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2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51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26화
126화. 무저갱에 수감되다
천산의 보고에서 나오자 세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인들과는 다르게 바지가 아닌 치마를 두르고 있는 여인들. 그중 가운데 있는 여인에게 천강과 강철신마가 예를 갖췄다.
"신녀를 뵙습니다."
"그쪽이 이번 수감자인가요?"
천강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을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요."
흔들흔들.
무녀의 손에 들린 등불이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팔랑거리는 붉은 천에 군데군데 가려지지 않은 새하얀 피부. 아름다운 곡선과 뛰어난 외모.
무릇 남자라면 그러한 부분에 관심이 쏠리고 욕정이 일만 하건만, 앞서가는 세 여인을 따라가는 두 남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대신, 육각 형태의 관에 든 작은 불에 더 관심이 쏠렸다.
'성화(聖火)로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제법 궁금했는데, 심신의 안정을 주는 효과인 건가?
흥미롭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흥미를 끄는 부분은 왜 저걸 여기로 들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신교의 상징이자 교주의 증표인 성화를 말이다.
가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궁금증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즈음, 그들은 천산의 밑바닥에 자리한 검은 구덩이 무저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녀가 한쪽으로 나아가며 예를 올렸다.
"간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금나한님."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11척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장신. 다시 봐도 거대한 몸뚱어리에 앞에 선 신녀가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신녀는 천강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수감자가 생겨서 말입니다."
"흠."
금나한의 시선이 천강에 닿았다. 그는 마치 천강을 처음 보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천강은 고개를 슬쩍 돌려 그가 늘 앉아 쉬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술병 다섯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혹시나 연기하는 게 티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하는군.'
전날 음식을 챙겨서 일귀를 보내두었는데 이야기가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그들에게 나아오는 한 인영.
"누구냐!"
집행관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복면을 쓴 일귀가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금나한이 설명을 붙였다.
"저 인간은 내 심부름꾼이다."
"심부름꾼이요?"
"그래. 난 이곳을 지키느라 꼼짝 못 하지 않느냐. 그래서 종종 이용하는 인간이다."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여겼는지 신녀의 고개가 주억였다. 그 사이 천강은 일귀와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 별일 없었지?
- 예, 주군. 말씀해주신 대로 주군의 이름을 말하고 음식을 전달하니, 가져온 음식과 술이 그때와 똑같다며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 우리 내려가고 나면 금나한에게 미리 준비한 이야기 전달하고.
- 예. 누군가 찾아오거든 자릴 비운 척 들여보내라 하겠습니다.
- 그래. 만약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면 날 암살하기 위해 온 자객들이라고 설명해.
아마 그런다면 요 야차와 똑 닮은 거한은 정의감을 불태우며 통과시켜 줄 것이다. 아니, 싸움을 걸려나?
"그럼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신녀와 수행원들이 무저갱 구덩이에 가 섰다. 천강은 일귀에게서 시선을 떼며 마지막 전음을 보냈다.
- 이제 모든 건 네게 달렸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이날을 위해 주군도 저도 꾸준히 준비한 것 아닙니까? 모든 게 계획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그래. 모든 건 계획대로.'
성화의 불길이 화르륵 타올랐다. 사람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힘 빼십시오. 떨어져 죽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내기 운용을 억제하자 버티며 저항하던 천강의 몸도 허공에 떠오르고, 신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섰다.
뿌연 연기와 뜨거운 증기가 볼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
-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네.
천산의 보고.
관리자 층 한쪽에 놓여 있던 명검들 중 하나가 말했다.
- 그 소년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오랜 기간 함께한 정이 있지. 우리가 없다면 필시 위험에 빠질 걸세.
- 그래도 막야가 함께 있지 않소?
- 흠흠. 막야를 못 믿는 건 아니네. 다만 투파창귀는 아홉 개의 신병이기를 들고 있지 않나? 막야와 뇌명, 그리고 누런 책 셋이서 막기에는 역부족일 걸세.
공포의 이야기를 들은 승사가 물었다.
- 그래서 결론이 뭔가?
- 난 여기를 떠나겠네.
- 어디를 가려고?
- 소년에게 가야지!
의천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 그대가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날아갈 내기도 없는데 무슨 수로?
- 마부위침!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도끼로 바늘도 만들 수 있는 법이지! 내게 고책이 있네.
- 오오. 그게 뭔가?
신병이기들이 공포의 말에 집중했다. 공포는 자신의 계책을 설명했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천산의 보고 안으로 떨림이 일었다. 아니, 떨림이라고 하기보단 소음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땅에 놓인 여섯 개의 검이 몸을 부르르 떤다. 쉬지 않고 검명을 울어댄다.
- 어서 우리를 소년에게 보내줘라!
- 보내줘라!
온몸을 떨어대며 징징거리는 신병이기들.
"허허허허허."
천산의 보고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얼굴 근육은 꽤 굳어 있었다.
***
무저갱 안쪽으로 찬찬히 내려간다.
뿌연 연기가 시야를 순간순간 가리고, 검은 암석이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 모습은 이름 그대로 무저갱.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지형에 신녀를 포함해 모두가 몸을 움츠렸다.
오직 천강만 얼굴에 여유가 그득했는데, 그때 머릿속으로 막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근데 소년.
'음?'
- 아까 그곳 노인 말에 따르면 우릴 다 데려와도 아무 문제 없을 텐데 왜 놓고 온 겁니까?
'그거? 별거 아냐.'
처음에는 흑도마황의 발언에 황당함이 들었다. 천산의 보고에서 얻은 걸 모두 압수하고 무저갱 5년형이라니.
그와 미리 합의를 본 바로는 어디까지나 무저갱 행까지였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처벌을 받는데 천산의 보고의 물건을 회수하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저갱에선 내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 말은 무저갱 생활을 하는 동안은 신병이기 아홉 개와 몽둥이를 직접 손으로 들고 다녀야 한단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냥 응한 거였지.'
뇌명창, 흑색 절굿공이 이 두 개와 흑도마황이 합세하면 투파창귀를 지면에 떨어뜨리는 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막야가 이해한다면서도 되물었다.
- 그래도 지금은 묵현이란 소년이 준 신발을 신고 있지 않나요?
'실제로 통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묵현을 못 믿는 건 아니다. 녀석 성격상 거짓말을 못 하니 분명 진실을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묵현이 이곳 무저갱에 와서 직접 확인해 본 게 아니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왕 맡길 거라면 사학 어르신에게 맡기는 게 제일 안전하지 않겠어?'
- 생긴 거완 다르게 꼼꼼하군요, 소년.
'거기다…… 잘하면 이참에 분란의 씨앗들을 아주 뿌리째 뽑아버릴 수도 있고 말이야.'
- 예?
막야가 그게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그러나 천강은 별다른 답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무저갱 바닥 가까이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붉은 암석들과 그 사이를 간간이 흐르는 용암.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를 휘어 감는다.
그워어어어-
성화의 불빛 때문일까?
바닥을 어슬렁거리던 지옥의 아귀들이 화들짝 놀라며 무저갱 깊은 곳으로 후다닥 자취를 감췄다.
용암의 물거품 터지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이제 내려 드리겠습니다."
천강의 몸이 똑 바닥에 떨어졌다.
'오. 진짜로 저주가 통하질 않네?'
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스윽 올라왔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으니 연기는 해줘야겠지?
내기 운용을 못 하는 척 머리 위 암운신공을 없앴다. 그러자 그 안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천해지경과 뇌명창, 그리고 막야에 닿았다.
"오늘로부터 5년 후, 다시 이곳으로 데리러 오겠습니다."
"먹을 건 안 주는 겁니까?"
분명 교주가 신녀를 통해 먹을 것을 포함해 갖가지 도움이 될 만한 걸 전달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신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 달랐다.
"당연하죠. 한낱 대죄인에게 저희가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요?"
- 그런……! 설마 교주가 우리를 버린 건?
글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천강은 신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신녀는 뭔가 좀 이상하네.'
천강이 기억하는 전생의 신녀는 늘 주민들을 마주하기 때문에 행동 하나도 말 하나도 굉장히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이번 신녀는 왠지 그런 예의를 어따 팔아먹은 것 같았다.
'흠. 아닌가. 전생의 신녀가 오히려 이상한 거려나?'
허구한 날 싸움박질에, 강해지는 데에 미친 자들이 모인 이 마교에서 지냈다면 오히려 저게 더 정상일지도.
"더 질문 없습니까, 죄인?"
아까부터 죄인 죄인. 천강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래. 어여 가라."
"저런 건방진……!"
강철신마가 욱하며 소리쳤으나 천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5년 후에 보도록 하죠. 물론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죠."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저 위로 도로 올라갔다.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천강은 암운신공을 다시 만들어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기감을 펼쳐 무저갱을 슥 살폈다.
'작년에 내가 천령초를 싹 다 채취해 간 게 좀 컸나 보네. 제대로 자란 게 없네.'
끽해야 있다면 손가락 두 마디 크기뿐.
조금 더 기감을 넓게 펼친다. 저 위쪽까지.
그때 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강은 귓가에 내기를 집중해 청력을 강화해 보았다.
"분명 말씀드립니다. 소년이 지닌 뇌명창은 제 것입니다."
"그 창은 신녀님 마음대로 하시오. 난 녀석이 가진 검이면 충분하니까."
하. 그래서 아까 내게 검 하나를 챙기라 한 것이로구만?
'그건 그렇고, 여울나무 쪽에 신녀까지 매수된 건가?'
고개를 들어 눈에 내기를 실어 본다. 그리고는 뭐 하고 있나 확인하려는 순간, 익숙한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르륵. 그륵.
허리는 크게 굽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으며 손은 기괴하게 큰 괴물.
얼핏 보면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 형상을 지닌 그것들은 성화의 불빛이 사라지자마자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워어어어-
벌어진 입에서 뚝뚝 침이 떨어지고, 쇠를 긁듯 갈라진 굉음이 고막을 강타한다.
녀석들은 천강을 보고는 신이 나 달려들었다. 천강은 검은 구름에 손을 뻗어 흑색 몽둥이를 뽑아 들었다.
그오오오-
제일 선두에 달려오던 녀석이 천강을 덮칠 기세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뛰어온 정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녀석. 놈은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이내 무저갱 안쪽 너머로 사라졌다.
동족이 날아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들. 천강과 그곳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하더니 다시 달려든다.
마치 그 한 방이 최후의 발악일 거야! 라고 생각하듯.
그러나 천강에게 달라붙는 족족 날아가 사라진다.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어 간다. 그렇게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음. 끝난 건가?"
더는 달려드는 놈들이 없었다.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두 무저갱 안쪽으로 사라진 듯했다.
'그럼 슬슬 투파창귀를 잡을 덫을 준비해보자고.'
다만 그 전에…… 천강은 기감을 펼쳐 저 위를 살폈다. 돌아가는 척하며 저 위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이 느껴졌다.
'싸움 소리는 들렸으나 연기 때문에 이곳 상황은 보지 못했겠지.'
천강은 벽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온몸을 암운신공으로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