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0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7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02화
102화. 드디어 찾아온 깨달음
"음. 그런 일들이 있었구만."
오목골 흑살마신의 거처.
은은한 달빛 아래 차를 마시며 천강은 맹익으로부터 지난 50년간 있었던 일들을 쭉 전해 들었다.
흑살마신의 난동으로 인한 배신자 무리들의 약세.
이후 약해진 신교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으나, 놈들에게 여울나무를 빼앗기게 된 것부터 해서…… 놈들이 세를 키워 다시 마교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부분까지.
"그동안 고생 꽤나 했겠네."
"고생할 게 뭐 있습니까. 마교야 뭐 늘 싸움 또 싸움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똑같지요."
"큭큭. 그렇지. 배신자 놈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중원과 한판 하자며 소릴 지르고 있었겠지."
진정 싸우지 못해 안달 난 이들. 그게 마인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주라면, 왠지 무림을 집어삼킨다느니 그런 포부를 표출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중앙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던데, 그건 뭐냐?"
"적들로 하여금 함부로 이를 못 드러내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배신자 무리를 징벌한 흑살마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도, 함부로 교주 자리를 넘보지 못할 테니까요."
"하. 전대 교주의 자식 아니랄까 봐 머리는 잘 굴러가는구만. 그러나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닐 텐데?"
흑살마신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해, 적들은 더욱 은밀히 그리고 철저히 준비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50년 전 상황이 거의 그대로 재현돼 버렸잖아?"
"그렇지요."
"하아. 그때처럼 속 시원히 쓸어버리면 참 좋을 텐데."
"지금은 좀 힘드신 것입니까?"
"어. 투파창귀라는 녀석…… 생각보다 강한 것 같더라고. 신병이기를 아홉 개나 들고 있다더라."
"신병이기를 아홉 개……."
맹익은 몰랐을 것이다. 천마조차도 신병이기들에 대한 정보를 말해줄 때, 투파창귀가 들고 있는 신병이기 숫자를 대략 4개 정도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까지 가만히 숨죽이며 지내신 것 하며, 아까 교주에게 물어보신 질문들도 모두……."
"그래. 신병이기를 모아서 놈과의 일전을 준비해 보려는 것이지."
맹익과 천강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천강은 찻잔을 들어 마셨다. 비어버린 잔에 맹익이 새로 차를 채워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강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괴기나한이라니. 큭큭. 별호도 딱 너 같은 걸로 얻었구나? 대체 누가 지은 거야?"
"이전 사수가 지어주었습니다."
"그놈 그거 안 되겠네. 살아 있었으면 바로 손 한 번 봐줬을 텐데."
소년과 노인이 한바탕 소리 내어 웃었다. 천강을 따라 차를 한 입 들이켠 맹익은 그간 품어왔던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선배. 그런데 그간 어디 계셨던 겁니까?"
"나? 그냥 사정이 좀 있었어."
"사정이라면, 혹시 혼례를 올리신 건……?"
"야. 혼례라니. 그것도 상대가 있어야 하지. 혼례를 혼자 하냐?"
"그 왜 중원에 하나 있지 않았습니까? 홍랑이라고."
홍랑? 천강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너 이 새끼. 걔 이야긴 하지도 마라! 어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소름이 돋을라 하네."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천강이 말을 이었다.
"그냥 잠 한 번 자고 일어나니, 50년이 흘러 있었어."
"50년이요?"
"그래. 그저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인데…… 정말 많은 게 변해있더군."
처음에는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그 잘난 내공도, 주먹을 쥘 때 느껴지는 강한 근육도 모두 사라졌으니까.
"그나마 쥐 굴이나 암운곡은 변함없이 그대로라 적응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없었지만."
"크흐흐. 그렇겠죠. 몇 년 전에 가봤는데, 쥐 굴 화장실은 여전히 냄새나고 암운곡 지하수로는 변함없이 차갑더군요."
"맞아. 정말이지 들어서는 순간 바로 옛날 생각나더라."
새록새록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들.
"그때가 참 좋았지. 딱히 걱정할 건 없고, 이래저래 사고치고 다니고."
"선배 덕분에 체력이 참 많이 늘었었죠."
맹익도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 서,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또 저 때문에.
- 예? 이번엔 영약을 도둑질하자고요?
- 선배! 혼자만 도망가시면 어떡합니까! 으아악!
잔에 비친 달을 가만 바라본다. 고개를 들어 검푸른 하늘 위를 바라본다. 달빛이 누런 게, 오늘따라 참 따스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아무튼 비실대지 않고 잘살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땡추."
"선배 또한 잘 살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안 바쁘지? 아, 피곤한가? 피곤하면 가서 좀 쉬고."
"무슨 소리입니까. 모처럼 만났는데, 밤새 달리셔야죠."
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의 얼굴에 똑 닮은 미소가 올라왔다.
***
웅성웅성.
천산 내에 자리한 어느 주점.
평소엔 조용한 가게 안의 분위기가 때아니게 매우 시끄럽다. 며칠 전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들었는가? 이번에 마교서열 5위 뇌명신창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군.”
“들었네. 흑살마신이 한 일이라지?”
50년간 잠잠하다 최근 1년간 흑살마신의 행적이 계속해서 발견되면서 마인들은 저마다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신교의 기념비에 기록된 살아있는 전설 아니던가?
싸움에 미친 이들답게, 그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게 대다수 마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데 흑살마신이 왜 뇌명신창을 죽인 거지? 흑살마신은 신교에 도움이 되는 일만 하지 않던가?"
"자네들도 알지 않은가? 여울나무 그 뿌리가……."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교주 쪽이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테지."
"내 생각도 같네. 아무리 이곳 마교가 힘이 제일이고 우선이라 해도, 어찌 됐든 과거 그들이 외부 세력과 결탁해 음독을 시도한 건 분명한 사실이니."
"그러나 여울나무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네만."
"흠. 앞으로의 흑살마신의 행보가 어찌 될지…… 참으로 궁금하구먼."
그리고 그 시각. 교주 쪽에서는 천강의 행동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아니, 가르쳐준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뇌명신창을……."
단순히 정보를 원하기에 옳다구나 하고 가르쳐주었더니, 이리 큰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천마였다.
"괜히 가르쳐준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
이 일을 문제 삼아 여울나무에서 전면전을 신청이라도 한다면…….
교주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교주님. 외부에서는 흑살마신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라는 결정적인 증좌가 이번에는 안 나오지 않았나?"
"예. 비록 필체는 나오지 않았으나, 설마하니 열한 살 꼬마아이가 화경의 경지에다가 신병이기들을 여러 자루 들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할 것입니다."
그럴 테지. 천마 자신조차도 일개 소년으로 보았다가 탈탈 털리지 않았던가.
"저희 입장에서는 무조건 흑살마신이 그런 것이다. 이쪽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일필일사의 이야기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표했다. 그리고는 걱정하듯 물었다.
"간밤에 자네는 별일 없었지?"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가 붓을 들어 올리며 잔잔히 웃었다.
"예, 아직까진 무탈합니다. 하핫."
"혹여나 자네를 찾아온다면 내 이야기를 하면서 잘 돌려보내 주게나."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여울나무와 전면전을 치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교주 쪽과는 달리, 여울나무 쪽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잠잠했다.
물론 겉으로만 잠잠할 뿐. 적삼혈마는 어둠 속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산의 어느 깊은 동굴.
아는 이조차 몇 없는 그곳에 발을 들이자, 누군가 나와 고개를 숙였다.
"적삼혈마. 오랜만이군."
"간만입니다, 흑귀. 소식은 들었습니까?"
"뇌명신창의 이야기라면."
"사신들의 일은 면목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정보를 잘못 전달한 탓이 큽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뭐 별수 없지. 그래. 그래서 이젠 어쩔 셈이오? 문제가 하나둘이 아닌 것 같던데."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하나 확실히 처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그 뜻을 이해한 적삼혈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일단 용이나 범 말고, 범 새끼를 잡는 데 주력해야겠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겠단 뜻이로군?"
"아니요."
사신을 보냈는데 살아남았다. 무영삼귀를 보냈을 때에도.
그 외에 수많은 암살자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았고, 소교주 교육 때에는 이무기의 보금자리에 숨어 300명의 살수들을 일거에 퇴치했다.
상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예측 가능하다면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 맞춰 준비를 하면 되니까.
진정 위험한 건, 그 상대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때.
"절대 작지 않습니다. 지금은 범 새끼이지만, 놔두면 범을 뛰어넘어 용…… 우리에겐 제2의 흑살마신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전에 싹을 잘라야 할 것이다.
"우선 소교주부터 잡는 데 주력하지요."
***
"주군."
"그래. 일은 잘돼 가나?"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일귀가 보고를 올렸다.
"암룡은 새 신분에 완벽히 적응을 끝냈고, 저희와 같이 틈나는 대로 비밀통로를 숙지 중에 있습니다."
"비밀통로는 쓸 만하고?"
"예. 특수한 신분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까지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만큼 매우 유용합니다."
맹익과의 만남 이후로 천강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질과 양이 달라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비밀통로.
기계‧진식 부문의 수장이 되면 천산의 자리한 대부분의 비밀통로와 그 푸는 법을 알게 된다.
그런데 통도 참 크지. 맹익이 그걸 모조리 천강 쪽에 가르쳐준 것이다.
그 덕택에 천강의 정보원인 무영삼귀와 암룡의 효율은 월등히 증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군께 전해 달라 한 말이 있었습니다."
"뭔데?"
"주군께서 혹여나 신병이기 사냥에 나설까 하여 교주가 걱정하고 있답니다. 만약 그로 인해 여울나무에서 문제를 삼고 나선다면, 흑살마신 탓으로 모르쇠 일관하기로 결정했다고도 했습니다."
맹익과 연결된 이후로 얻게 된 두 번째 정보 이득. 그것은 바로 교주와 그 세력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맹익은 교주 쪽에 속해 있지만, 사실 그가 따르는 건 교주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천강이 교주 편에 있었기에 그곳에 속해 있던 것뿐.
'내가 마교를 떠나자고 하면 같이 따라나설지도 모르지.'
천강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고맙다고 전해."
"예, 주군."
"그럼 보고는 이거로 끝?"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 아, 맞다. 내가 가르쳐준 수련은 잘하고 있는 거지?"
일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현경에 도달한 천강은 그 느낌을 최대한 일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노력했고, 최근 그 진전을 보이고 있는 그였다.
"그래. 그럼 어서 가봐."
바람에 연기가 흩날리듯, 일귀의 신형이 사라진다. 천강은 발걸음을 옮겨 열목 폭포로 향했다.
'하아. 나도 빨리 답을 찾아야 하는데.'
오로지 독목신공에 모든 걸 집중하고 있는 천강. 그러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초여름에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꾸벅. 천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진악에게 한 차례 손을 흔들어준 천강은 냇가 옆에 앉아 폭포 근처를 바라보았다.
폭포 위에서는 한창 대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팡. 팡팡!
열목 폭포에 온 뒤로 주야장천 쌈박질만 하는 연화와 화정마녀.
천강은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멍하니 있는 건 아니었다. 연화를 보고 또 보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 모습을 담는 중이었다.
왜 저기선 저렇게 움직이고. 왜 저기에선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렇게 수십 일이 지나도록 바라만 본 효과가 있었던 걸까?
- 오늘도 훈련 안 하고 농땡이 피울 생각이냐!
- 천 번 내려치기, 하거라!
신병이기들의 득달같은 호통 속에서 문득 깨달음이 다가왔다.
"이건……."
갑자기 연화란 애가 어디로 움직일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행동하고, 이내 어떤 실수를 하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까지.
연화를 응시하는 천강의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