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0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6화
106화. 백발괴의
"백발괴의와 그 제자들을 당장 불러들여라."
천마의 명을 받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그들의 거처로 향했다. 조금 있자, 그림자들을 따라 한 노인과 청년이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꽤나 술주정 좀 부리게 생긴 괴팍한 인상의 노인네와 깔끔하고 예의 바른 청년.
"신교의 하늘을 뵈옵니다. 백귀입니다."
청년이 허리를, 노인이 고개를 숙인다. 인사를 마친 백발괴의는 귀를 후비적후비적 파며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교주님께서 하지 말란 건 이제 꼬박꼬박 지키고 있습니다만."
"정말인가? 백귀, 자네가 대답해 보게. 자네 스승이 정말 내 말을 지키던가?"
백귀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 스승님이 교주님 말을 온순히 따른다면, 그건 곧 죽을 때가 된 것입니다."
"이런 못난 놈! 스승의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일러바쳐? 예끼, 이눔아! 천벌이 내릴 것이다!"
"예예. 그러니 스승님 어서 이실직고하시지요. 이번에는 저 몰래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
"사고를 치다니! 하늘 같은 스승 보고!"
반응을 보아하니 한참을 실랑이할 상황. 교주가 헛기침을 해 그들의 대화를 제지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자네 제자 하나가 안 보이는군?"
"아아. 그 썩을 놈을 말하는 거라면, 어느 날 갑자기 궁시렁궁시렁 대더니 나갔습니다. 뭐 이제 독립할 때가 된 게지요. 이래서 제자 따위 키워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
"에이. 스승님. 그건 아니지요. 흑귀는 스승님의 속옷 빨래가 싫어 도망간 것 아닙니까?"
"이눔이? 교주님 앞이라고 스승이 스승으로 안 보이더냐!"
후우. 교주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통제가 안 되는 그 모습에 천강은 무언가를 느꼈다.
왠지 한탕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직감?
그에 신목의 과실을 가지러 가는 대신, 그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그들 앞에 들고 온 사신을 내던졌다.
"이번엔 또 웬 애새끼가…… 으응?"
천강을 향해 윽박지르려던 노인의 시선이 사신에 가 닿았다. 그는 곧바로 몸을 낮춰 사신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이내 확 찌푸려지는 인상. 노인이 천강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네 이놈! 설마 이거 네 짓이더냐!"
"예? 뭐 두들겨 팬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만."
"감히. 누가 맘대로 이리 손상을 내놓으라 했느냐!"
"이거 영감님 작품입니까?"
"아니다!"
"응?"
그럼 왜 화를 내는 거야? 천강이 이해를 못 해 미간을 찌푸리자, 백귀가 다가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승님은 뭐든 신기한 걸 보면 자신의 물건인 양 구십니다."
"그 이야기는 그쪽들이 만든 게 아니라는 뜻?"
"저희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어디에서 구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분명 저희와 완전히 똑같다고 할 만큼 유사한 기술을 썼는데 스승님과 전 이걸 만든 적이 없거든요."
"그럼 이걸 만든 이는 한 명밖에 없다고 봐야겠군."
같은 기술을 가졌으나, 이곳에 자리하지 않은 한 사람.
천강이 교주를 올려다보았다. 말뜻을 이해한 교주가 백발괴의에게 말했다.
"잠깐 자네와 제자가 봐야 할 곳이 있네."
갖은 실험도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굴 현장.
그걸 찬찬히 살피는 백발괴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을 살피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백귀야."
"예, 스승님."
"이 못난 놈…… 잡아와야겠다. 중원에 연통 날려라."
그걸 본 천마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표정이 올라왔다.
"이제 저들이 나섰으니, 사신 일은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되겠군."
"저들이 누구기에 그런 겁니까?"
"저 늙은이는 암존(暗尊)의 동생이다."
암존(暗尊).
현 무림에 절대강자 중 하나.
그 자신의 얼굴은 물론 그 조직에 대한 대부분이 비밀로 싸여있는 인물이다.
약 10년 전 그는 일귀의 스승인 살혼에게 중원의 제1살수 자리를 넘겨주면서 암살의 업을 접었으나, 세상에선 아직도 그를 암살에서의 일인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암살계에선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었는데, 오룡대의 암룡 또한 그를 닮고 싶다는 의미로 그 칭호를 따 자신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여기서 뒹굴어 다니고 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몸을 의탁하기를 바라더군. 정파에서 인체실험을 하다가 걸려, 무림맹으로부터 살벌한 경고를 받았다고 들었다."
하……. 대단하구만.
인체실험을 하다 걸렸는데 경고 차원에서 끝나다니. 새삼 암존의 위세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건 그렇고, 암존이라 이 말이지?
"어디 가느냐?"
"잠깐 저 노인분과 이야기 좀 나눠볼까 해서 말입니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소년의 웃는 낯을 본 교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강은 가만히 서서 노인을 살펴보았다. 그리곤 어떻게 공략해 나갈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고집이 굉장히 세 보이는군.'
고수와 안면을 익혀두면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 당장 천산의 보고 어르신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빚을 지우면 더 좋고.
기절해 있는 사신의 몸 곳곳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는 노인에게 다가간 천강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집중력이 굉장히 좋은 편인지, 노인은 천강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그에 똑같이 다가와 쭈그려 앉으며, 백귀 왈.
"스승님."
"뭐 인마?"
"스승님."
"나 바쁘니까 다음에 얘기해라."
"스승님."
"이런 우라질……!"
천강이 보기에 백귀는 선천적으로 매를 버는 인성이었다. 그래도 기회를 가져다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노인에게 운을 떼었다.
"살펴보니 어떻습니까?"
"뭘 어떻긴 어떠냐! 네놈이 이곳저곳을 다 망가뜨려 놔 엉망이지 않느냐! 이런 귀한 재료를……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정말 꺼집니까?"
"얼른 안 꺼지냐!"
"흠.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이놈들이 허구한 절 암살하겠다고 찾아와서…… 지금껏 죽인 녀석들만 쉰다섯인데."
"응?"
"앞으로도 계속 쭉- 찾아올 텐데. 하아. 다음부터는 생포 안 하고 그냥 다 죽여야겠다."
"잠까아아안!"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방금 한 말이 무엇이냐? 진정 참말이더냐?"
"뭘 말입니까? 아, 이거 놔주십시오."
"어서 말하거라!"
"저 기분 나빠서 그냥 돌아갈 겁니다. 그럼 평안하십시오."
그러고 인사하고 걸음을 옮기자, 노인이 다짜고짜 천강의 등짝에 매달렸다.
"안 되느니라, 이 염병할 자식아!"
아, 진짜 상대 못 해 먹겠네.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어후. 장난 아니다. 그에 천강은 진심을 담아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앞으로 이놈들이 오거든 꼭 생포해서 내게로 가져오거라."
"뭐 그건 전혀 어렵진 않지만…… 그럼 어르신께선 제게 무얼 해주시겠습니까?"
"무얼 해주다니. 노인공경 모르느냐? 노인이 부탁하면 젊은이로서 들어줘야지?"
천강과 백발괴의의 눈이 마주쳤다.
이놈의 늙은이가?
"아. 안 합니다. 저 그냥 갑니다!"
"자, 자, 잠깐! 좋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냐?"
"이놈들 하나하나의 무력이 화경에 해당합니다. 그런 놈들을 생포해 오는 거니까 쉽지 않겠죠?"
"그래. 그래서?"
그래서라니? 왠지 호기심 왕성하고 뻔뻔하고 욕심 많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 드는 건, 마냥 기분 탓은 아니리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십시오."
"흠. 그에 상응하는 대가라……."
노인이 눈을 빛냈다.
"내가 네놈의 육체 개조를 해주겠노라. 어떠하느냐?"
"거절합니다."
"내 의술과 인체 개조의 능력은 중원 최고이니라. 단숨에 무림에서 최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늙은이, 허풍이 장난 아니네.
"자꾸 이상한 제안하면 그냥 갑니다?"
"끙. 그, 그러면……."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아무런 대가도 꺼내지 못하는 그를 보며, 천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을 업은 채 걸음을 옮기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신과의 거리는 꽤 되었고, 백귀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남아 근처에는 오직 백발괴의와 천강 단둘뿐이었다.
그에 천강은 슥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그럼 어르신 혹시 암존(暗尊)에 대해 아십니까?"
"암존? 그래. 내 형님 되시지."
"그럼 나중에 그 형님에게, 제게 빚진 게 있으니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고 약조해주십시오. 그러면 앞으로 잡아 오는 저것들 다 영감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노인이 버럭 화를 낸다.
"예끼, 이눔아! 어디서 겨우 그것 하나 가지고 무림의 절대강자 중 하나인 암존을 움직이려 드느냐!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직접 잡으러 다니면 그만이니라!"
"그럼 그렇게 하시죠. 근데 쉽지 않을 겁니다. 이것들 내기가 전혀 안 느껴져서 작정하고 숨으면 그 누구도 못 찾거든요."
"으잉?"
백발괴의의 시선이 사신에 가 닿는다. 확실히 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야 암살당하는 입장이라 사냥이 가능하지만, 과연 이 넓은 중원에서 단 하나라도 쉬이 찾을 수 있으실지. 쯧쯧."
"크흠. 그,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려 암운곡 소교주입니다. 저 같은 매력적인 미끼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노인의 시선이 천강을 위아래로 훑는다. 소년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이 소년보다 더 나은 미끼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크흠. 그, 그래도 겨우 저것들 생포하는 일 하나에 형님 이름 팔아먹었다간…… 나중에 한 소리를 들을 텐데……."
"그러면 제가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천강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펼치자 짙은 흑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과거 흑사의 독무에 당해 녹아내리던 사신의 몸에서 채취한 가루였다.
"그게 무엇이냐? 흠. 흑진주는 아니고……. 흑요석도 아닌데?"
"사실 이것의 정체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저것들 몸 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뭐라?"
등에서 내린 노인은 앞으로 후다닥 돌아와 주머니 가까이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강이 슥 손을 수거하자, 노인의 시선은 닭 쫓던 개 마냥 허공을 응시했다.
"뭐 하는 게냐! 어서 이리 내놓거라!"
그럴 순 없지. 천강의 얼굴에 개구쟁이와 같은 표정이 올라왔다.
"앞으로 사신들을 생포해 드리고, 거기다가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제안 어떠십니까?"
노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는 소년의 손에 들린 주머니와 백귀 옆에 누워 있는 사신을 수 차례 번갈아 쳐다보았다.
'눈이 무슨…… 황금 보듯 하는구만.'
백발괴의의 눈에 욕망의 빛이 어린다. 마치 맛난 음식이라도 본 것처럼 입맛을 쩝쩝 다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
"조,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암존(暗尊)에게 제 이야기 꼭 하셔야 합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고."
"알겠다. 그러니 어서 그것을 내게 다오."
건네주자 마치 보물처럼 꼬옥 품에 안는 노인. 이내 위에를 열어,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으며 좋아한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영감님."
"그래그래."
그렇게 천강은 백발괴의를 통해 암존에게 빚을 지울 수 있었다.
검은 가루에 푹 빠진 노인은 천강의 인사에도 웅얼거리듯 대답하는 것에 그쳤고, 이내 미치광이처럼 혼자 주절주절 떠들며 사신을 향해 돌아갔다.
'그럼 난 이제 신목의 과실을 섭취하러 가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