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0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4화
104화. 신목의 과실
열목 폭포 인근. 작은 숲.
한 소년이 토끼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운 좋게 생사경(生死境)의 단서를 발견하고는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인 천강이었다.
머리 위로 천해지경이 팔랑팔랑 쫓아다니며 다음과 같은 글씨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 외에 99가지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그럼 자연스레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사경(生死境).
신선처럼 자연을 의지로 다룰 수 있는 경지.
물론 자연경(自然境)에 비하면 제약이 많긴 하지만, 어찌 됐든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아무튼, 앞으로 99가지 다른 생물을 이해만 한다면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은 천강에게 때아닌 뜨거운 자극이 되어 주었다.
……딱 닷새 동안만 말이다.
천강은 바닥에 쓰러지며 생각했다.
'와아. 내가 이걸 어떻게 성공했지?'
분명 심안(心眼)을 얻어 더 쉬워졌을 텐데도 좀처럼 진전이 없다. 그에 왜 그런가 하여 가만 생각을 정리해본즉, 그 이유는 이러했다.
'연화 땐 독목신공이라는 자극적인 당근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도저히 의욕이 안 나는군.'
하긴. 의욕이 난다 한들, 50일 넘게 무언가를 따라다니고 그것에만 관심을 준다는 것 자체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같은 음식을 십 일간 먹어도 지겨운데, 50일 넘게라니…….
"진짜 죽겠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천강이 파르르 떨어대자, 신병이기들이 한마디씩 해댔다.
- 어허. 겨우 그 정도 하고 죽을상이냐!
- 퍼뜩 일어나지 못할까!
- 힘내세요, 소년!
"아니, 힘을 내라고 해도 말이지……."
뭐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지. 진전이 요만큼도 안 보이니 의욕이 빠졌다.
'후우.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는데.'
결국 천강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천해지경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혹시 지금 제 상황에 좀 도움이 될 만한 거 뭐 없습니까?"
그러자 기존에 쓰여 있던 글자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오. 그냥 해본 말인데, 방법이 있는 것인가!
눈을 빛내는 소년 앞에 천해지경이 펼쳐졌다.
『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쇠와 돌도 뚫어진다.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윽. 주자님 말씀이네요. 그런 거 말고 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거 없습니까? 음…… 예를 들면, 이해력이나 감응력을 올려주는 물건이라던가 뭐 그런 거요."
마치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소년의 머리 위에서 비급이 고요히 팔랑거렸다. 그러다 누런 공백 위로 빠르게 다시 글자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천강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천산의 중턱엔 예부터 한 나무가 있다. 그 열매를 섭취하면 큰 지혜와 감응력을 얻을 수 있다. 대신, 효과가 끝나면 하루 정도는 환청이나 환상에 시달릴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니라.』
"오오오! 아니, 그런 좋은 게 있으면 진즉에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왜 여태 구경만 하시고!"
천강은 천해지경을 앞장세워 바로 열목 폭포를 벗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
고개를 들자 뿌리부터 줄기, 가지까지 온통 순백을 띠는 거대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크고 높다란지 다른 고목들의 족히 서너 곱절은 되어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소년의 입에선 나지막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걸 말씀하시는 거였습니까?"
이거라면 충분히 이해하지.
마교에 들어온 이라면 한 번쯤은 보게 되는 일종의 명물. 지금 천강의 눈앞에 자리한 이것은 신교의 상징 중 하나인 신목이었다.
언젠가 스승으로부터 들어본 적 있다. 신목에 열리는 과일에 대해서.
'먹기만 하면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아진다고 했지, 아마?'
제아무리 우둔한 사람도 저것을 먹으면 머리가 환하게 깨고, 슬픔에 잠긴 이가 먹으면 슬픔을 잊고 기뻐 춤추게 된다는 전설의 열매.
다만, 그 뛰어난 효능에 비해 이명(異名)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마령과(魔靈果)."
그 효과가 끝이 나면 강한 환상과 환청에 휘둘린다. 종종 심하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존재한다고 했다.
'앵속(罌粟)의 스무 배가 넘는 효과라 했던가?'
아무튼 상징도 상징이지만, 그러한 이유로 신목의 과실은 신교에서 특별히 관리되었다.
열매는 다 따갔는지 나무엔 푸른 이파리만이 그득했다. 그 아래서 천강은 고민에 잠겼다.
- 소년. 이 열매는 위험합니다.
- 나 또한 들어본 적 있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악의 열매라고.
- 천천히 가거라. 급히 갈 필요가 뭐 있느냐?
"아니, 난 꼭 먹어야겠어."
- 소년!
"내 걱정해 주는 것도 좋지만, 거 토끼들도 밤에 잠은 자야지 않겠어?"
신목의 과실은 아마 교주의 권한에 속할 것이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뜯어내느냐는 건데.
그런 그때, 천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
'오호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맡겨둔 게 있었지?'
천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곧바로 천산의 꼭대기로 향했다.
"교주님, 간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나이까!"
"그래. 어서 오너라."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악동을 보며 천마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는 이 소년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오늘은 또 뭘 뜯어가기 위해 왔는지 차를 타며 잠시 예상해보는 천마였다.
그러나 고민해보아도 딱히 예상되는 건 없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왔느냐?"
"한 달에 한 번, 소교주 교육을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오늘이 지나면 그 한 달이 넘어갑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온 것이냐?"
천마가 차를 건네자, 그걸 받으며 소년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제가 무슨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겠습니까? 다 외부에서 볼 때 문제없어 보이게끔 움직이는 것이지요. 나이가 어려 한가해 보여도 저도 꽤 바쁜 사람입니다."
"그래그래. 그렇겠지. 그럼 이제 진짜 본론을 말해보거라."
굳이 더 인사치레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걸 공감한 천강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꺼냈다.
"사신 심문에 진전이 좀 있으십니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한 상황이다. 몸이 워낙 단단한지라, 고문이 먹히질 않으니……."
그럴 테지. 당장 손톱만 가정해 봐도 잡아 뽑는 건 불가능하고 끽해야 수십 번 후려쳐 깨는 것 정도만 가능하리라.
"그럴 것 같아 제가 왔습니다."
"음?"
"너무 늦어진들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미 여울나무 쪽으로 정보가 샜을지도 모릅니다. 한 놈이 살아남아 고문당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하핫. 심문을 수십 년 해온 이들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었느니라. 그들이 그 눈앞에 흉기를 들고 엄포를 놓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녀석이니라. 그런데 일개 소년이 네가 뭘 할 수 있겠느냐."
"잊으셨나 본데 말입니다."
소년이 생긋 웃어 보인다.
"지하수로에서 괴기나한을 구할 적에 그곳에 있던 사신 51명을 때려잡은 게 접니다. 그 하나를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패서 데려온 것도 저고요."
소년의 말에 교주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흠흠. 그런데 어떻게 한 것이냐? 놈들은 화경조차도 상처 내기가 쉽지 않거늘."
"천산의 보고에서 사학 어르신에게 외공을 좀 배웠습니다."
"외공을?"
물론 거짓말이다. 외공을 익혀 타격을 주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
그러나 그게 고수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런 거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강자는 무얼 하든 그 강하다는 이유 하나로 다 통용되기 때문이다.
현경에 도달했는데도 그 노인의 강함은 측정 불가. 교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긴. 어르신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역시나. 예상대로군.
"좋다. 따라오거라."
"그전에."
교주의 시선이 천강을 향한다. 소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 처리를 잘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좀 받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지. 교주가 이마를 짚었다.
"그래. 이번엔 무엇을 원하느냐?"
"신목의 과실을 주십시오."
"신목의 과실? 흠. 어차피 매년 9할 이상은 폐기하는 것이니 주는 건 어렵지 않다만, 그건 또 왜……. 설마 먹으려는 것이냐?"
"예."
천마의 얼굴에 황당하단 표정이 올라왔다. 늘 기행을 펼쳐오더니, 이번에도 이해 못 할 행동을 하겠다고 나서니 그런 것이었다.
"그걸 먹으면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고 들어서, 정제한 뒤 아주 소량씩 섭취해볼 생각입니다."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지. 기록에 보면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래. 일을 잘 처리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밑에 이들에게 바로 말해두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자, 그럼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천강은 교주를 따라 신전 지하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림자 셋에게 둘러싸인 채 사신이 쓰러져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도망칠 낌새가 보이면 그때마다 내리치며 제지를 한 듯했다.
"결박은 안 되나 보죠?"
"내기를 다룰 수 있어서 그런지 쉬이 풀어내더군. 그래서 묶어놓는 대신 이리 해놓은 것이다."
교주가 다가가자 고개를 드는 녀석.
"그만 끝내라……. 네놈들에게 이야기해줄 건 없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 천강이 나타나자, 놈의 얼굴에 눈에 띄게 변화가 나타났다.
덜덜덜덜.
"여어. 오랜만이야. 잘 지냈냐?"
"네, 네놈은……."
"들리는 말이 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직접 찾아왔어."
"주, 죽여라. 날 어서 죽여어어어!"
그러며 주위 그림자에게 달려드나, 녀석은 그림자들의 강기가 실린 주먹과 발길질에 맞고도 그토록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쓰러져 엎드린 그 앞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고개를 들자, 이를 드러내며 웃는 소년이 보였다.
천강이 녀석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우드득-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던 사신의 관절에서 위험한 경고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강은 마치 장난을 치듯, 고문에 사용될 만한 부위를 하나씩 하나씩 건들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제자리에 와서 사신을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교주님, 그럼 잠시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자리 좀 비켜주십시오."
"괜찮겠느냐?"
전생에도 북명신공의 비급을 찾기 위해 심문을 꽤 많이 했었다. 나름 자백받아내는 데에는 전문가들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자부하는 천강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혼자가 편합니다."
알았다며 교주가 자리를 피해준다. 천강은 고갯짓하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도 어여 가라."
바닥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몇 개가 사라진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는 기운.
천강이 몇몇 군데를 향해 매섭게 노려봤다. 그제야 대기하고 있던 모든 그림자가 지하 밖으로 사라졌다.
"그럼 우리 둘만 남았으니, 어디 한번 진솔한 대화를 시작해보자고."
사신 앞에 쭈그려 앉는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왈.
"혹시 고기 좋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