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1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0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1화
111화. 무형지독 (2)
"다시 말해보게. 뭐라고?"
쿠구구구.
땅이 크게 진동하고 나무들이 좌우로 흔들렸다. 장마에 비가 쏟아져 내리듯, 이파리가 위아래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기어이 흑학대신이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천강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고, 독을 사용할 예정인데… 그 독이 전대 교주를 음독시킨 독이랍니다."
전대 교주. 현 천마의…….
'아버지.'
으득. 남자의 입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마냥 희번덕였다.
"지금 흑학대신은 어딨지?"
"아마 슬슬 암운곡에 도착했을 겁니다."
"이미…… 늦어버렸군."
"안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움직인다. 다만 아직 기경만회가 끝나지 않은 상황.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그랬다. 앞으로 반 시진(時辰). 행사의 마지막 폐회식을 할 때까지는 교주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고했네, 흑철마괴."
"아닙니다."
"이 일은 내가 잘 마무리 지을 터이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예를 한 번 갖춘 흑철마괴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제자와 후배가 있을 곳을 향해 나아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진이 녀석…… 어떻게든 가려고 할 텐데. 어찌 설득을 해야 할지가 문제로군.'
무진이는 성품이 온화하고 성실하다.
다른 애들이 금세 삐뚤어지고 악한 길로 빠져드는 것에 반해, 이 아인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한 고집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진이 녀석이 나서면 비격창마도 성질이 급하니 움직이려 들겠지.'
흑철마괴의 미간이 좁혀졌다. 설득이 안 되면 억지라도 막아서리라. 그러나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너 혼자밖에 없는 것이냐!"
***
이각(二刻) 전. 기경만회 교관 휴게실.
소년이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발을 쉴 새 없이 놀린다. 한쪽에서 그걸 지켜보던 비격창마가 툭 물었다.
"많이 걱정되냐?"
"예."
"천강 또한 화경이라 들었다. 너희 형님이 역으로 이길 수도 있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오나, 무려 전대 교주님을 음독시킨 독이잖습니까. 현경의 고수조차도 죽게 만든 독이라면……."
소년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걱정이 되면 가면 되지 않느냐?"
"스승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법은…… 알지 못합니다. 형님께서 늘 그러셨습니다. 스승은 곧 아버지라고.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무슨 일이 있든 그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 무진아. 만약에 말이다. 네 스승이 너로 하여금 나와 싸우길 원한다면 그리해야 한다. 네 스승을 아비처럼 섬기거라.
'좋은 스승이라……. 내가 볼 땐 좋은 제자구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비격창마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왈.
"그럼 내가 너 대신 움직여주마."
"비격창마 님……!"
"대신에, 선배님 말을 거역하는 건 나로서도 좀 부담되는 일이다.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준다 약조해라. 그러면 도와주겠다."
"약조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래. 의뢰 잘 받았다. 만약 선배님 오시거든 바로 말씀드리거라. 비격창마가 흑학대신을 혼자서 쫓아갔다고."
비격창마의 신형이 빠르게 경기장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는 몸을 간단하게 풀고는 암운곡 방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암운곡은 계곡 부근에 위치했다. 다행히도 산세가 뛰어오르기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흑학대신 늙은이…….'
그가 배신자였을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그간 그에게 수많은 교주 세력의 정보들을 건네줬다니.
근 십 년간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두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반 시진(時辰)!'
그렇게 흑학대신이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따라 오르는 그때였다.
싸아아-
등을 타고 오르는 싸한 기운.
등에 매여 있던 거대한 장창이 움직였다. 훙훙- 바람을 가르며 회전을 하더니, 이내 우측에서 들어오는 날붙이를 힘껏 위로 쳐냈다.
채애애앵-
"누구냐."
냇가에 솟아오른 바위. 그 위에 올라선 비격창마의 주위로 하나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쓴 그것들은 기이하게도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총 일곱이군. 이 녀석들이 그 사신이란 놈들이라 이거지?'
일대일로 화경조차도 이긴다 알려져 있는 괴물들.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비격창마의 기다란 창끝이 묵빛으로 물들었다.
"비격창술 제 5식……."
주변의 바람이 나선 모양으로 회전한다. 바람의 기운은 그에게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감싸 안으며 선회했다.
'일격에 끝낸다.'
비격창마의 창끝이 부르르 떨었다. 둥글게 말려 올라가던 창끝의 궤적이 하늘 위로 향했다.
그리곤 솟구쳤다.
"구룡승천!"
창끝이 하늘을 향해 높이 들렸다. 주변에 몰아치던 광풍은 물을 만나 거대한 용오름을 형성했고, 일곱의 사신들을 단숨에 하늘 높이까지 날려 보냈다.
"후우."
놈들의 정보를 전달받길 잘했어.
강철보다 단단한 몸. 한 몸처럼 움직이는 단체행동. 평범하게 싸웠다면 절대 이길 수 없었으리라.
"진짜 웬만하면 이 비기는 쓰지 않는데."
비록 가진 내기의 7할을 소모했지만, 조금 전 일격으로 놈들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마치기가 무섭게, 곳곳으로 녀석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퉁. 퉁. 투웅.
'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야?'
응당 몸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야 하건만, 마치 묵직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그럼 나도 다시 이동을…….'
그러나 비격창마는 다시 자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으로 복면인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하…….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아까보다 세 곱절은 많은 인원. 스무 명의 적들이 사방에서 쇄도해왔다.
내력이 충분하지 못해 구룡승천을 사용하지 못하는 비격창마는 반격은커녕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수십의 공격을 받아내던 중, 촤아악- 사각지대에서 파고든 검격에 비격창마의 왼팔에서 혈흔이 낭자했다.
'젠장.'
뚝뚝 떨어져 내려, 물을 따라 어지러이 흘러 내려가는 핏물. 그걸 보고 있자니 조금씩 현기증이 올라왔다.
'내기가 안 느껴지는 게 너무 안 좋군. 눈으로 좇아서 상대하기엔 지형도 너무 좋지 않아.'
어디 바위 막다른 골목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근처엔 등을 기댈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있으니, 아까 하늘 위로 날려 보냈던 놈들이 피칠갑을 한 상태로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런 그때였다.
"선배 말을 안 듣더니, 꼴 참 좋구나."
"선배님."
비격창마를 둘러싸고 있던 사신들의 고개가 일제히 하류를 향했다. 그곳엔 흉터로 그득한 한 사내가 목을 좌우로 풀고 있었다.
"흑철마괴다."
"놈 또한 처리 대상."
"죽여랏!"
***
"잘 마셨습니다. 맛이 정말 좋군요."
소년의 칭찬에 노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한 잔 더 받겠느냐?"
"저야 주시면 감사하지요."
차를 한 잔 더 건네받은 천강은 반쯤 마시다 입을 뗐다. 그리고는 그걸 흑학대신에게 내밀었다.
"총책임자께서도 한 입 하시지요."
"난 네가 오기 전에 많이 마셨느니라."
"어서 드시지요."
"흠흠. 그렇다면 난 내 찻잔에……."
그러나 소년은 더욱 손을 내밀었다. 찻잔이 흑학대신의 입 가까이 도달하자, 노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이, 이런…….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 못 느끼는 것이냐?!"
"무례하다라. 상대가 마시는 차에 독을 타는 건 안 무례하고 말입니까?"
"무, 뭐, 뭣?!"
챙. 흑학대신의 손에 뽑힌 검 끝이 단숨에 천강의 목 옆으로 향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밖에서 후다닥 사람들이 들어왔다.
신입 교관들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그러나 대답 대신 차를 입에 호로록 머금는 소년.
"어떻게 알았느냔 말이다!"
재차 추궁하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온 대답은 전혀 생뚱맞았다.
"혹시 이게 다냐?"
"뭐?"
"더 없어? 이게 끝이냐고."
"……."
"참네. 뭐 얼마나 대단히 준비하나 했더니, 겨우 이거였나?"
빠득. 흑학대신의 검이 천강의 목 가까이 이동했다.
"어서 대답해라! 어찌 알았더냐!"
"궁금한가?"
소년이 손을 뻗어 자신의 목에 닿은 흑학대신의 검신을 쓸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그 얼굴엔 두려움 따윈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 가득한 표정만이 그득할 뿐.
"예부터 무림엔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지. 질문은 강자가, 대답은 약자가."
장난스럽게 웃던 소년의 눈이 정확히 흑학대신을 응시했다. 그 기세에 흑학대신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질문은 내가 한다."
"이, 이런 건방진!"
흑학대신의 검이 천강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단숨에 천강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다시금 천강의 손에 붙잡힌 검날.
"이익!"
노인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변한다. 필사적으로 용을 쓰나, 소년의 손아귀에 붙들린 검은 빠지지 않았다.
"근데 그거 아냐?"
오른손에 들린 찻잔이 기울어졌다. 말끔히 차를 비운 천강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이거 달라고 해도, 줄 생각 없었어."
이 귀한 걸 왜 양보해?
"하.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지금 네가 마신 건 희대의 독……."
"무형지독이라고?"
"무형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왜 그걸 알고도 먹었는가가 중요한 거 아닐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뒤에 있던 신입교관들도 무기를 빼 들어 천강의 목에 겨누었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엔 여유가 그득했다.
"대체 왜 먹은 것이냐?"
독 중에 최강의 독이라 알려진 극독을.
소년의 입 끝이 귀에 닿았다.
"아아. 이걸 먹어도 이길 자신이 있어서. 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이런 건방진……!
"그러니 좋게 말할 때 들어라. 무기 버리고 얌전히 협조해."
"죽어랏!"
사방에서 날붙이들이 소년을 향해 짓쳐들었다. 천강은 그걸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주었다.
"이, 이 자식 타격이 없어?!"
당황한 음색이 터져 나오는 적들. 당황할 것 없다며 흑학대신이 소리쳤다.
"흡공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밀어붙여! 무형지독 때문에 얼마 못 버틴다!"
무형지독.
색도, 맛도, 향도 없는 물의 형태를 한 액체.
마시는 순간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내기를 운용할 때마다 온몸에 퍼져 나가며 몸을 마비시키고 종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 퍼져 나가는 속도가 워낙에 급박하고 빨라, 현경이라도 일다경(一茶頃)도 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게 만드는 극독 중의 극독이었다.
"네놈이 제아무리 흡공을 익혀 강하다 한들,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고작해야 내기를 최소한으로 운용해 버티는 게 고작일 터. 그 결정적인 증거로, 원래라면 날붙이가 몸에 닿는 순간 상대의 내기를 쪽 빨아들여야 했으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죽는 건 시간문제!
흑학대신이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구나!"
쾅. 쾅쾅.
사방에서 강기에 둘린 날붙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로 인해 몸을 작게 흔들어대며 소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욕심 많은 놈들은 꼭 매를 들어야 말을 듣는다니까.'
천강이 내기를 운용했다. 갑자기 날붙이가 천강의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 어어?"
"이, 이 상태로 흡공을?!"
"버텨! 이놈도 최후의 발악일 뿐이다! 이미 독이 온몸에 퍼졌어!"
그러고는 버티는 녀석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놈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깨달은 것이다. 잘못돼도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흑학대신! 어떻게 된 거야! 독 먹인 거 맞아?!"
"확실히 먹였다!"
"그런데 어떻게 내기 운용을 이렇게 잘해?! 사기당한 거 아냐?!"
서, 설마 여울나무 쪽에서 준 독이 가짜…….
흑학대신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동요를 본 신입교관들이 행동을 바꾸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기가 벌써 반이 사라졌어! 이대로는 위험해!"
"도망가자!"
파바박-
"호오?"
신입교관들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내질러 흡공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흑학대신과 자신들의 무기들을 버려두고는 밖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어, 어디를 가는 것이냐! 나도 도와주고 가야지!"
그러나 천강이 움직일 경우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라는 걸 깨달은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사, 살았어!"
"이대로 여울나무까지 튀자!"
그곳까지 도망가 전향을 신청한다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
교관들이 남은 내기를 쥐어 짜내며 전력으로 굴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시원한 공기가 느껴지고, 환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사히 탈출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한 차례 땅에 진동이 일었다. 웬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출구 정중앙에 서서 그들을 막아섰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린 건 그 직후였다.
"호랑말코 같은 간자 새끼들! 한 놈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줄 알거라!"
한 손에 망치를, 다른 손엔 끌을 들고 서 있는 그는 맹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