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20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99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20화
120화. 주태의 속사정
천강과 주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사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강에게 훅 주먹이 날아들었다. 천강 또한 주먹을 내지른다. 그걸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로 박투가 시작됐다.
퍽. 퍽퍽.
서로가 서로에게 주먹을 꽂아 넣는다. 피하지 않고 다 맞아주는 일명 개싸움. 둘은 한참을 그리 주먹다짐한 뒤에야, 바닥에 핏물을 뱉으며 도로 떨어졌다.
"여어. 칼질은 몰라도 주먹질은 꽤 실력이 늘었네?"
"어. 제자들 훈련시키다 보면 그래야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둘은 맹익처럼 입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사이가 아니다.
주태의 음습한 성격을 떠올리자면 사실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천강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즐거움을 표현하는 그였다.
"일단 해후는 초아부터 빼낸 다음, 마저 하자."
"걔는 왜?"
"나 때문에 갇혀 있단 소리 들었거든. 영 찜찜해서 말이지. 솔직히 나야 네 기술들을 이미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잖냐."
천강은 주태가 암운신공을 개발하는 초기 단계에 함께 있었다. 단 한 번에 그 기술들을 따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가 가장 컸다.
"뭐 그건 그렇지만."
이제야 소교주의 말도 안 되는 재능이 이해가 간 주태였다.
"근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가둔 건 아닌데."
"응? 뭐 다른 이유가 있어?"
주태가 천강을 가만 바라본다.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초아랑 무슨 관계냐."
아……. 말뜻을 이해한 천강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네가 일단 초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잘 알겠다. 근데 미안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절친한 사이였다 해도 난 너희 둘 절대 허락해 줄 수 없다."
소교주의 아내가 된다는 건 앞으로 수많은 위협에 시달린단 뜻. 그걸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하는 천강. 그 이마에 핏줄이 빠득 올라섰다.
"절대로 그런 사이 아니거든?"
"응? 초아 말로는 너랑……."
"야. 내 나이가 몇이냐? 그런 꼬맹이에게 내가 그런 생각이 들겠냐?"
그제야 주태는 자신이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에서 고뇌가 사라지고 광명의 빛이 확 번졌다.
'어휴. 여자아이를 제자로 들이면 딸처럼 키운다더니. 쯧쯧.'
아무튼 주태 녀석과 이 일에 대해서는 마무리 지었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된 천강이었다.
"암튼 초아 이젠 좀 풀어줘라. 나 때문에 몇 달간 무슨 생고생이냐."
"그래!"
주태가 앞장서서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직까진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벌컥 열리는 문.
그렇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하 3층의 공간은 천강이 예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두컴컴할 거라 생각한 그곳은 야광석과 촛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칙칙할 거라 상상했던 벽과 바닥은 고급 천으로 꼼꼼히 가려진 상태였다.
눅눅하고 냄새날 거로 예상한 공기는 향기가 나고, 쇠창살 외엔 없을 것 같은 공간엔 가구를 포함 각종 생필품으로 그득했으니…….
"응? 스승님?"
초아는 그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고치마냥 이불을 똘똘 만 채, 뒹굴뒹굴하며.
"그래, 우리 초아! 뭐 하고 있었니?"
"저요? 당연히 우리 천강이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면서 습하. 습하. 뭔가 냄새를 맡아댄다. 그것을 본 천강의 눈이 부릅 뜨였다.
"야, 너! 그거 내 옷!"
"어?"
그랬다. 초아가 몸을 제대로 못 가눈 건, 몸을 이불로 똘똘 만 것 때문이었고, 숨쉬기 힘들어 보인 건 저 이상한 짓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꺅! 천강!"
초아가 휘리릭- 몸을 굴려 이불을 펼쳤다. 그리고는 후다닥 뛰어, 양팔을 펼친 채 안을 준비를 하는 주태를 밀치고는 단숨에 천강에게 달려가 안겼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네가 나 때문에 벌 받고 있다고 해서."
"와아. 설마 날 구해주러 온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천강의 등에 올라탄 채 초아가 그 위에서 들썩들썩 춤을 춘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태를 보며 천강이 실소를 머금었다.
"야,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그만 내려와라."
콩.
"어쭈. 우리 천강 많이 컸네? 아무리 날 구하러 왔어도 맞먹으려 하면 안 되지. 존칭은 하고, 대신 이름 부르는 건 허락해 줄게!"
"초, 초아야. 너 지금 그 무슨 무례한……."
"아, 스승님. 그런데 천강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천하의 흑살마신에게 딱밤을 먹이는 모습을 본 주태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입가가 작게 씰룩였다.
"그게 말이다. 천강이 오늘부로 우리 사문에 들어와서 날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야, 너 미쳤냐!"
주태 주제에 어디서? 그러나 길길이 날뛰는 천강보다 더한 이가 있었으니…….
"천강! 너 우리 스승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맞고 싶어! 엉?!"
퍽. 퍽퍽.
초아의 손이 천강의 가슴팍을 내려친다. 고양이가 때리듯, 초아의 손이 잔상을 일으키며 파바박- 움직였다.
솔직히 별 타격도 없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판단한 천강은 주태에게 고갯짓했다.
'야, 그냥 내가 누군지 말해.'
'알겠다.'
안 그래도 천강과 초아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 주태 또한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주태는 천강의 복부를 때려대고 있는 초아를 멈춰 세우곤 말했다.
"초아야. 실은 네게 말할 게 있는데 말이다."
"넵!"
"지금 네가 때리고…… 아니, 업혀 있는 그 사람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제는 천강의 하복부를 때리기 위해 팔을 번쩍 든 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우리 왔다.
짙은 어둠 속.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천산 신전의 그늘에서 은밀한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한나절씩 돌아가며 교주를 보좌하는 그림자들의 근무 교대 시간이었다.
근무를 마친 이들은 조용히 어둠 속을 이동했다.
- 오늘 술 한잔할 사람?
- 저요.
-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신전의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면서 일반 마인의 행색 차림을 하는 그림자들.
천산 중턱, 천암에 도착한 그들은 하나둘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을 누리기 위해 흩어졌다.
"작영, 너는 안 가나?"
"예. 오늘은 바람 좀 쐬면서 쉬고 싶습니다."
"그래."
나무 위에 올라선 작영은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리고는 저 멀리 풍미관이 내다보이는 나무 위에 도달하고 나서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한 발만 더 나아가면…….'
교주의 그림자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천암에 한정된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빠른 소집을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에겐 휴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루의 시간 중 한나절에 해당하는 그 시간이 휴식이나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즉, 교주와 한 몸인 그림자들은 천암과 교주의 발에 묶여 일평생 자유를 구속당한 인생이란 뜻이었다.
풍미관과 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본다. 오색빛깔로 몸단장을 하고 있는 나무들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가는 푸른 강이 눈에 들어온다.
"……."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작영. 그때 그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유를 얻고 싶나?
"누구냐?"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전음이 날아왔다.
- 다시 묻지. 자유를 얻고 싶나?
***
"그러니까…."
갓 지학(志學)의 나이를 벗어난 소녀가 검지로 천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그 신교의 영웅인 흑살마신이라고요?"
"……그래."
"스승님과 암운곡 같은 기수이고요?"
정확하다며 주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핫. 아, 스승님. 저 웃기게 하려고 하신 거라면 성공하셨네요. 올해 스승님이 해주신 말들 중 최고로 웃겼어요!"
"저기 초아야……."
"아니,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요? 요 천강은 말이죠."
초아가 천강의 머리를 오른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겨드랑이에 바짝 껴, 자신의 가슴으로 꾸욱꾸욱 짓누르며 말했다.
"제가 쥐 굴에서부터 업어 키운 애라고요. 단전 만드는 것도 제가 도와줬다니까요?"
"그건 네가 뭔가 좀 오해가……."
"오해 아니거든요!"
"아, 알았다. 근데 그 팔 두른 것 좀 풀면 안 되니?"
주태가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자, 초아가 더욱 끌어안는다. 마치 절대 내어주지 않겠다는 그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진정하세요, 스승님."
그런 그를 옆에서 진정시키는 초아의 사저, 서아. 그녀는 상 위에 차를 올리면서 초아에게 말했다.
"너도 슬슬 장난 그만하고 그분 놓아주는 게 어떠니?"
"나 장난 아닌데."
"초아?"
"눼에에."
입을 삐죽 내민 초아가 천강을 놓아주었다. 그런 천강의 상태는 좀 이상했다.
"야, 너 괜찮냐?"
"어어. 괜찮아."
"표정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아. 그냥 좀…… 충격적인 정보를 한꺼번에 들었더니 약간 혼란스러워서."
사실 말로 표현만 안 했을 뿐, 지금 천강도 초아만큼이나 믿기 힘든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러니까 여기 이 초아가 네 딸이라 이거지?"
"그래."
"그리고 네 옆에 앉아 있는 초아의 사저는……."
주태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내 아내다."
와아. 이 새끼……. 아니, 어떻게 제자랑 혼례를 올릴 생각을 다 하지?
천강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였다.
"근데 호칭들이 왜 그래? 왜 둘 다 널 스승님이라고 불러?"
"야, 천강! 너 우리 아빠한테 존댓말 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읍읍……."
"우리 딸. 엄마가 뭐라고 했지?"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선 스승님이라고 부르라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천강이 주태에게 물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냐?"
"별거 아냐. 너도 알다시피 마교에선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문제가 많잖냐."
마두는 한정되어 있다. 그 안에 들기 위해, 그리고 그 서열을 높이기 위해 마교에선 늘 싸움이 시시콜콜 일어난다.
즉, 높이 올라간다는 건 경쟁자가 많아진다는 뜻.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적을 쓰러뜨리다 보면 의도치 않게 원한을 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경쟁자들은 당사자를 쓰러뜨리려고만 하지만, 원한을 가진 이들은 그 가족도 건드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맹익의 처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고. 며느리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잖아. 그래서 난 혼례를 올린 것도, 딸이 있는 것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마두들과 달리, 거처도 일부러 인기가 없는 이곳 북서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이곳은 사시사철 햇빛이 잘 닿지 못해, 사람들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마 신교에서 내가 가족을 일군 걸 아는 건 너랑 맹익 뿐일걸?"
"너…… 정말 철저히 준비했구나."
하긴. 천강이 아는 주태란 녀석은 늘 조심성이 많은 녀석이었다.
지금껏 교주와 투파창귀, 어느 한 곳으로 넘어가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아니한가?
"정말 고생 많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너 오기 전, 여울나무에서 찾아왔었어. 그쪽 총책임자가 교체되었는데, 널 잡아서 공적을 올리겠다면서 네 약점들을 가르쳐 달라 하더라."
"호오. 그래서?"
"그걸 가르쳐주면 여울나무 숲 내에서 지위를 아주 돈독히 다져주겠다 제안해 오더라고."
이 자식들……. 이젠 날 못 잡겠으니 내 주변을 건들겠다?
"근데 네가 교주 쪽에 이렇게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놈들에게 확실히 선을 긋고 와야겠어."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태에게 천강이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응?"
"선을 그을 땐 긋더라도 챙길 건 챙겨야지."
주태가 픽 웃음을 흘리며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하……. 새끼. 옛날 성격 그대로네. 그래. 어떻게 하려고?"
"야. 우리 옛날에 영약 창고 털 때 기억나냐?"
"뭐?"
"땡추랑 함께 암운곡 영약 창고 털 때 말이야."
"오옷. 스승님! 암운곡 영약 창고도 털어본 적이 있었어요?"
초아와 서아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그 앞에서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며 주태가 미간을 좁혔다.
"그때면 설마…… 흑이끼 발견한 때를 말하는 건 아니지?"
천강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올라왔다.
"맞아."
옛 추억…… 아니, 사고가 스치듯 머릿속을 지나간다.
영약 창고를 털다가 총책임자에게 잡히고, 이후엔 암운곡 지하수로에서 죽기 직전까지 바들바들 떨고.
"……그 짓을 또 하자고?"
천강이 검지를 치켜들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
주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