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0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8화
108화. 흑학대신
"그럼 현 시간부로 기경만회를 시작하노라!"
와아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천산의 기경만회가 시작되었다.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묵현에게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도련님. 흑선마희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그림자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건물 입구로 나아가자, 흑발이 매력적인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선이 고스란히 보이는 도발적인 옷을 입고 있던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경기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물론이죠. 오랜만이에요, 우리 아들."
"식사는 하셨습니까?"
"난 아직인데, 아들은?"
"……함께 하시죠."
저잣거리를 거니는 두 모자.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
사람들이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향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가는 곳마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녀의 행태에 묵묵히 걸음을 걷던 묵현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옷을 좀…… 제대로 된 걸 입고 오시지 그랬습니까."
"어멋. 별로인가요? 나름 우리 아들 취향을 맞춰보려 노력한 건데."
"이왕 어머니 노릇 할 거면 복식도 제대로 갖추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슬퍼라. 자꾸 그러면 이 어미는 슬픕니다."
눈물을 닦는 흉내에 묵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그림자가 앞으로 나와 한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은 나름 마교 내에서 거물급들만 이용할 수 있다는 이름난 음식점이었다.
"명월객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아니다."
"혹시 존함이……."
"흑선마희와 그 자제분 되신다."
"아……. 그럼 이쪽으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두 사람은 능숙하게 걸음을 옮겨 계단에 올라섰다. 이곳은 총 6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대략 그 사람의 마교 서열이 그가 올라가 식사를 할 수 있는 층수였다.
현재 흑선마희가 갈 수 있는 층수는 4층.
대낮이라 그런지 4층에는 단 한 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두 사람을 그와 조용히 합석시키고 물러났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모두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잘 지내다마다요. 풍월대주는 날이 갈수록 잘생겨지시는군요. 호호호."
"하핫. 과찬이십니다. 앉으시지요. 국수로 시켰는데 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국수를 좋아하시나 보죠? 매번 오셔서 국수만 드시는군요."
"예. 천산에 오면 이 집은 꼭 들릅니다. 이것 때문에 이곳으로 배달을 오는 보람이 있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풍월대주는 묵현에게 서신 한 장을 내어놓았다.
묵현은 그것을 집어 곧바로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뭐라고 쓰여 있나요, 아들?"
"궁의 움직임이 갑자기 급박해졌다는군요. 흑살마신의 등장이 제법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소년의 말이 없어졌다. 왜 그럴까 궁금한 흑선마희는 고개를 내밀어 그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다.
『……신선환을 복용한 이가 구파일방의 2할을 넘어섰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5년 안에 반수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
"속도가 더욱 빨라졌군요."
"예. 서둘러 마교 쪽을 마무리 지어야 할 듯싶습니다."
***
사백동굴 안. 아이들이 훈련하는 걸 가만 지켜보던 검술교관에게 한 아이가 다가왔다.
"교관님."
"무슨 일이냐?"
"저 검을 연속으로 휘두르는 것이 약간 불안정해서 그런데, 어디가 문제인지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에서 소년은 검을 움직여 빠르게 연격을 내질렀다.
'세 번째 휘두르는 박자에 허리 중심축이 잘못되었군.'
그러나 교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이거였다.
"연습 부족이다. 더 연습해라."
어차피 여울나무 측이 마교를 장악하고 나면 모두 죽을 아이들. 굳이 얘들에게 가르침을 줘야 할 이유는 없지.
"네에."
소년이 꾸벅 허리를 숙여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뒤로도 몇몇 아이들이 이런저런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아이들의 연습 부족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저 멀리서 도술 교관이 손짓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각자 훈련하도록."
그렇게 모인 암운곡 교관들. 봉술 교관이 주위를 슥 한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방금 연락이 왔네."
"오. 뭐라 하던가?"
"기경만회 시합 마지막 날, 소교주를 암살할 인물이 올 거라는군. 그의 지시를 따르란 이야기일세."
"소교주의 암살이라……. 드디어 본격적인 싸움의 순간이 도래했구만."
안 그래도 만천옥주 세력의 몰살로 살얼음 걷는 분위기다. 그런 상황에서 소교주가 암살되면 전면전은 불가피해질 것이리라.
"협상은 잘 진행했겠지?"
"물론. 상급 영약을 주기로 약조 받았네."
"좋군."
교관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간자 노릇을 하다 싸움이 커질 때 여울나무로 들어가면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으리라.
"앞으로 이 흐름을 잘 타, 세 번 정도 더 얻어먹으세나."
"하하핫. 그것참 좋은 생각일세."
한편 그 시각. 교관들끼리 모여 작당 모의를 하는 그 순간에, 천강은 오늘도 열심히 네 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토끼보다도 작은 동물. 짧은 털과 긴 꼬리를 가진 설치류.
사사삭-
땅 위를 돌아다니며 먹을 걸 함께 찾는 둘의 행태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흡사하다.
코를 킁킁대고 앞발로 무언가를 짚어 데굴데굴 굴려보는 것까지.
그러던 어느 순간, 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하염없이 그 행동을 따라 하던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척에 쥐가 깜짝 놀라 제집으로 후다닥 도망갔으나 천강은 더 이상 그것을 쫓지 않았다. 대신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우. 이로써 총 3마리인가?"
십일 동안 두 마리 성공. 첫 성공에 두 달 가까이 걸렸으니, 정말 엄청난 속도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슬쩍 남은 신목의 과실을 확인해 보았다. 고작 네 개가 다다.
'이젠 약발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네.'
그러나 이젠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자신감도. 그러니 이전처럼 막연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더는 없으리라.
으자자자! 기지개를 쭉 한번 켠 천강은 사백동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아직인가?'
최근 암운곡 내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사람은 뭔가 큰일을 앞둘 경우, 본인도 모르게 그 기세가 주위로 흘러나오는 법이다.
흑철마괴와 비격창마가 사라지자 신입교관들의 기이한 기류는 더욱 뚜렷해졌다. 뭣 모르는 아이들조차 느낄 정도로.
- 요새 좀 뭔가 평소랑 느낌이 다르지 않냐?
- 너도 느꼈어? 나도 요새 잠자리가 사나워서 자다 깨다 한다니까.
'흠. 기경만회 기간 중에 움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기경만회가 시작한 지 어느덧 이틀째. 그러나 아직까지 적들은 깜깜무소식이었다.
소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번에 흑철마괴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천강도 적이 정확히 언제 움직일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날 죽이려 한다는 것. 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암살자들의 방식은 늘 뻔하다. 기다리고 기다려, 상대가 의아해하며 긴장을 푸는 박자까지 늦춘다. 그러니 앞으로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미룰지도 모를 일이다.
'자꾸 늦추니 얼마나 기발하게 나올지 궁금해지는군.'
소년의 시선이 왼손을 향한다. 손바닥이 시커멓고 뜨겁다.
천강은 폴짝 뛰어 바위와 자갈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뜨겁게 달아오르던 몸이 식고 이런저런 생각이 하나둘 정돈되기 시작했다.
'적이 어떻게 나오든 난 나대로 늘 최선을 다하면 그만.'
그것이 전생에 흑살마신으로 살면서 천 번 가까이 암살 시도를 받아 터득한 일종의 경험치.
그때 폭포 쪽에서 웬 기척이 느껴졌다.
물에서 빠져나와 그곳을 살펴봤다. 으슥한 그늘이 진 곳에 깨알 같은 글씨로 무언가 쓰여 있었다.
『기경만회 경기 마지막 날, 움직일 예정』
씨익.
***
와아아-
경기장 내로 뜨거운 환호성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암운곡과 여울나무의 대련을 보며 누가 이길지 이야기하고 내기했다.
그 모습을 각각의 대기실에서 바라보는 양 진영 교관들.
"기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군요."
비슷한 점수대를 형성하는 걸 보며 비격창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티가 납니다."
반년간 지도해줄 교관이 없었음에도 박빙의 승부라니. 흑학대신 또한 같은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내일이 관건이겠구먼."
"2년차 싸움에서 갈리겠지요?"
"그럴 걸세.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마두의 자금력은 무시하지 못하는 법. 일단 5년차는 일휘혈마의 자제인 소운이 이길 것이고, 3, 4년차에선 우리가 밀리겠지."
"이번 여울나무 1년차가 별 볼 일 없으니 낙승일 테고, 그럼 무진이란 아이가 문제로군요."
비격창마는 슬쩍 흑철마괴의 눈치를 보았다.
흑철마괴.
알려진 게 거의 없는, 그러면서도 교주의 친위대 중에서는 외부적으로 제일 많이 활동하는 인물.
그는 마두가 아니었으나, 그의 신위를 따져본다면 대략 20-50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 그의 제자, 무진.
'후계자를 만들 생각이 없던 그가 선택할 정도면 아마 재능은 매우 뛰어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상대에게 있었다.
여울나무 숲 2년차 대표 청청. 여울나무의 최강자이자, 화경에 도달했다고도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니 안타깝게도 올해의 결과는 패배이지 않을까 예상하는 비격창마였다.
"그럼 난 잠시 바람이나 좀 쐬고 와야겠구먼. 이따들 봄세."
오늘의 마지막 경기가 끝이 난 걸 확인한 흑학대신이 경기장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비격창마는 슬쩍 흑철마괴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배님. 이제 시합도 막바지에 다다랐는데, 지금부터 뭐 하실 겁니까?"
"……흑학대신을 뒤따른다."
"예?"
흑철마괴는 말없이 저 멀리 이동 중인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이번 기경만회에 참여하며 교주로부터 친위대에 발탁된 비격창마는 의문을 가진 채 조용히 그를 뒤따랐다.
음식들을 살피는 노인.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식당에서 도로 빠져나가자, 그제야 조용히 있던 비격창마가 물었다.
"선배님, 흑학대신은 우리 편 아닙니까?"
"작년 기경만회 때 아이들이 복통을 호소했던 사건 기억나나?"
"예. 그때 난리도 아니었죠. 그로 인해 다 이겨가던 전황이 뒤집힐 뻔하지 않았습니까?"
"난 그때 그 일의 범인을 흑학대신으로 생각한다."
"예?"
비격창마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흑학대신이 암운곡 총책임자로 몇 년씩이나 일한 건, 그만큼 교주님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니."
흑철마괴가 무심한 얼굴로 음식을 하나하나 먹어보며 대답했다.
"못 믿기에 그곳에 세워본 것이다. 탐욕이 많은 인간이라면, 높은 자리에 올려둘 경우 그 행태가 더욱 두드러질 테니까."
흑학대신 또한 과거 교주의 은덕을 입어 데려온 인물. 비격창마와 함께 흑철마괴가 검증 중인 대상이었다.
친위대로 들여도 되는지 아닌지.
그러나 이젠 그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흑철마괴가 바닥에 음식물을 뱉어내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전해라.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