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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살마신 109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34회 작성일

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9화

109화. 쭉정이

 

 

늦은 저녁. 암운곡 숙소 근처 식당.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게 안쪽부터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아이들 앞으로는 각종 요리가 그득히 쌓여 있었고, 이내 빠르게 그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던 흑학대신은 그걸 보고는 의문을 드러냈다.

"이보게, 흑철마괴. 저녁 식사가 바뀌었나?"

"소요상회에서 후원이 들어왔습니다."

"소요상회가? 그것참 간만이구먼."

흑학대신이 턱을 쓸었다.

소요상회.

중원과 서역을 오가는 상단이다. 그러다 보니 천산에 들르는 경우가 많으며, 역대 교주들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었다.

마인들의 소굴인 천산에 들어와 물건도 팔고 무사히 지나게 해주는 대신, 일종의 통행세를 받은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기경만회의 시기에 맞춰 등장한 경우 이렇게 음식을 후원하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흑학대신은 그 부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구먼. 그럼 잘들 먹고 일찍들 들어가시게."

"흑학대신도 함께 하시죠."

흑철마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만들려 하자, 노인이 손을 저었다.

"난 잠시 들릴 데가 있어서 말이네. 잘들 즐기고 내일 아침 보도록 하지."

"예, 그럼."

흑학대신이 유유히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비격창마가 흑철마괴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선배님."

"듣고 있다."

"그냥 저대로 놔둬도 되는 겁니까?"

낮에 비격창마도 음식을 먹어보았다. 약 1분가량을 삼키지 않고 씹자 입안이 쓰라렸다.

"아직 흑학대신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그렇지만……. 후우. 그리 의심을 하는 이유는 있으실 것 아닙니까."

흑철마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진짜 큰일이 날지 모릅니다. 어서 잡아야 합니다."

"그래. 잡아야지."

"그럼 지금 바로……."

"근데 지금은 아니다."

"예?"

손과 목, 얼굴. 온몸이 상처로 그득한 사내가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비격창마가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친위대에 들기 전에는 과묵하고 그러더니, 자리가 사람을 망쳐놓는군."

"윽……. 죄송합니다."

"들어라. 친위대는 늘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내가 보고를 올림으로써, 내가 행동함으로써 어떤 일이 발생할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흑철마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비격창마 또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 함께 합석해 즐거이 소리높이는 신교의 사람들. 그리고 외부인들.

"흑학대신은 잡을 수 있다. 교주님에게 보고할 수도 있고.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기경만회는 신교와 외부인에게 보이는 자리. 이 행사가 끝날 때까지는 가급적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

"뻔히 문제가 될 걸 알고도 말입니까?"

"저울질해보는 거지. 어느 쪽이 더 적은 피해가 될지를……. 냉정하게 말이야."

주인장이 국수를 들고 나온다. 그걸 받아들며 흑철마괴가 말을 이었다.

"일단은 대기한다. 대신,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긴장은 유지해야겠지."

"후우……. 예. 한 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전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네요."

"금방 늘 거다."

몇 번 실수도 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 죽고 그런다면 말이지.

흑철마괴의 시선이 흑학대신이 사라진 곳을 향했다.

 

***

 

'이상하구먼.'

너무 시기적절한 운에 흑학대신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흑철마괴. 늘 표정에 변화가 없어 그 얼굴만 가지고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독을 탄 걸 알아챘는지 못 알아챘는지를.

'준비도 처리도 완벽했다. 증거가 나올 리 없어.'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흑철마괴는 모르겠지만, 그 옆에 함께 있던 비격창마의 표정이 눈에 계속 밟혔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옮기던 흑학대신의 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비격창마는 늘 단순해 얼굴 위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지.'

그렇기에 그동안 이용해 먹거나 속이기도 쉬웠고.

그런데 불과 몇 시진 사이에 표정에 적의가 올라오다니…….

'걸린 게로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주변에 감시가 붙기 시작하면 그땐 움직이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흑학대신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빠르게 여울나무 숙소로 향했다.

"적삼혈마님. 암운곡의 총책임자가 얼굴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적삼혈마가 고개를 돌려 투파창귀를 바라보았다.

"들어오라 해라. 둘보다는 셋이서 차를 마시는 게 덜 적적하겠지."

그렇게 여울나무 교관 휴게실로 들어온 흑학대신은 꾸벅 허릴 숙여 투파창귀에게 예를 올렸다.

"간만에 뵙습니다.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아. 내일 시합 결과에 따라 한 해의 예산이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은가? 그게 궁금해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래. 자네도 그동안 잘 지냈는가?"

"예."

"이쪽으로 앉지."

적삼혈마에게서 차를 건네받은 흑학대신이 한 차례 음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향이 좋군요. 역시 적삼혈마시오."

"흑학대신에 비하면 멀었지요. 그래도 마교에서 차를 논할 때면 절대 빠지지 않는 분 아닙니까?"

"허헛. 그리 말씀해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이 될 무렵, 투파창귀가 훅 끼어들었다.

"근데 이 시간엔 무슨 일로 왔나?"

투파창귀는 뱅뱅 돌려 말하는 걸 싫어했다. 농담이나 덕담 또한 마찬가지. 인사치레 또한 한두 마디면 족하다 생각하는 인물.

안 그래도 심리적으로 쫓기던 흑학대신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적삼혈마. 음식에 독을 타는 건 실패했소이다."

"흠? 그것참 실망이로군. 그런 간단한 일에 실패하다니. 쯧쯧."

할 말이 없다는 듯 흑학대신의 고개가 한 차례 숙여졌다. 투파창귀가 의자에 몸을 실으며 물었다.

"그래. 실패했다는 사실을 이 시간에 직접 보고하러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엇인가?"

"그게…… 아무래도 교주 쪽에서 절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제가 내일 오전에 빠져나갈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시큰둥한 표정이 투파창귀의 얼굴에 올라왔다. 흑학대신은 간절한 어조로 다시금 도움을 호소했다.

"예부터 전 여울나무와 한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르신."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흑학대신과 적삼혈마는 조용히 상석에 앉은 남자의 결정을 기다렸다.

"……좋다. 도와주도록 하지. 네 뒤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할 터이니, 정오가 되기 전 마을을 뜨거라."

"감사합니다, 대인! 도와주신 은혜 반드시 갚겠나이다!"

흑학대신은 허리를 수 차례 꾸벅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의 기척이 사라지자, 적삼혈마가 조용히 물었다.

"투파창귀님. 저희 쪽과 구린 일로 연관이 많이 된 자입니다. 이젠 슬슬 처리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적삼혈마. 네가 이제야 좀 과감히 행동하는구나. 암. 처리해야지."

"그럼 내일 사신들을 붙여서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도망가는 데 보탬을 해줘라."

"예?"

"아예 없는 것보단 쭉정이라도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 불쏘시개로라도 쓰면 그만이니."

투파창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아주 활활 잘 타오르면 좋겠구만."

"……."

"그래. 그럼 예정보다 조금은 빨라지는 것이냐?"

"예. 한나절 정도 빨라질 것 같습니다."

"밑의 것들이 미리 단단히 준비하도록 해라. 무려 11년을 숨겨 키운 자식이다. 그런 아들이 믿던 부하에게 음독 당해 죽는 것이니, 이번에는 교주 쪽에서도 쉬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예."

"근데 정말 아쉽구만. 청청이 준비만 되었어도 일이 참 편해질 것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성급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다. 뭐 어떡하겠나. 인생이 늘 딱 맞춰 기회가 오는 것도 아니고."

그때 타닷- 문 뒤편에서 누군가의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조금씩이지만 점점 멀어지는 기운.

적삼혈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투파창귀가 제지했다.

"놔둬라."

"괜찮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

"냅둬라. 지금 저 애 하나가 뛰어본들 변하는 건 없다."

교주 세력을 찾아가 말해본들 믿지 않을 것이고. 설령 믿는다 해도, 그리하여 흑학대신이 잡히더라도 이쪽에선 모른다며 발뺌하면 그만.

"지금 교주 세력은 싸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싸우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갈 것이다."

한편 그 시각.

교관 휴게실 밖에서 투파창귀과 적삼혈마의 이야기를 엿듣고 자리를 이탈 중인 건 청청이었다.

'알려야 해. 빨리.'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한쪽밖에 없는 다리가 그녀를 계속 붙들었다. 그래도 힘들게 걸음을 옮겨 마침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출입문에서 통제당했다.

"취침 시간이다."

"저 잠깐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교관님?"

호접일검이 고개를 저었다.

"교관이 둘이기 때문에 통제에 따라줘야 한다. 특히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내일 시합이 있는 넌 더더욱 쉬어야 하고."

- 청청, 내일 시합 때 말하는 건 어때?

'너무 늦어.'

아마 흑학대신은 시합이 시작되는 순간 바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무진이와 자신의 경기는 맨 마지막. 그땐 많이 늦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방법이 없어.'

다리가 한쪽밖에 없어 마음껏 뛰지 못하는 그녀에겐 암운곡 숙소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교관을 재빨리 지나쳐도, 겨우내 두 발자국 내딛고 붙잡힐 것이었다.

- 잘못하면 너도 의심받아. 그냥 내일 시합에서 싸우면서 전음으로 이야기하자.

칠현금 구소환패의 설득에 청청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교관님."

 

***

 

'확실히 일귀의 보고대로군.'

기경만회 마지막 경기가 펼쳐지는 당일. 사백동굴에서 점심을 먹는 천강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렸다.

어느덧 동굴 내로는 기감훈련을 한 이들이라면 못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네."

"너도? 나도 그래."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4, 5년 차가 있었다면 더 확실히 의문을 표했을 테지만 그 대부분이 기경만회 행사에 나가 있는 만큼, 남은 아이들은 그저 오늘 운세가 좋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초보 티를 팍팍 내는군.'

신입 교관으로 배정받았다 해서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겨우 이런 풋내기 수준들이었다니.

그때 천강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봉술 교관이었다.

"천강."

"예, 교관님."

"총책임자께서 잠깐 단둘이 이야기 좀 하기를 원하신다."

"음? 총책임자님께서 저를요?"

소년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총책임자 사무실에 계신다. 따라와라."

남자가 앞장선다. 소년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교관은 지하수로를 통해 암운곡으로 향했다. 총책임자 사무실은 암운곡 굴 안쪽 깊숙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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