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44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44화
144화. 천산 앵화고목 뜰
고급스러운 원단이 천장으로부터 내리깔리고, 그 사이사이로 꽃 꽂힌 화병이 가득한 어느 공간.
책상에 한 소년이 앉아 촛불을 앞에 두고 서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다가와 물었다.
"우리 아들, 표정이 밝아 보이는군요. 드디어 답을 찾아낸 걸까요?"
"예……!"
묵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자신이 가진 정보라면 능히 열세인 교주 세력이 여울나무를 꺾고 반전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었다.
"교주님과의 자리 가능하겠습니까, 어머니?"
"물론이죠. 우리 아들의 부탁인데. 후훗."
신전으로 사람을 보낸 흑선마희가 묵현을 뒤에서 껴안았다. 그리고는 서류를 슥 훑어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 얻은 결론이 뭔가요?"
"저들의 강점은 바로 간자와 음지에서 움직이는 정예병력, 그리고 수직에 가까운 지휘체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수의 직책에 집중되어 있죠."
여울나무는 음지에서 큰 조직이다. 그것도 교주의 눈을 피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빠른 결단과 행동이 필수였는데, 문제는 덩치가 커서도 같은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직은 거대해질수록 유연하고 빠르게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여울나무 세력은 마치 작은 조직마냥 그걸 해내고 있었다.
"또한 그로 인해 비밀 유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안전하고요."
"확실히…… 자금을 그리 들이부었는데도 이만큼 알아내는데 1년이란 시간이 걸리긴 했지요."
그랬다. 자금을 상당히 쏟아 부었는데도 고작 얻어낸 건 서류 몇 조각.
"그래도 알아냈으니 다행이군요. 그래서 뭔가요, 저들의 약점은?"
허리를 숙여 묵현과 시선을 맞춘 흑선마희가 요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 따라 왼쪽 눈 옆의 조그마한 점이 작게 춤을 추었다.
'만약 저것이 조금이라도 다른 곳에 위치했다면 참으로 추했겠지.'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있단 생각을 하며 묵현이 대답했다.
"분명 그것들은 저들의 강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약점이기도 하죠."
"그게 약점이요?"
"예.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은 매우 좋습니다. 뛰어난 가주에게는 한 가문을 흥하게 할 기회를 주고, 지혜로운 군주와 만나면 백성 전체가 크게 부요롭게 되지요."
그러나 항상 좋은 건 아니다.
흑선마희가 입술 위에 검지를 대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하긴. 반대로 못난이에게 주어지면 급속도로 망하곤 하지요. 우리 가문도 그런 식으로 망했으니까요."
"그랬습니까?"
"예. 후훗. 우리 아들은 어미에게 너무 관심이 없군요."
검지를 내밀어 볼을 쿡쿡 찌르는 걸 막으며 묵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이 곧 그들의 약점입니다. 만약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통제가 안 되겠군요."
"예. 나머지를 처리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 될 겁니다."
원래라면 절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빈틈.
완벽하게 보였던 여울나무라는 성벽에 그 틈이 보인 건, 적삼혈마가 잠시 총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여울나무 숲의 가장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총책임자 사무실이 홀라당 불에 타 전소되는 사건은 묵현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고 조사하다 보니 그들의 지휘체계를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문제는 투파창귀네요. 그를 처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요, 아들."
"그를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투파창귀를 제외한 핵심 수뇌부들만 다 죽여도 그는 외톨이 신세가 될 테니까요."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신전으로 갔던 보고자가 되돌아왔다.
"교주님께서 지금 시간이 있으시답니다."
"그럼 어디 가볼까요, 아들?"
생긋 웃으며 내미는 흑선마희의 손을 맞잡으며 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천산의 꼭대기 신전으로 올라갔다.
***
"흑선마희. 고책을 내주어 고맙네. 한번 생각은 해보지."
"네? 어째서……."
늘 여유가 넘치던 흑선마희가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접고는 따졌다.
"지금 바로 움직이면 끝을 볼 수 있는데, 어찌 생각을 하신다 하십니까."
"굳이 말하자면, 지금의 난 그럴 수 없는 처지라네."
천마의 대답이 못마땅한지 흑선마희의 입술이 잔뜩 구겨졌다. 뒤에 서 있던 묵현 또한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만 물러가게. 준비가 된다면 그때 내 다시 부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흑선마희와 묵현이 신전을 빠져나갔다. 천수마검이 교주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분명 나쁘지 않은 계획이군요. 다소 과격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러게 말일세."
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이 바닥에서 살고자 오래 굴러왔고 여울나무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기에, 흑선마희가 말한 적들의 약점을 얼마 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하지 않은 건 그럴 상황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내느라 하나하나 내준 요직이 너무 많았고, 그로 인해 교주 측 전선은 심히 불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또한 지금의 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을 몸에 매단 상태.'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이종진기다. 조금이라도 큰 운신을 해버린다면 50년 전 흑살마신의 모습을 재현하게 될 것이다.
'머리 좀 굴리는 이들이라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본 모습을 드러냈고, 잡을 방법도 알아냈는데…… 안타깝게도 반격할 여력이 없구나.'
그런 그에게 남은 동아줄은 단 하나뿐.
천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무저갱 쪽으로 향했다.
***
"금나한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짙은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무저갱 주변. 일귀가 거대한 장정 앞에 예를 갖췄다.
그는 이내 들고 온 먹거리와 술을 그에게 건넸다.
"하하핫. 이것 참. 뭘 또 이런 걸. 그래. 자네는 잘 지내는가? 요새 천산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예. 저야 심부름만 하니 딱히 위험할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군은 어디 계십니까?"
"자네 주군은…… 아. 저기 오는군."
금나한과 일귀의 고개가 한쪽으로 향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뭉치가 폴짝폴짝 뛰어 그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 도착한 그것은 이내 연기를 싹 걷어냈고, 그 안에서 천강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금나한님을 뵙습니다."
"그래그래."
"일귀도 잘 지냈느냐?"
"예, 주군."
"오늘은 약속한 날이 아닌데 날 찾아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일귀가 그렇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천수향인지 뭔지 하는 여인이 날 만나기 위해 오늘도 왔다 갔다고?"
"예. 두 시진가량 거처에서 차를 마시다 돌아갔답니다."
"흠."
거의 반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오는 정성. 천강의 얼굴이 복잡 미묘해졌다.
"정말로 누군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래."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천강이 색목인을 본 건 딱 두 번뿐이었다. 심지어 그 두 사람 모두 남자였고 모두 무를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여자에다가 음존이라고?'
전생에 그런 거물과 인연을 튼 기억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가 출신이라면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곳에서 천강은 악연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뭐. 나중에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잘 왔다, 일귀. 내가 한동안은 못 움직이니까 평시보다 몸을 더 사리라고 전해라."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신검을 얻으러 갈 것이다."
앵화가 만개하는 시기다. 오직 이때만이 신검을 가지러 갈 수 있다.
문제는 지옥검 때처럼 신검 또한 시련이 있다는 것.
지옥검의 시련을 달포간 치른 전적이 있었기에, 미리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임을 알린 것이었다.
"한 달. 어쩌면 두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저번에는 운 좋게 성화를 들고 있어 쉽게 돌파했지만, 이번은 만만치 않을 수 있었다.
"먹을 것도 좀 준비해오고."
"어떤 종류로 하면 되겠습니까?"
"물은 좀 넉넉히. 육포 종류로."
"예,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일귀가 예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천강은 고개를 들어 신검이 잠들어 있는 앵화고목 뜰을 바라보았다.
'가급적 신검은 안 얻으려 했는데.'
신검은 하나의 주인만을 섬긴다. 어찌 됐든 천마신교의 교주를 상징하는 무기.
천마의 자리에 관심이 없는 천강에겐 투파창귀와의 싸움만 아니었다면 그냥 애물단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서라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법.
투파창귀 녀석이 또 다른 수를 숨기고 있을 수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모든 걸 갖추어놓고 녀석과 끝을 볼 생각이었다.
'뭐…… 싸움 끝나고 나중에 진악 녀석에게 물려주면 되겠지.'
일귀가 음식들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을 받아든 천강은 천산 중턱으로 은밀히 움직였다.
'그건 그렇고 간만에 와 보는군.'
온 세상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곳.
하늘에선 꽃잎이 비처럼 내리고, 땅에는 그 꽃잎을 모아 바닥에 수를 놓은 것 같다.
천산 앵화고목 뜰. 이곳은 과거 소교주, 그러니까 지금의 교주가 자주 애용하던 훈련 장소다.
봄의 따스함이 차오르는 시기이면 앵화의 분홍 꽃잎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우는데, 그 경관은 말 그대로 장관.
싸움에 미쳐 날뛰는 피폐한 마인들도 종종 이곳을 지나가며 심신을 회복하곤 하는 곳이었다.
꽤 넓은 지역이었는데 천강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발걸음을 옮겨 한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소교주가 늘 명상을 하던 곳이었다.
'분명 그 근처에 있을 거야.'
무인들은 자신의 수련을 남이 훔쳐보는 걸 원치 않는다.
앵화고목 제일 안쪽에서 훈련하는 소교주로 인해 마인들은 그 구역을 피해 다녀야만 했는데, 어쩌면 하늘의 길이 열리는 통로를 숨기고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전방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던 천강이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후우. 대체 언제쯤이면 이 지겨운 싸움이 끝날는지."
"내 말이. 그냥 마교답게 치고받고 피 좀 보면서 싸우면 안 되나?"
"들리는 말로는 이대로 쭉 고착 상태를 유지할 거라더군. 교주 쪽에서는 진짜 피 말리겠더라. 중립 세력은 서서히 우리 쪽으로 다 넘어오지, 몇몇 교주 세력까지 배신하고 전향하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군. 배신까지 일어나는 상황이라.
천강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시기가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 탓이다.
"아무튼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얼른 중원 녀석들 밟아주게."
"큭큭. 상상만으로도 즐겁군 그래!"
앵화고목 뜰을 관통해 지나가는 두 마인을 보며 천강이 주위를 살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된다. 여울나무 숲 가까이 자리한 만큼 경계근무를 서는 이들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들킬 내가 아니지.'
천강은 앵화나무 사이를 오가며 숲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렇게 과거 교주가 훈련하던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품속에서 부르르 어떤 진동을 느꼈다.
고개를 숙인다. 천해지경이 몸을 벌리고 그 안에서 반지가 스르륵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것은 허공에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이내 한 방향을 향해 빛을 쏘아 보냈다.
그 끝은 어느 가파른 언덕에 연결되었고, 그 빛이 닿는 주위로는 어떤 문 하나가 생성되었다.
천강은 누가 볼 새라 재빨리 반지를 암운신공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그곳을 향해 은밀히 이동했다.
'흥미롭군.'
반지의 빛을 차단하자, 마치 처음부터 문 따윈 없었다는 듯 암벽만이 자리한 곳.
손으로 만져 봐도 암석의 단단함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암운신공으로 감싼 반지를 다시 드러내자, 빛이 일자로 나아가 벽 위에 문을 만들어내었다.
손을 뻗어본다. 스르륵 그 안으로 들어가진다.
바깥과는 다르게 약간은 선선한 느낌.
'좋아. 그럼 어디 가볼까?'
한 차례 주변을 살펴, 지켜보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한 천강이 손을 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머지 몸 또한 따라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천강이 사라지고. 앵화의 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그곳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언덕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