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18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6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18화
118화. 암운사신의 거처
천산의 북서쪽에는 기다란 다리가 하나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으로, 그것을 기준으로 북쪽을 백암, 서쪽을 흑암이라 일컫는다.
명칭에 있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암석이 백색과 흑색으로 이루어져 그리 부르는 것이었다.
암운사신의 거처는 흑암에 자리했다.
휘이이-
날카로운 바람이 다리를 흔들며 지나간다. 그 위를 걷던 우휘전마와 수행원은 잠시 난간을 붙잡고는 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늦가을이라고, 여기는 벌써 겨울 날씨마냥 서늘하고 춥군요."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위치가 위치라 해가 닿질 않으니 별수 없는 거지."
"암운사신은 왜 이런 곳에 거처를 잡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마두들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들을 잡던데……."
"유일하지. 현 마두 중에서는 말이야."
고개를 들어 다리 너머를 바라본다. 흑색 암석으로 이루어진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왔음에도 대부분이 그늘에 가려진 그곳은 마치 이승의 땅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안면을 트기 위해 수도 없이 찾아왔으면서도 매번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우휘전마였다.
"총책임자님?"
"음?"
"바람이 멈추었습니다."
"어, 그래. 다시 이동하도록 하지."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암운사신의 거처인 흑암에 발을 올리자, 어디선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암운사신을 뵙기 위해 왔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일각(一刻) 정도 기다리자, 저 멀리서 누군가 나아왔다. 온몸을 흑색 옷으로 차려입은 여인이었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우휘전마는 그 뒤를 따르며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적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흑색 대지 곳곳에 숨어 자신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을.
'이것이 암운신공…….'
기척도 내기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은신 능력.
이런 세력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투파창귀님께 인정받는 건 전혀 어렵지 않으리라.
"여기서부터는 우휘전마님만 따라와 주십시오."
"알고 있네. 다들 잠시 그곳에서 대기하게."
흑색의 대지에 설치된 평범한 가옥.
문지방을 넘어 접객실로 들어서자, 짙은 어둠에 뒤덮인 널따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엔 조그마한 상과 방석이 각기 두 개씩 배치되고, 그 사이로는 촛불 하나가 제 몸을 태워 미약하게나마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내한 이가 한 차례 허리를 숙이고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우휘전마는 상 한쪽에 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자 반대편 자리에서 연기가 걷히듯 스르륵-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아후. 깜짝이야. 아니 언제부터 거기 계시었소?"
"오랜만이군, 우휘전마. 아니…… 이제는 여울나무 총책임자라고 불러야 할까?"
"하핫. 정보가 정말 빠르시오. 아직 교주 쪽은 눈치 못 챘을 것인데."
이곳 천산에서 암운사신의 정보력은 가히 최고로 친다.
지금껏 여울나무와 교주 쪽이 중립 세력을 강제로 흡수하지 못한 이유는 만천옥주와 암운사신, 이 두 세력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뭔가를 움직여보려고 해도 매번 한발 앞서 대비를 하고 있으니, 전혀 통하질 않았던 것이다.
그에 양 진영은 암운사신의 세력을 적대적으로 흡수하기보단, 회유와 타협이란 전략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래. 이번엔 무슨 볼일인가?"
암운사신의 빠른 본론에, 우휘전마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했다.
"방금 암운사신께서 말한 대로, 내 이번에 총책임자에 내정되었소이다. 그런데 이 자리라는 것이 보존하기가 참으로 힘들어서 말이오."
암운사신은 투파창귀처럼 빙빙 돌리는 걸 싫어한다. 우휘전마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주위에서는 어떻게든 날 끄집어 내리고 자기들이 이 자릴 차지하고 싶어 하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실제로 그리되겠지. 그러나 암운사신께서 도와준다면 서로에게 아주 좋은 진일보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찾아왔소."
암운사신이 생각에 잠겼다. 우휘전마는 조금 더 그를 설득했다.
"우리 여울나무에 올 의향이 없다면 모를까, 이왕 온다면 그동안 관계를 다져온 내가 집권 중일 때 오는 게 낫지 않겠소? 그래야 나도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더 많이 챙겨줄 수 있을 것이고."
틀린 이야긴 아니었다. 암운사신의 고개가 미약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맞는 말이지만, 아직 생각 중이다."
"암운사신. 제발 내 사정 좀 봐주시오. 그동안 많이 고민하지 않았소? 만약 그대가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겠소."
"여울나무로 안 넘어가겠단 뜻은 아니다. 다만 조금은 더 신중을 기하고 싶을 뿐이다."
우휘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 또한 아직 열매가 덜 익은 걸 알고도 건넨 말이었다.
'그럼 슬슬…….'
얼굴을 손바닥으로 한 차례 쓸어내린 우휘전마가 자신이 찾아온 진짜 이유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암운사신도 내가 집권 중일 때 들어오는 게 이득인 건 인정하는 부분이오?"
"……그렇다."
"그럼 내 간단한 부탁 하나 하겠소이다."
"부탁?"
"그렇소. 이대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투파창귀님 성격에 단박에 날 내칠 것이 분명하오. 그걸 막기 위한 것이오이다."
암운사신이 팔짱을 끼었다. 말해보란 뜻이다.
흠흠. 헛기침을 한번 해 목을 가다듬은 우휘전마가 말을 이었다.
"암운곡의 소교주. 그의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다 파악해주시오."
"약점 말인가?"
"그렇소. 현재 소교주가 계속 눈에 거슬려서 말이오. 처리를 하려 몇 번 시도했으나 보통내기가 아닌지 끝끝내 살아남더니, 기어이 적삼혈마를 자리에서 끄집어 내리게 만들었소."
"만약 그 소교주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휘전마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겠군."
"그렇소. 그래서 어떻게든 그 약점을 잡고 흔든 뒤, 처리할 셈이오."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초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는데, 여울나무 측에서 알아서 처리해준다면 그 또한 만족이었다.
"알겠다. 한 번 알아보지."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아직 정보를 건네준단 약조를 한 건 아니다. 알아만 보고 조금 더 고심해볼 것이다."
그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교주 쪽을 적으로 돌린단 의미였으니까.
그 뜻을 알아들은 우휘전마가 호탕하게 웃으며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우휘전마와 그 수행원들이 돌아갔다.
암운사신 옆으로 아까 길 안내를 맡았던 여인이 다가와 보고했다.
"소교주에 대해 딱히 추가로 조사할 건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보고가 올라온 게 어제입니다."
그랬다. 초아 일로 진즉에 어떤 놈인지 다 알아본 상황이었다.
"초아는? 반성 좀 하고 있나?"
"그대로입니다."
"후우. 화경에 도달한 만큼, 그 뒤틀린 욕망이 좀 옅어지진 않을까 기대했건만……."
초아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다.
날고 긴다 하는 무인들과 함께해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며 혼자 앞서 나갈 정도로.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나 암운사신은 그러지 못했다. 평범한 무림인에게 재능은 분명 기회이나, 마인들에게는 어떤 면에선 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걱정은 현실이 됐다. 아직 덜 자라 미성숙한 머리에 마기가 들어차면서 심성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공을 조금 늦게 가르쳤어야 했는데.'
암운사신이 과거를 회상하며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여인이 말했다.
"스승님께서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뒤틀린 욕망이 아닙니다."
"그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여인이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강한 소유욕에…… 굳이 따지자면 스승에게 배운 못된 고집? 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암운사신의 얼굴이 구겨졌다. 스스로를 책망하는 자신을 보고 위로를 건네주는 줄 알았더니, 더 세게 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글쎄다."
"슬슬 결정할 때입니다. 모두가 스승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교주 쪽과 투파창귀 쪽이 맞붙을 경우 근소한 차이로 투파창귀의 승리로 귀결됐다.
그런 상황에, 자신과 그 세력이 교주 쪽으로 붙으면 어느 쪽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반대로 여울나무 쪽으로 붙는다면 확실히 투파창귀의 승리로 끝을 낼 수 있었고.
'사실 고민이 필요 없지.'
맹익 녀석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제는 지킬 게 많아진 암운사신이었다. 그로서는 이기는 편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후우."
나지막이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 입술이 이빨에 의해 질겅질겅 씹혔다.
천강 녀석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녀석이 교주 쪽을 제대로 밀면 이런 고민도 안 할 텐데 말이야.
"스승님?"
"……여울나무로 사람을 보내라. 암운곡 소교주의 약점은 아이들이라고 말이야."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발을 옮기려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작은 체구로 보건대 필시 소년이리라.
"스승님."
"나도 보고 있다."
"혹시 저희가 여울나무의 의뢰를 받은 걸 알고 온 걸까요?"
그동안 소교주가 보인 행보로 유추해 보건대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최근 교주 쪽 정보수집 능력이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 우휘전마도 이야기했듯, 여울나무가 정보전에서 밀려 연패를 거듭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할까요?"
어느덧 소년은 그들의 거처 코앞에 도달해,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산보를 나온 늙은이마냥 뒷짐을 진 채. 오만하게, 인사 따윈 전혀 없이.
"한 번은 직접 손보길 원했는데, 잘 됐군."
암운사신의 신형이 스르륵 허공에서 사라졌다.
"안으로 들여라."
***
특이할 것 하나 없이, 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
그러나 주위가 너무도 칙칙하고 황폐한 탓일까? 마치 임금이 기거하는 전각을 보는 것 같았다.
천강은 그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일다경(一茶頃)의 시간이 흐르자, 거대한 문이 열리며 묘령의 여인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안으로 드시지요.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 찾아왔는지는 안 물어보나?"
"굳이 물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묻는다 한들 순순히 돌아가실 리도 없고."
"시원시원해서 좋네."
고개를 끄덕인 천강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은 그녀는 앞서 길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암운사신이 스승?"
"그렇습니다."
"그럼 초아하고는 무슨 관계지?"
"초아가 제 사매입니다."
오호. 초아의 사저인가?
따라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나 풍기는 분위기나…… 초아와는 완전 다른 여인이다.
"같은 스승을 모시는 사이라는 게 안 믿기네."
"후훗. 그런 말들 주위에서 많이 합니다."
"혹시 초아는 잘 지내나?"
걸음을 옮기던 여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미소 지으며 왈.
"궁금하신가요?"
"그렇지,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말이야. 들었거든. 나에게 암운신공을 가르쳐줬다가 문초를 받고 있다고."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늦게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바로 뛰어온 거거든?
그러나 그 말은 아꼈다. 굳이 내가 가진 역량의 한계를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기에.
'그건 그렇고, 진짜 너무 늦게 찾아온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찌르는 여인의 말에 문득 걱정이 들었다.
사문에 속하지 않은 자에게 본가의 무공을 가르쳐주는 건 중죄다. 심한 경우 사형이고, 어떤 문파에서는 단전을 폐하는 형벌에 가하기도 했다.
육체적 형벌이야 당연한 것이고.
그런데 초아는 그 사문의 절기까지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혹시 초아 얼굴만이라도 미리 좀 볼 수 없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숨은 붙어있으니까요."
"어디쯤 있는지만이라도 가르쳐줘. 상태가 어떤지 대충 느껴보기라도 하게."
"그런 거라면……."
여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바닥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 바로 이곳. 정확히 3층 밑 지하에 있습니다."
고개를 내려 가만히 느껴본다. 아주 미약한 기 하나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게 느껴진다.
천산의 영기로 인해 정확한 사유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
소년의 발이 움직였다. 그런데 앞이 아닌 위로 들렸다.
"미안."
"네?"
"난 미리 사과했다. 실례 좀 한다."
천강이 힘껏 바닥을 내려쳤다. 그러자 건물이 크게 흔들리고, 닿은 자리의 땅이 폭발해 위로 솟구쳤다.
"대, 대체 지금 무슨……?!"
"역시 천산인가? 한 방에 구멍이 안 뚫리네? 그렇다면 다시!"
쿠구구구구.
구멍이 생겼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천강은 그 속으로 쏙 내려갔다. 지하 1층은 심문실인 듯했다. 주변으로 각종 고문 기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럼 이 밑부턴 감옥이겠군.'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위에서 초아의 사저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장 멈추세요! 당신이 제아무리 소교주라도 마두의 거처를 이리 부숴놓다니요! 암운사신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겁니까!"
"어."
"그럼 당장 멈추…… 예?"
두려울 리가 있나. 주태 녀석 따위.
전생에 싸워서 한 번도 져 본 적 없다. 이번 생도 마찬가지일 거다.
"녀석이 날 이기려면, 신검 100개는 들고 와야 할 거다!"
쿠구구구구. 지하 1층 바닥에 구멍이 났다. 누가 막을세라 천강은 그 아래로 쏙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