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56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8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56화
156화. 묵범귀영
천마신교 하면 빼먹을 수 없는 몇몇 인물들이 있다.
초대 천마인 검마(劍魔)부터 해서 제일 마지막 흑살마신까지.
그들은 기경만회가 열리는 마을 중앙 비석에 새겨져, 긴 역사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어 왔다.
그중 가장 신비롭고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를 뽑으라면 바로 묵범귀영이었다.
신교에 발을 들일 때부터 비상한 면모를 보인 인물.
쥐 굴에 입성할 당시 이미 절정의 수준이었던 그는 암운곡의 최단 기록을 달성, 숱한 마인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이후엔 무(武)를 익히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는데, 대신 늘 시간만 나면 동물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암운곡을 졸업할 때도 절정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지.'
5년간 절정 수준에 머무른 그는 암운곡을 졸업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자는 그가 동물과 대화를 하더니 큰 깨달음을 얻어 우화등선했다는 이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가 미쳐 천산을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정설은 흑사대에 영입된 게 아닐까 하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그가 사라진 뒤로 신교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쥐 굴에서 발견한 비밀통로도 그중 하나고 말이야.'
흥미롭게도 묵범귀영 또한 쥐 굴의 암실에서 80일 이상은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천강은 그 굴을 만든 게 묵범귀영일 것이라 추정했다.
타닷- 타다닷-
늑대가 거침없이 앞으로 쭉쭉 나아간다. 그 뒤를 따르는 천강의 몸이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기에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건가요, 소년?
- 우리에게만 슬쩍 말해보거라.
천강의 행태를 지켜보다 궁금증이 도졌는지, 하나둘 입을 여는 신병이기들.
천강은 설명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있어. 가보면 알아.'
사실 천강이 그를 만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전생에 그를 찾았던 이유는 북명신공 때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비급은 이미 손안에 있다.
그런데도 천강이 이리 늑대 뒤꽁무니를 쫓는 이유는, 전생에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옷깃조차 보지 못한 그를 볼 수 있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신교의 진짜 영웅. 모든 게 흑막에 가려진 마교의 망령.'
늑대와 천강이 빠르게 천산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이내 한 지역에 다다랐다.
고개를 든 천강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긴…….'
아직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아 푸른 들판.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작물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늑대를 따라 천강이 도착한 곳은 바로 천산의 식량창고 풍미관이었다.
녀석은 좌우를 살피더니 수풀 사이로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천강은 그런 녀석을 따라 쭉 들판을 가로질렀다.
- 대체 주인이 어디 살기에 이토록 조심스레 움직이는 걸까요?
'글쎄.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인가에 성인보다 더 큰 늑대가 나타나면 난리가 나서 그런 거 아닐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그때, 갑자기 조심스레 나아가던 녀석이 파밧-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 하여 고개를 든즉, 눈에 한 인영이 들어왔다.
'저자가…….'
늑대가 앞에 당도하자 남자가 몸을 낮추고는 뭐라 중얼거린다. 누가 봐도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게 분명한 모습.
- 소년. 왜 가만히 있는 건가요?
-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게 그리 신기한 게냐?
- 그런 건 우리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천강이 놀란 건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천강이 놀란 건,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던 탓이었다.
"묵범귀영?"
검은 옷자락을 풀고 나직이 입을 열자, 묵범귀영이 고개를 돌려 천강을 바라보았다.
농인(農人)의 허름한 복장. 이립(而立) 정도 되는 사내가 천강을 알아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강.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추밀님."
***
풍미관 총책임자 사무실.
상을 사이에 두고 천강과 추밀이 마주 앉았다. 그가 찻잔을 천강에게 건네고, 그 향을 음미한 천강이 나직이 투덜댔다.
"신교의 영웅씩이나 되는 분께서 좀 좋은 걸 내어주시면 안 됩니까?"
"신교의 영웅답게 불평 말고 먹으면 안 되겠느냐."
천강의 미간이 구겨졌다.
"전 신교의 영웅이 아닙니다."
"나도 그러하다."
후우. 더는 말싸움해도 득 볼 게 없음을 느낀 천강은 차를 가만히 음미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추밀님, 진짜 묵범귀영 맞습니까?"
"아니라고 하면 믿을 텐가?"
"동물과 대화를 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럼 맞나 보군."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기를 꺼리는 것 같아 천강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런데 저들의 정보를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사실 묵범귀영을 만나는 순간 어느 정도 호기심은 충족되었다.
천강은 딱히 싸움에 대한 욕구가 강하지 않았기에 한판 붙고 싶단 생각도 일절 들지 않았고, 그저 여울나무의 은밀한 정보를 어떻게 알아냈을까가 급 궁금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추밀은 풍미관에서 상시 거주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기밀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여울나무 회의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곳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다? 천강의 호기심은 그쪽으로 옮겨 탔다.
천강의 질문에 추밀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아리송한 게 무제(武帝)의 사념님처럼 말씀하시네요."
"응?"
"아닙니다. 그런 게 있습니다."
천강이 의자에 몸을 푹 실었다. 그리고는 삐딱하니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그런데 왜 풍미관 습격을 예고하신 겁니까? 대선배님께서 홀로 막으실 수 있으실 텐데."
추밀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내게 사정이 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공짜로 움직일 순 없죠."
"풍미관을 지키지 못하면 힘들어지는 건 교주 측이다."
그 말에 천강이 씨익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교주 측이 힘들어지지 제가 힘든 건 아니지 않습니까?"
"……."
"그리고 아직 식량은 충분합니다. 떨어지기 전 적들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추밀이 작게 웃으며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차를 한입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후배께서는 원하는 게 뭔가?"
"선배께서는 후배에게 어느 정도의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즉, 정체나 능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 곤란하다는 뜻.
"응할 텐가?"
사실 추밀의 부탁이 아니라도 응할 생각이었다.
투파창귀가 잔꾀를 부렸다는 건 아직은 살 만하다는 의미이니까.
'조금 더 몰아붙일 필요가 있겠어.'
내부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 외부로 도움을 요청하도록 잔꾀를 철저히 밟아놓아야 한다.
천강이 몸을 바로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응하겠습니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혈비검과 오백의 마인들이 두 손을 보아 투파창귀와 마두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들은 풍미관으로 내려가 그곳의 식량을 싹 긁어오고, 그곳의 총책임자인 추밀을 죽이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래. 은밀히 다녀오도록."
투파창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야음을 틈타 천산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나아가던 마혈비검에게 부관을 맡은 이가 다가와 조심스레 보고했다.
- 마혈비검님.
- 왜 그러나?
- 풍미관엔 미리 연락을 넣었습니다. 아마 바로 가는 즉시 창고 문을 열어주고 총책임자의 위치를 알려줄 것입니다.
- 이런 멍청한……. 이번 일은 극비로 알리지 말라 하는 말 못 들었느냐!
- 소, 송구합니다.
부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말은 그리해도 마혈비검은 속으로 꽤 좋아하고 있었다.
사실 갑작스레 들이닥쳐서 일을 처리하는 것보단 미리 그쪽에서 알아서 준비해 주는 게 쉽고 빠르고 좋았기 때문이다.
"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풍미관입니다."
경사가 완만해지고 조금 있으니 드러나는 널따란 평지.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오백여 명의 마인들이 들어섰다.
마혈비검의 시선이 부관에게 향했다.
- 어디로 가면 되느냐?
- 총책임자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 잘됐군.
"다들 총책임자 사무실로 간다."
오백의 마인이 밭 사이로 난 소로를 가로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약 반 시진쯤 달리자, 그들은 곧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관이 전음으로 보고를 올렸다.
- 저 중 가장 큰 건물이 총책임자의 사무실이자 거처입니다.
오백의 마인이 해당 건물을 에워쌌다. 그러고 있으니 다른 건물에서 하나둘 그들에게로 나아왔다.
여울나무 소속 풍미관 인력들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총책임자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마혈비검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다섯 마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1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이내 약간의 소음이 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끝났나 보군.'
마혈비검이 대기 중인 인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식량을 챙기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마혈비검을 포함해 모두의 시선이 건물 3층으로 향했다.
3층의 창문이 벌컥 열리고 풍미관 총책임자를 처리하러 들어갔던 마인들이 도로 밖으로 튕겨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격에 목이 부러져 있었다.
"누구냐!"
듣기로 현재 풍미관의 총책임자인 추밀이란 이는 전투력이 형편없는 수준이라 전달받았다.
데리고 온 마인 셋이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 그런데 다섯이 들어가서 모두 일격에 사망했다고?
"밖으로 나와 정체를 밝혀라!"
한 마인의 외침에 웬 인영이 창문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폴짝 뛰어 그들 사이로 내려섰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내.
그가 사위를 쭉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이 같은 짓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조한다면, 내 살려주마."
"하! 허튼소리!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오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여유만만한 모습에 마인들은 그가 간덩이가 부었다 확신했다.
"가히 배포만큼은 흑살마신과 견줄 만하구나!"
"네놈이야말로 지금이라도 살고 싶거든 땅바닥에 바짝 조아리거라!"
그러나 기세등등한 살기를 띠는 여타 마인들과는 달리, 마교 서열 79위인 마혈비검의 등에는 식은땀이 진득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앞에 선 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흑살마신이 왜 여기에……?!'
의문은 들었으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의문보다도 임무보다도 목숨 보전이 우선이었다.
"죽어랏!"
"잠깐!"
마혈비검이 행동을 멈추라 제지했으나 흑살마신의 뒤쪽에 있던 마인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그의 검이 흑살마신의 목을 쳤다. 그러나 목이 닿는 그 자리서 꼼짝하지 않는 날붙이.
"흠. 협상 결렬이네?"
이미 일은 벌어졌다. 흑살마신은 싸우기 전 투항할 것을 제안하지만 그걸 거절하면 일말의 자비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혈비검이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소리쳤다.
"다들 전력으로 찔러라! 어서!"
지시에 따라 사방에서 몰아치는 날붙이들.
자리가 비좁은 관계로 가까이 있던 삼십여 명의 마인들이 달려들어 자신들의 무기로 흑살마신을 가격했다.
그 사이 마혈비검은 발을 놀려 최대한 그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보는 눈이 있는 관계로 이대로 뒤로 슬슬 물러나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쾅.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마인들.
마혈비검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는 버둥거렸다. 어느새 그는 흑살마신의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컥. 커헉. 제발 살려주시오, 흑살마ㅅ……."
"여섯."
뚜둑. 마혈비검의 목이 끊어졌다. 그 모습을 목도한 마인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흐, 흑살마신?"
"본교의 영웅?"
화경의 고수를 단 한 합에 제거한 괴물. 그들은 사기를 잃고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요새 마인들은 형편이 없군. 덤비는 놈이 하나도 없다니.'
- 오히려 덤비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소년?
- 이상한 정도가 아니지. 조금 전 그걸 보고도 덤비면 미친 걸세.
그런가?
전생의 경험이 함께하고 있는 천강에겐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싸움에 미친 이들이 모인 집단 마교. 전생엔 제아무리 실력 차가 나더라도 목숨 걸고 싸우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아무튼 후딱 처리하고 끝내자.'
천강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마인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중앙에서 한쪽 끝을 향해 나아가도 족히 반 시진은 걸릴 만큼 넓은 풍미관에서 백호와 수도 없이 뛰어다닌 천강에게선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암운행보뿐만 아니라 백호의 가호까지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물론, 몇몇 눈치 빠른 이들은 도망치는 대신 곳곳에 몸을 숨겨 생명을 연장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기척을 숨긴 상대를 찾기란 매우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 북쪽으로 350보.
- 서쪽으로 200보.
- 동남쪽으로 185보.
적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속속들이 파악한 추밀이 그걸 천강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까닭이다.
"제,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사백칠십칠."
풍미관 곳곳에서 크나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직이 숫자를 세는 소리도.
"사백칠십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