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32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6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32화
132화. 땅의 길
신병이기들을 챙긴 천강은 동굴 안으로 쭉 들어갔다.
과일 안을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천강은 미리 준비해온 횃불을 꺼내 들었다.
현경에 접어들고 내기가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은 천강에겐 사실 빛 따윈 필요 없었지만, 혹여나 무언가 놓치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일렁이는 노란 불빛에 기대어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딱히 위험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신병이기들이 조금 전 싸움을 두고는 떠들기 시작했다.
- 그것들 봤나? 하! 아주 치사하기 그지없더구만!
- 내 말이 그 말일세. 그리 도망만 다닐 거면 싸우질 말든가! 에잉. 신병이기라는 이름값도 못 하고 망신시키다니. 쯧쯧.
확실히 신병이기들의 싸움 방식은 주인을 닮아가는 부분이 다소 있어 보였다. 투파창귀의 신병이기들 또한 그 주인처럼 도망 다니며 공격을 해댔기 때문이다.
- 시간만 여유가 있었어도 흠씬 혼을 내주는 건데 말이네!
그리 호언들을 하던 그때 막야가 한마디 했다.
- 근데 그런 것치고는 다들 고전하지 않았나요?
- 그, 그건 우리가 봐주면서 싸워서 그래.
- 흠흠. 그러하다.
- 정말요?
확실히 천강이 보기에도 봐주면서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막야가 의심스럽단 어조로 되묻자 신병이기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 제가 볼 땐 천해지경이 더 잘 싸우던데요?
음? 그건 좀 의왼데?
아무튼 결론은 아직 검에 대한 내 조예가 투파창귀의 음공에 대한 이해도보다 낮단 의미.
모처럼 식어가던 훈련 의지가 새로이 샘솟는다.
그렇게 자기 자랑 시간에서 막야의 잔소리 듣는 시간으로 바뀌어 갈 무렵, 앞으로 나아가던 천강의 걸음이 돌연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앞으로 웬 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게 뭐지?'
횃불을 앞으로 내밀어 본다. 어둠이 걷히지 않는다.
마치 벽이라도 되듯 수직으로 형성된 기묘한 어둠.
순간 결계인가 싶었으나 자세히 보면 검은 연기나 안개가 뭉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정체 모를 것은 외부로부터 날아드는 빛을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천강은 조심스레 횃불을 그 안으로 들이밀어 보았다.
'흥미롭네.'
불꽃을 안으로 들이밀어도 똑같았다. 모두 집어삼켜질 뿐.
혹시 불이 꺼졌나 싶어 도로 꺼내자, 화악 밝아지며 횃불 끝으로 제 형체를 유지 중인 불길이 눈에 들어왔다.
- 기관진식인 걸까요?
"그건 아냐."
주변 그 어디에도 기관진식의 흔적은 없었다. 그런 내기의 흐름도 안 느껴졌고.
특히나 이곳 무저갱은 그 특성상 기관진식의 운용이 불가능한 곳. 천강은 고민하다가 발길을 되돌렸다.
- 어디 가는 건가요, 소년?
"잠깐 물건 좀 빌리러."
- 예?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빛이 밝아져 온다. 횃불을 끈 천강은 굴 밖으로 나가 무저갱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천강의 등장에 침을 흘리며 한곳에 모여 있던 아귀들은 허겁지겁 꽁무니를 뺐다.
천강은 놈들이 점거하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한 여인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 음? 죽었네요?
그랬다. 신교의 신녀였던 여인은 피를 흘린 채 죽은 상태였다. 사인으로 봐선 지옥의 아귀들에게 당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얜 기껏 살려줬더니 왜 죽은 거야?"
- 아까 소년이 막힌 굴을 뚫으면서 돌무더기가 머리 위로 떨어진 거 아닐까요?
……그런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그래도 천강은 부정했다.
"야. 꼭 내가 아닐 수도 있지. 투파창귀가 굴을 무너뜨리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용의선상엔 소년도 분명 들어있습니다.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쳇.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네.
천강은 신녀 옆으로 가 육각의 틀로 이루어진 등불을 집어 들었다. 미약한 불길이 천강의 내기를 빨아들이며 그 기운을 피워 올렸다.
'이게 성화…….'
뭔가 들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풍성해지고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주변은 지옥도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천강은 마치 푸른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천강은 내기가 빠르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성화 주위를 가만 살펴본즉, 주위의 기운을 강제로 빨아들여 천강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마치 혈도가 다 개방된 무진이를 보는 듯했다.
'이게 있으면 최소 내기 없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근데 신녀는 대체 왜 죽은 거야? 이런 좋은 기능이 있으면 후딱 내기 회복해서 빠져나가면 되지.
사실 공포에 집어삼키면 사고가 마비되는 법이었으나, 신녀 또한 흔하디흔한 여마인들 중 하나와 동일시한 천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지금껏 천강이 만난 여자들은 다 그런 여자들뿐이었기에.
"그럼 다시 올라가 볼까?"
천강은 가볍게 뛰어올라 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까의 그 어둠이 자리한 곳까지 나아갔다.
천강이 성화를 들어 올렸다.
화르륵- 성화의 불꽃이 강하게 일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검은 안개가 길을 트기 시작했다.
'역시 효과가 있군.'
천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천강은 성화를 앞세워 천천히 나아갔다. 검은 안개는 천강이 지나온 길을 도로 막으며 그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길은 굉장히 복잡한 미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러 갈림길이 나왔고, 천강은 신병이기 하나당 열 갈래의 순서를 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곧 문제에 봉착했으니…… 지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잊어버리고 만 것!
곧바로 막야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 아니, 시킨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떡합니까!
- 흠흠.
- 그, 그게 말이다…….
"됐어. 이미 벌어진 일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 역시 영웅은 그릇이 크다더니, 큰 그릇은 달라도 다르군!
- 그러게 말일세!
- 좀 조용히들 있죠?
- 흐흠. 알겠네…….
결국 왔던 길을 잃어버린 천강과 신병이기들은 졸지에 미로에 갇히게 되었다.
천강은 고기를 뜯으며 옆을 쳐다보았다. 그의 옆으로는 한 땐 사람이었을 해골이 엎어져 있었다.
삐쩍 말라비틀어진 것이 꽤 오래된 시체였다. 간장이 그걸 보고는 천강에게 물었다.
- 그대는 사체 옆에서 밥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뭐 그렇지."
전생에 천강이 살았던 때는 시체가 발에 차이도록 많은 시기였다. 반란도, 전쟁도, 심지어 난도 있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살아 돌아다니는 사람보다도 죽은 사람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던 천강에겐 시체 옆에서 밥 먹는 일은 전혀 비위 상하지 않는 일이었다.
천강이 해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부스스. 가루가 돼 바닥에 소복이 쌓이는 해골의 손가락 부분.
"이게 몇 개째지?"
- 열두 개째니라.
생각보다 신물(神物)의 단서를 찾아 들어온 이가 많은 모양이다.
그 뒤로도 수차례 해골 잔해가 더 나타났고, 조금 더 나아갔을 땐 사체보단 더 의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벽에 글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천강은 성화를 들어 올려 그것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 이 어둠은 보통 어둠이 아니다. 빛을 집어삼키는 어둠이다. 이 안에서는 방향 감각도 느낄 수 없고 육체의 직감도 잃어버린다. 내기 운용이 불가능하니 한 번 들어온 자는 이곳에서 나갈 수조차 없다. 만약 이곳에서 나가고 싶거든……. 』
글은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건 줄 알았더니."
- 소년, 아직 실망하긴 이릅니다. 뭔가 많이 적혀 있습니다.
막야의 목소리에 천강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벽 곳곳에 낙서마냥 글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천강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
투파창귀의 거처. 그곳에 자리한 개인 훈련장.
새벽빛을 받으며 가부좌로 명상을 하던 청청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 그녀의 앞으로는 그녀의 스승 투파창귀가 자리하고 있었다.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어디 갔다 오셨나요?"
그도 그럴 게, 스승에게서 미약하게 유황 냄새가 났기에. 투파창귀는 그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다른 행동을 보였다.
"스승님. 어째서 신병이기들을?"
바닥으로 툭툭 악기들이 떨어진다. 그것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던 청청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세히 느껴본즉 그것들은 신병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스승 옷에는 그와 똑같은 악기들이 매달려 있었고, 심지어 전에는 못 보던 새로운 신병이기들도 눈에 띄었다.
"내 일에 흥미를 가질 시간이 있다면 내가 가르쳐준 현경의 깨달음에나 집중해라. 이따 얼마나 깨달았는지 점검할 것이다."
"……예."
투파창귀가 걸음을 옮겨 거처 안으로 사라졌다. 청청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스승님이 달라지셨어.'
아니, 달라진 게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스승이 아니었다.
청청은 그걸 확신했다.
***
성화의 기운이 어둠을 몰아내고 구(球)를 이룬다.
사위는 짙은 어둠. 좌우로 자리한 벽엔 검은 암석과 붉은 암석이 층을 이뤄 높아졌다가 낮아지길 반복했다.
마치 물결이 이는 듯한 그 모습에, 천강은 빛 한 점 없는 호숫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그마한 물방울에 몸을 실은 채 말이다.
- 소년, 좌측에 또 있습니다.
막야의 보고에, 천강은 성화를 들어 올려 좌측을 훑었다.
붉은 암석 위로 글이 엉망진창으로 쓰여 있었다. 천강이 그것을 가만 읽어보았다.
이것을 쓴 이는 생이 다하기 직전 썼던 것인지, 아직 소년인 천강조차 쭈그리고 앉아 읽어야 했다. 옆으로는 해골 잔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17일째 기록. 지옥검의 위치를 찾았다……. 』
글은 이곳저곳에 많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은 죽음을 직감하면 그동안 자신이 이루고 발견한 것을 후세에 알리길 원한다.
그래서인지 쓰여 있는 글들 중엔 자신이 이뤘던 무공에 대해 써놓은 것도 있었고, 지금껏 살아오며 자신이 이루었던 업적들을 기록한 이들 또한 존재했다.
그중 쓸 만한 게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사람처럼 이곳에 관해 기록한 것들.
『 ……나는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왔다. 지옥검의 최종 시련은 절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
지옥검. 마검. 암검. 파천검. 지옥마검.
쓴 사람이 여럿이라 명칭은 제각각이었나, 어느덧 이곳을 돌아다닌 지 3일째에 접어든 천강은 저것들 모두가 신물(神物)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글을 읽은 천강은 혀를 찼다.
"쯧. 이번에도 그곳을 찾아가는 방법은 안 나와 있네."
그래도 이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다. 17일 만에 어찌 됐든 신물(神物)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그걸 구경조차 못 한 듯 보였다. 이 기록을 발견하기 전까진 43일이 최단 신기록이었다.
천강은 걸음을 옮기며 어제 발견했던 글귀를 가만 되뇌었다.
『 이 검은 안개와 미로는 일종의 시험이자 관문이다. 신검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의 길을 건너야 한다면, 이 신물을 얻기 위해서는 땅의 길을 돌파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