 핏물이 흘러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었다.
"어르신?"
"무형지독에 의해 죽으면 온몸이 시커멓게 변해서 죽는다. 그 상태로 반나절을 지속하다 다시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지."
한마디로 속은 셈. 적삼혈마와 호접일검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사무실 내로 무거운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적삼혈마야."
"예, 어르신."
"이왕 사람을 매수할 거라면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다. 우선 흑학대신을 선택한 것부터가 잘못됐다."
탐욕이 많은 인간은 자기편이란 게 없다. 돈과 목숨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니까.
그러니 소교주에게 홀라당 넘어가 그런 연기를 펼친 것이다.
"소교주는 내가 처리하겠다. 내가 하는 걸 잘 지켜보거라."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추수를 마치고 휑해진 땅 위에서, 두 소년의 검이 서로 만났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천마신공 파검결 제 4식, 파천일검!'
진악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기운은 마치 해일과 같이 범람해, 상대를 향해 매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천강의 팔이 움직였다.
쿠콰콰콰콰-
진악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뿌연 흙먼지 속을 노려보았다.
"헉. 허억……. 성공?"
대답 대신 훅 날아오는 딱밤. 강한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걷어낸 천강이 반만 뜬 눈으로 말했다.
"기마 자세."
"네, 네엣!"
천강의 말 한마디에, 진악이 이마를 매만지다 바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즉각 나오는 반응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 앞에 선 천강이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내가 아까 뭐라고 말했지?"
"동작을 더 크게 하라고."
"그전에."
"회전력을 더 높이라고……."
"그거 말고. 아까도 같은 이유로 혼난 게 있을 텐데."
진악이 천강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강한 기술은 의미가 없으니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 방금과 같은 강력한 한방은 의미가 없다. 스스로 악수를 두는 것과 같은 이치다. 꼭 싸움 못하는 것들이 큰 거 한 방을 노리지."
진악의 몸이 움찔했다. 천강의 머리 위, 검은 구름 안에서도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 흠흠.
"물론, 적절한 순간에 쓰는 건 좋다. 그런데 지금 넌 기술의 핵심과 강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쓰고 있다."
천강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전방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쿠콰콰콰콰-
방금 진악이 사용한 것과 똑같은 기술. 그러나 그것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판이했다.
진악 쪽이 그냥 땅이 엉망이 된 정도라면, 천강의 기술이 훑고 간 자리는 처참하다 못해 거대한 고랑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기억해라. 파천일검은 강한 회전력에서 힘이 나온다."
진악이 마른침을 삼켰다.
"근데 선배, 진짜 정체가 뭡니까?"
천마신공 파검결은 천마신공 검술 중 가장 마지막에 배우는 절기들이다.
기술 하나하나가 많은 내기를 소모하기에, 환골탈태를 이루고 화경까지 된 진악조차도 세 번을 쓸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걸 시범이랍시고 반 시진 동안 오십 번 넘게 사용해대는 천강은 진악에겐 괴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에 말했잖냐. 천산의 보고에 네 먼 조상님이 계신다고. 그분이 한 거 그냥 따라 해본 것뿐이야."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다!"
물론, 천마신공을 쓰는 것 자체도 어이가 없긴 했다.
진짜 이 인간 대체 정체가 뭐야?
"나중에 되면 다 알게 된다. 결국 모든 무공의 끝은 하나니까. 길이 다를지언정, 무극(武極)이라는 꼭대기에 다다르면 그 경계가 사라지게 되는 거지."
"윽……. 왠지 노인네 같습니다. 어려운 소리 그만하십시오, 선배."
천강이 볼을 긁적였다. 실은 천해지경으로부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천강도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 넌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무공도, 그리고 싸움에 임하는 자세도."
"그, 그치만 전 빨리 강해지고 싶……."
"넌 다른 무엇보다 그거부터 고쳐야 한다. 뭐 내 방법이 싫으면 자리 털고 일어나던가."
진악이 고개를 숙였다.
계약과 무관하게 자신이 부탁한 일이다. 화경을 진짜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줄 줄 몰랐던 진악은 자신의 대역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강해질 수 있도록 지도를 부탁했다.
그에 이리 굴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고.
"계속할 거면 기마 자세 똑바로 해라. 다리에 내기 쫙 빼고."
"네, 네엣."
"어허. 목소리가 작다. 대답 더 크게 못 하냐?"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에엣!"
자고로 버릇 고치는 데에는 고통이 최고지. 그렇게 진악을 기마 자세 세워놓고, 천강 또한 생사경의 깨달음에 전진하는 그때였다.
"형님!"
"어, 무진아."
"이제 출발한답니다!"
"알겠다."
천강은 고개를 돌려,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는 광활한 대지를 둘러보았다.
혹여나 올해도 백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곳을 떠난 것인지 녀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
"그럼 잘 가거라, 애들아."
"예!"
"내년에 뵙겠습니다, 추밀 님! 아니, 총책임자님!"
"건강하세요!"
"하핫. 고맙구나."
이립(而立) 즈음 되어 보이는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풍미관 총책임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암운곡의 작황이 높게 평가되면서 올해부터 새롭게 총책임자로 임명된 추밀이었다.
이전처럼 허름한 농인 복식을 차려입은 그는 암운곡과 여울나무 양 진영을 오고 가며 모두에게 수고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양 진영이 출발을 시작했다. 늘 그렇듯 제일 후미에서 시간을 때우는 천강에게 추밀이 웃으며 다가왔다.
"올해는 뭔가 좀 건졌니? 작년처럼 밤에 열심히 돌아다니던데."
"아뇨. 올해는 인연이 없더군요."
"하핫. 인연이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법이지. 내년에는 좋은 인연이 있길 내가 미리 빌어야겠구나."
추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올해는 한 명이 안 보이네?"
"누구요?"
"너랑 혼례를 올릴지도 모른다고 소문났던……."
천강이 눈을 크게 뜨고는 소리쳤다.
"아, 그 누님과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그래?"
"예! 그리고 그 누님은 조교니까 1년 채우고 벌써 교체됐습니다."
"아하. 그랬지. 그런데 이상하구나."
무엇이 이상하냐며 눈을 반만 뜨고는 곁눈질하자, 추밀이 턱을 쓸며 이야기했다.
"내가 사람…… 특히 마인들은 좀 볼 줄 아는데 말이다. 그 여자애 성격상, 조교를 그만두었다 해서 널 이곳에 혼자 보낼 성격은 아니었단 말이지."
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보통 집착에 빠진 여마인들은 10일을 못 넘긴다. 그런데 보름간 이루어지는 가을걷이에 코빼기도 안 비친다고?
'내가 마지막으로 초아를 본 게 언제였지?'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그러니까 대략…… 지하수로에 실종사건이 일어나면서 무진이 맹익을 따라간 그 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게 봄이었으니까, 그 뒤로 올가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단 뜻.
'초아에게…… 뭔 일이 생긴 건가?'
소년의 시선이 홱 돌아 천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