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9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98화
98화. 189번 구역
"와아. 엄청 넓네요."
"암운곡하고도 이어져 있는 건가요?"
아이들의 질문에 괴기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쪽 하류로 쭉 나아가다보면, 폭이 확 넓어지며 여러 수로가 합쳐지는 곳이 나온다. 그중 암운곡으로 갈 수 있는 곳 또한 있지."
"우와아. 그럼 이따 돌아갈 때는 그 길로 가실 건가요?"
"허헛. 글쎄다. 물속보다는 땅위를 밟는 게 낫지 않겠니?"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상관없는 표정들이다.
무진과 매화 같은 경우엔 흑이끼를 먹어 문제없고, 다른 세 아이도 4-5년차. 지하수로의 물속은 질릴 만큼 드나들었던 터라 이래저래 큰 상관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근데 앞으로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나요? 거의 한 시진 가량 내려온 것 같은데."
무진의 질문에, 노인이 한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거의 다 왔다. 바로 저기니라."
휘적휘적. 지하수로 가장자리의 물길을 두 다리로 밀고 나아간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자, 그들은 주먹만 한 크기의 관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무뿌리마냥 벽에서 툭 튀어나와 지하수 안쪽으로 박혀 있었고, 그 주변은 알 수 없는 수식들로 그득했다.
"이것은 뭔가요?"
"기관진식이다. 이곳에 있는 물을 저 지상 위로 끌어 올려주지. 천산에 물이 없는 곳은 다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고 보면 된다."
슥 물 안쪽 입구를 확인해 보는 노인. 관에는 문제가 없다. 그에 벽을 매만지자, 엉망이 된 진식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임의로 훼손을 했구먼.'
더욱 의심스러운 건, 분명 수리한 자국이 있는데 재차 훼손시킨 흔적도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함정……인 건가?'
딱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경각심이 그득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진이었다.
"어르신."
"왜 그러느냐?"
"혹시 오래 걸리십니까?"
"내 능력이면 일각(一刻)에서 이각이면 충분하다. 혹 볼일을 보고 싶은 게냐?"
"아뇨."
횃불을 높게 들어 보이는 소년. 어둠 속 저편을 가만 응시하며 무진이 말을 이었다.
"상류에서 무언가가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물 위로 이는 파문이 정상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무진의 말을 듣고는 너도나도 물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마교에서 오랜 기간 구르고 구른 맹익이다. 특히나 최근 마교 내의 움직임이 살얼음 걷듯 하는 만큼, 그는 무진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곳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물 위로 파문이 남을 정도면 일각(一刻)이 채 안 될 것 같습니다."
***
'후우. 오늘도 천마신공 검술만 겁나게 익혔네.'
연화와 진악과 함께 하루 내내 열목 폭포에서 수련을 한 천강.
그러나 정작 관심이 있는 독목신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도 못 잡지 못한 그였다.
'뭐 급하진 말자. 하다 보면 언젠간 될 것이니.'
스스로를 위로한 천강은 다른 아이들을 따라 터덜터덜 숙소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길 잠시…… 응? 뭐지? 숙소에 무진이 없다?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다.
"꺄악! 천강! 오랜만이야!"
"초아 누님?"
"요새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든 거야? 뭔 일 있었어? 별 일 없었지? 아무 문제없는 거지? 근데 그동안 어디 있었어? 아니, 밥은 잘 먹고 다녀? 나 보고 싶진 않았고? 내 생각 얼마나 했어?"
무슨 질문을 속사포로…….
"좀 하나씩 물어보세요. 저 어디 안 갑니다. 네?"
"아라써어어어. (알았어)"
천강의 손에 양 볼이 붙들린 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산의 보고로 가 있는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무려 반 시진 가량 쉴 새 없이 질문 공세를 쏟아내었다.
"그래서 요새 잘 지내고 있어?"
같은 질문만 무려 13번째 받은 천강은 슬슬 한계를 느끼고 말을 돌렸다.
"예. 그런데 무진이는요? 혹시 못 봤습니까?"
"무진이? 나도 모르겠네. 안 그래도 스승님이 부르셔서 빨리 가봐야 하는데, 무진이 점혈 짚어주는 거 생각나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소교주 교육이 발표되기 전, 천강은 그녀에게 무진이를 맡겼었다. 얼마나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울지 알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생각 외로 책임감 있게 일을 해왔나 보다. 스승의 부름보다도 이곳에 먼저 와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 오늘은 제가 할 테니 어서 가보세요, 누님."
"응. 그래야겠다. 고마워, 천강! 쪽."
등 뒤에 매달려 있다가, 재빨리 볼에 뽀뽀 한번 하고는 도망치는 여인.
아……. 그놈의 독목신공인가 뭔가를 빨리 배워야지, 원.
초아가 사라지고, 천강은 볼을 슥슥 문지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아이 하나를 불러 물었다.
"오늘 무진이가 없네. 혹시 소식 알아, 선배?"
"아직 복귀 안 했어?"
"응. 아직 안 들어왔어. 사백동굴에 있나?"
"그건 아닐 거야. 오늘 위에서 급한 임무가 있다면서 보조해줄 인력을 구했거든. 그래서 애들 몇 명이 거기 차출됐어. 무진도 거기에 들어있고."
"무슨 일인데?"
"기관진식 고치는 일이라던데?"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나도 잘은 몰라. 189번 구역이라는 것만 들었어."
189번 구역? 암운곡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네.
천강은 전생의 지하수로 구역과 그 번호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워낙 관심이 없는 정보라 그런지는 몰라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돌아오지? 수리할 게 많은 건가?"
그러다 번쩍 천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잠깐. 189번 구역이라고?'
설마……. 천강은 곧바로 암운곡 밑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지하수로로 들어섰다. 다행이도 아직 일귀가 돌아가지 않은 채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일귀. 전에 흑사 녀석 최대 동선 알아보라한 거, 혹시 알아봤나?"
"예. 170-210번 구역 중, 다섯 군데 빼고는 전부입니다."
"189번 구역은?"
"어중간하긴 하지만 일부 포함됩니다."
"젠장."
천강은 곧바로 지하수로 하류로 내달렸다.
한편 그 시각. 189번 구역 지하수로.
맹익과 아이들은 양 지하수로를 잇는 비밀통로 사이에서 무려 네 시진 째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밖으로는 수많은 복면인들이 자리해 수로 곳곳을 수색 중이었는데, 그 수가 얼추 세워 봐도 족히 오십은 되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저 호랑말코 같은 것들…… 대체 정체가 뭐지?'
분명 형체는 사람이다. 대화 소리도 사람의 것이다.
그러나 마치 이승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응당 생명이라면 가져야 할 한 줌의 내기도.
이런 어둠 속에서 그런 놈들을 피해 출구로 달아나기란 말 그대로 불가능.
지하수로의 비밀통로를 빠삭하게 통달하고 있는 맹익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저 정체 모를 것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죽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여울나무에서 작정하고 온 것이라면, 언제고 요 비밀통로의 위치는 들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보고한다. 비밀통로를 찾았다."
"비밀통로를 찾았다."
"비밀통로를 찾았다."
"비밀통로……."
마치 메아리 울리듯 쭉 이어 울리는 같은 대사. 맹익은 아이들을 이끌고 비밀통로 반대편 출구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심호흡.
"할아버지. 그냥 통로가 좁으니까 여기서 한 명씩 상대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일리가 있는 제안이었다. 이 밖으로 나서는 순간, 언제 어디서 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적이 생각보다 강하다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쪽으로 움직여야 하리라. 적어도 손녀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결정을 내린 맹익이 문을 열었다. 밖을 한 차례 살핀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상류로 빠르게 이동했다.
'조금만.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그럼 지상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걸음은 이내 무진의 제지로 멈추게 되었으니…….
"괴기나한님. 더는 못 나갑니다. 앞에 누군가 있습니다."
전방에 기를 한 차례 보내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년의 검지를 따라 물결 모양을 보는 순간, 그들 앞으로 몇몇의 존재들이 서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찾았다."
"놈을 찾았다."
"건너편에 보고하라."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끼리 처리 가능하다."
"우리가 처리한다."
"놈을 이 자리서 죽인다. 생존자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
어느새 둘러싸인 것인지, 앞뒤로 들리는 숫자만 계산해 봐도 족히 일곱은 넘는 인원.
이미 도망가긴 글렀다는 걸 확인한 맹익이 횃불을 피웠다. 아이들 또한 그것을 옮겨 받았다.
상류에 셋, 수로 건너편 둘, 하류에 셋 해서 총 여덟.
킁. 생각보다 많군.
"내가 앞을 상대하며 나아갈 터이니, 너희들이 후미를 맡거라. 알겠느냐?"
"예……!"
겨우내 열한 살 된 손녀딸과 그 동갑내기 뻘 되는 아이들에게 맡긴다는 게 영 못 미덥지만, 별다른 수가 없는 맹익이 망치를 움켜쥐었다.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적들이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찰팍. 찰팍찰팍.
옅게 물을 밟는 소리가 들리고, 맹익이 들고 있던 망치엔 검은 기운이 넘실댄다. 이윽고 전방에서 검을 세운 채 쏘아져 들어오는 세 복면인.
"죽어랏!"
폭음이 일었다.
괴기나한에게 맹렬한 기세를 뿜으며 달려들던 세 복면인은 망치에 얻어맞고 수로 건너편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비록 싸움에 조예가 없다 해도, 암운곡의 혹독한 수련을 견뎌낸 괴기나한의 실력은 복면인 서넛은 가뿐이 상대할 능력이 있었다.
'다행이다. 이것들 생각보다 별것 아니구나!'
그리 기뻐하길 잠시, 팔을 휘두르는 맹익의 머릿속에 얼마 안 있어 의문이 떠올랐다.
'왜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끝이 없는 게지? 소리를 듣고 계속 몰려오는 탓인 겐가?'
벌써 팔을 휘두른 게 거의 오십여 번. 강기가 둘린 일격이니만큼, 못해도 서른 이상은 즉사를 면치 못했어야 맞았다.
그러나 적들의 공세는 끝없이 이어졌다. 여유의 숨을 돌릴 틈도 없을 만큼.
그때 그 의문을 해결해 주는 이가 나타났다. 무진이었다.
"괴기나한님."
"왜 그러느냐!"
"이것들…… 괴기나한님의 강기를 얻어맞고도 아무런 타격이 없습니다."
"뭐?"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망치를 크게 휘둘러 위협하며 맹익은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과연……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숫자는 그대로인 적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게 대체……."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노리는 게 뭔지는 몰라도, 저희가 상류로 나아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지금 하류 쪽으로는 단 한 명도 서 있지 않습니다."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이냐. 설마 비밀통로들이 상류에 밀집되어 있단 걸 알아차린 것이냐?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해소됐다. 돌연 흐르던 물의 방향이 일순 뒤바뀐 것이다.
스르륵.
물이 무릎을 넘어 허벅지 위로 차오른다.
응당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건만, 강한 파도가 밑에서부터 올라와 내려오는 물을 덮고 상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이한 변화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스슷-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스산한 울음소리가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소리.
앞을 가로막던 복면인들의 고개가 일제히 맹익의 뒤편에 가 머물렀다. 그에 따라, 맹익과 아이들의 시선도 모두 뒤로 향했다.
흑요석 빛깔의 갑주. 그 중심부에 자리한 갈라진 입.
심연의 틈새로 기다란 혀가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하고, 그 위로는 탐욕에 깃든 거대한 두 눈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스스슷-
털끝이 오소소 선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고요를 깨뜨리면 그에 대한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고요는 이내 끝을 맺었다.
찰팍. 찰팍찰팍찰팍.
상류에서 다수의 복면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발소리가 지하수로를 울리는 순간, 괴수의 갈라진 틈이 크게 벌어지고 심연의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여어. 다들 여기 있었구만?"
"혀, 형님?"
"천강?"
그것의 입에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천강이었다.
"늦길래 직접 데리러 왔다. 별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