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5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5화
115화. 새 계약
"그럼 이만 돌아가시죠."
"그래. 알겠다."
교주가 그림자들을 이끌고 암운곡에서 사라졌다. 조금 있으니, 맹익이 밖으로 나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흑학대신에게서 넘겨받은 비밀창고는 어때? 잘 해결됐어?"
"예, 선배. 그냥 조금 보완을 하는 정도만 하면 되는 일이라 방금 막 끝냈습니다."
"수고했네. 고생 많았다."
"별말씀을요. 그건 그렇고, 교주님과는 잘 해결되셨습니까?"
"어. 교주도 나랑 생각이 같더라고."
지금껏 숱한 고난을 헤쳐 나아온 게 운이 아니었다는 듯, 화난 건 화난 거고. 교주는 천강처럼 이 일을 조용히 묻어가길 원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교주 쪽도 준비가 덜 되었던 것이지."
"또 그걸 빌미로 뭔가를 뜯어낸 건 아니시죠?"
"어이. 너 말이야……. 내가 틈만 나면 뭘 못 뜯어내 안달인 인간으로 보는데 말이야."
"아닙니까?"
소년의 눈이 반으로 접혔다.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맹익.
쳇. 그동안 한 짓이 있으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아무튼 이번엔 아무것도 안 요구했어. 사사건건 눈치 없이 요구하는 건, 관계를 부술 수 있는 일이거든."
한번 그리 관계가 틀어지면 회복하기가 매우 힘들다.
특히나 무림인들은 고집들이 세다. 자칫 잘못하면 원수지간…… 못해도 사리사욕을 탐하는 놈이라 낙인찍힐 수 있었다.
그런 건 좋지 못하지.
"그런데 교주님께서 생각 외로 빨리 떠나셨군요. 아들 얼굴은 보고 가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내가 빨리 나가라고 했어."
"예?"
"내가 죽은 걸로 사건을 덮어야 하는데, 교주가 이곳에 오래 눌러앉아 있으면 적들에게 의심만 심어주는 꼴이잖아. 왜 상황을 알고도 안 쳐들어오지? 하고 말이야."
교주가 돌아가며 암운곡에 온 흔적을 지웠으니, 이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입을 꾹 닫으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다.
흑철마괴는 죽고, 비격창마는 부상이었기 때문이다.
조교와 아이들은 교관의 허락 없이 외부로 나갈 수 없기에, 현재 암운곡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자연스럽게 외부에 감출 수 있었다.
"적들은 생각할 거야. 흑학대신과 신입 교관들이 소교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고 튀었구나. 그로 인해 암운곡 아이들은 외부에서 인사가 들어올 때까지, 교주에게 그 어떤 사실도 전달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말이야."
아마 십일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잘하면 한 달도 넘길 수 있겠지.
첨벙.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려온다. 사백동굴에서 아이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리라.
천강은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오늘 있었던 암살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 반응이 기똥차다.
"하. 그 교관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우리를 가르치는 게 목적인지, 감시하는 게 목적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니깐?"
"솔직히 기분 더러웠지."
애들이 이리 느낄 정도라니……. 대체 여울나무는 이런 놈들의 뭘 믿고 일을 맡긴 거지?
고작 그런 놈들이 화경 고수였다는 것도 웃음이 나오네.
아무튼 천강은 아이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그런 연유로…… 혹여나 외부 인사들이 나에 대해 묻거든, 날 못 본 것처럼 해주면 좋겠다. 다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저번처럼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래."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해본 만큼, 두 번 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천강은 맹익을 시켜 상자들을 들고 나오게 했다. 거기엔 최하급 영약부터 중급 영약까지, 수많은 영약이 담겨 있었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어? 이, 이거 우리들 주는 거야?"
"그래. 교관도 없어서 훈련도 더딘 판에, 영약이라도 먹고 커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하지 않겠어?"
원래대로라면 아이들에게 배분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수년간 암운곡 예산을 뒤로 빼돌리고, 암운곡 내의 정보를 여울나무에 팔아넘기고. 그러며 만들어낸 물건들이니까.
대략 아이 한 명당 하급 영약 하나 정도를 가져갈 수 있도록 천강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고마워, 천강."
"고맙습니다, 선배님!"
꼬옥. 손아귀에 쥐고는 좋아하는 아이들.
굳이 줄 설 필요 없이 한 번에 나눠줘도 되지만, 천강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일일이 손으로 건네주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높은 호감과 신뢰도가 빠르게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 어이. 너 지금 괜찮냐?
- 오늘따라 얘 상태가 더 이상한데…….
- 소년, 미치면 안 됩니다!
교주에게서는 어떻게든 못 뜯어 안달이면서, 갑자기 선행을 보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모양.
그러나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일귀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흑학대신과 여울나무 측과의 은밀한 대화.
우연히 지나가다 무형지독의 이야기를 들어서 천만다행이지, 그러지 못했더라면 제아무리 천강이라도 큰 고초를 겪을지도 몰랐다.
이번 일을 통해, 천강은 내 사람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부터 암운곡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둔다.'
내게 정보를 물어오는 새와 쥐로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는 하나둘 이곳을 졸업해 마교 곳곳으로 배치될 테니까.
생각대로만 된다면 자연스레 오백 명 이상의 정보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
제 명을 못 채우고 죽는 마인이 9할 이상인 이 마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힘과 정보. 힘은 갖추었으니 이젠 정보를 준비할 차례였다.
"자, 그럼 다들 자리 잡고 앉아. 흡수하는 거 도와줄 테니까."
***
기경만회에 참석했던 아이들이 돌아왔다.
경기 결과도 결과지만, 그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전해 들으며 암운곡 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가르칠 교관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이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몰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아. 어떻게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냐."
"……그러게 말입니다, 선배."
암운곡 지하수로. 그 앞에 앉은 방중과 소운은 달빛에 비쳐 흘러가는 물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한때 암운곡의 최강자로서 아이들을 이끌어본 두 사람. 그래서일까? 그들의 어깨엔 교관 하나 없는 이 현실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 짓눌렀다.
구름이 달빛을 가린다. 어둠이 사위에 내려앉는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벌써부터 죽는 소리를 하면 어떡해?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건데."
"천강…… 왔냐?"
"오. 천강. 그건 뭐야?"
"한잔할래?"
"술이야?"
"아니, 차. 총책임자가 차를 좋아해서 그런지 좋은 찻잎이 많이 있더라고."
"천강, 너도 아직 멀었다. 이럴 땐 술을 들고 와야지."
투덜대면서도 소운이 찻잔을 받아들었다. 방중 또한 마찬가지.
"맛은 좋네."
"좋을 수밖에. 나라님 혹은 고관대작들이나 드신다는 차거든."
"이게? 이름이 뭔데?"
"용정차."
방중과 소운이 눈을 빛내고 그 맛을 음미한다. 확실히 녹차 같으면서도 뭔가 느낌이 많이 다르다.
- 그건 그렇고, 그 늙은이 죽도록 내버려 두길 잘했네요. 어떻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죠?
'사욕을 챙기는 것들이 다 그렇지.'
창고도 다섯 개라 했는데, 맹익이 추가로 발견한 게 세 개 더 있었다.
목숨이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혀를 놀리다니……. 흑학대신,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아무튼 선배들이 앞으로 조금만 더 고생해줘."
"후우. 나도 내 훈련, 해야 하는데."
"말은 이리해도 소운 얘가 제일 열심히 하더라."
"아, 뭐래. 그냥…… 도와 달라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천강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조용히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 좀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말해 봐."
"현재 교관 대신에 자기 시간 빼서 애들 가르쳐주는 선배가 몇이나 되지?"
"조교 빼고?"
"조교 포함해서."
"한 사십 명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럼 내가 상급 영약 여덟 개 줄 테니까, 훈련 시간 더 빼보라고 해 봐."
"호오. 누가 소교주 아니라고 할까 봐, 그릇이 크네. 손해 보는 심법 훈련 시간을 영약으로 채워주겠다 이거지?"
상급 영약 하나가 중급 영약 네다섯 개 정도의 효능이 있다. 말 그대로 중급 영약 하나씩을 배정해 준다는 뜻.
바닥에 앉아 주야장천 내기를 모은다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단 덜 지루하고 훨씬 보람찬 일이 될 것이다.
"대신, 이건 내 사비로 하는 거야. 다들 기억해."
"어련하시겠어. 알았다!"
"하핫. 고맙다, 천강!"
굳이 보상이 없어도 움직일 이들이었다. 그러나 보상을 주었으니 이젠 더 열심히 할 것이다.
'그럼 다들 강해지겠지. 중요 직책에도 빠르게 들어설 테고.'
천강의 고개가 머리 위로 들렸다.
잠시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긴 달빛이 얼굴을 다시 내밀었다. 짙은 어둠이 걷히고, 암운곡 내로 환한 빛이 내려앉았다.
'이제 만년설삼 하나 남았나?'
이것만 잘 처리하면 된다.
다음 날.
"자자. 다들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럴 때일수록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해야지!"
"흐느적거리다간 얼마 전 흡수한 영약, 똥 된다!"
천강에게 상급 영약을 전달받은 4, 5년차 실력자들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암운곡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선된 분위기 속에서도 두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무진! 진악! 너희 둘 힘 좀 내! 응? 자꾸 멍때리면 내 주먹 날아간닷!
연화가 기운 차리라며 주먹을 내질러도 그냥 맞아주는 두 사람. 고개가 홱 꺾이더니, 핑그르르- 땅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힌다.
"에……? 이게 아닌데."
"아니다. 연화야, 잘했다."
"정말?"
"어. 정신 차리는 데는 주먹이 최고지."
간만에 받아보는 칭찬에 연화가 폴짝폴짝 뛰어대고, 천강은 일단 무진을 따로 불러냈다.
"무진아."
"……예, 형님."
"무진아!"
"예, 형님."
소년이 고갤 들어 바라본다. 천강이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한 가정의 가장이라 치자. 그런데 연로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슬프겠지. 그렇다고 집안일 내팽개치고 울고 있으면 쓰겠느냐?"
"……."
"동물도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안다. 그러나 결국 살기 위해 움직인다. 슬프다고 가만히 있는 동물은 필히 죽게 되는 법이다."
천강이 슥 고개를 돌려 사백동굴 내를 바라보았다.
"지금 우린 전쟁터에 들어와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떠난 이보단 지금 널 바라보는 이들을 떠올렸으면 좋겠구나. 너와 같은 슬픔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무진은 슬기로운 아이다. 아마 내 말뜻을 잘 이해했으리라.
그리고 과연…… 당장 흐리멍덩한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무진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자신의 훈련 자리로 이동했다. 천강은 잠시 고민하다, 무진에게 전음을 날려주었다.
- 그리고 네 스승은 살아있다.
홱. 크게 뜬 눈으로 천강을 돌아보는 소년.
- 새 삶을 위해 죽음으로 위장하였으니, 그 뜻을 존중해줬으면 좋겠구나.
"예……!"
그럼 무진이도 해결했고, 이제 남은 건 하나.
천강은 진악에게 걸어가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무진이보다 상태가 나아서 그런지, 녀석은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다.
"뭐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뭔 이야기?"
천강은 진악을 지하수로로 데리고 가 말을 이었다.
"나 곧 조기 졸업해서 암운곡을 뜰 거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날 더 도와줘야지!"
"이미 도와줄 만큼 충분히 도와줬다고 생각하는데?"
"윽……."
사실 그랬다. 무형지독까지 당할 뻔했다는 건, 적도 갈 데까지 갔다는 뜻. 이다음은 투파창귀가 직접 나서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교주의 탈을 쓰고 죽었다. 난 충분히 내 몫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그, 그래도…….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처음 암운곡에 등장할 때만 해도 싸가지 없어 보일 정도로 자신만만했던 녀석이 이제는 우물쭈물하며 불쌍한 태도를 보였다.
뭐 그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천강이 당했던 일들을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야. 너 언제까지 주변에 의지만 할 거냐?"
"뭐?"
"아버지, 흑철마괴, 그리고 나. 언제까지 의지만 할 생각이냔 말이다."
"그, 그게……."
천강이 진악 앞에 가 섰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공포에 질린 소년에게선 그 어떤 투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누구지?"
"무슨…… 의미야?"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이 뭐냐니. 나 진악이잖아. 천진악."
"그래. 네 이름은 천진악이다. 천 년 넘게 천산을 지배했던 '천'씨 성을 가진 자, 천진악. 그런데 뭐가 두려워? 네겐 그 재능도, 힘도, 뒷배도 있는데."
"그, 그치만 지금의 난……."
"그래. 두렵겠지. 그러나 누가 그런 네 상황을 봐줄까? 적이? 아니면 내가?"
천강이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소년에게서 멀어졌다.
"교주와의 계약은 끝났다."
허공으로 천강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마치 이대로 떠나버릴 듯한 분위기에 진악이 급박한 목소리로 천강을 붙잡았다.
"잠깐!"
그러나 멈추지 않는 걸음.
"그럼 나와 새로 계약하자!"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천강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말하라, 미래의 천마여. 그대는 내게 뭘 원하지?"
"날 강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구체적으로."
"날 화경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그때까지 내 대역을 서주는 것도 포함."
"내 몸값은 아주 비싸. 너희 아버지도 천산의 보고를 대가로 치르셨지."
소년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불은?"
"안 돼."
"그에 걸맞은 물건으로 대신할게."
"듣고 결정하지."
진악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다. 문양이 촘촘히 새겨진 그것은 한눈에 봐도 진귀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들어 올리며 진악이 외쳤다.
"교주의 증표인 이 반지로 대신할게."
"……좋다. 그 계약에 응하도록 하지."
소년의 손에 들린 반지가 날아가 천강의 손에 안착했다.
"그럼 우선 몸보신부터 시작해보도록 할까?"
줄곧 뒤돌아 서 있던 천강의 몸이 반 바퀴 회전했다. 그의 손에는 만년설삼이 들려있었다.
"일단 화경부터 후딱 달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