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43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43화
143화. 뜻을 펼칠 날이 머지않다
"투파창귀님을 뵙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밖은 어떠하더냐?"
투파창귀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자리에 앉으며 호접일검이 보고를 올렸다.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쪽으로 넘어온 이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해 잘 흔들어대고 있고, 그로 인해 정파와 사파 대부분이 정치 혹은 후계 문제로 곤혹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열매가 익는 덴 얼마나 걸릴 것 같고?"
"이삼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삼 년이면 중원 대다수의 문파들이 욕심 많은 배신자들에 의해 반 이상 삼켜진다라.
"우리로서는 시간을 번 셈이군."
"예. 저희로서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특이한 건?"
호접일검이 주위를 살폈다.
"걱정 말거라.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예. 그…… 황궁 쪽에서 흑살마신이 상당히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저희가 잘 대비해 놓았다고 말을 했는데도 집요하게 물어왔습니다."
"그럴 테지. 우리 전에 이곳을 점거하려던 놈들이 그 한 놈에게 모조리 당하지 않았더냐."
이 일을 계획한 황궁에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대한 위험 요소를 없애고 싶겠지.
"일단 음존에 대한 건 숨겼습니다만…… 그래서 더 불안한 모양입니다."
"잘했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거라."
"예. 그런데 투파창귀님."
"음?"
호접일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의 얼굴에는 다소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굳이 황실 녀석들과 함께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저희를 사람 취급 안 하는 족속입니다. 저희를 이용해 먹고 언제 어디서 배신할지 알 수 없는 놈들입니다."
그랬다. 예부터 황실은 어떻게든 무림을 먹어치우려는 욕망을 드러내 왔다.
호접일검은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울나무 내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투파창귀의 일 처리 실력과 힘에 눌려 직접적으로 말을 안 하고 있을 뿐.
"그래. 놈들은 믿을 수 없는 족속이지."
그러나 투파창귀는 그들과 손을 잡았다. 모든 무림인을 없애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 오늘 두 형제분의 큰 뜻을 들려주어 고맙소.
악가를 멸문시키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나룻배 위에서 우연히 지금의 태감(太監)을 만날 수 있었고 서로의 뜻을 공유하게 되었다.
- 멸무림……!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비록 황실에선 보잘것없는 나이지만 나도 그 일에 작게나마 동참하고 싶소.
일개 환관에 불과했던 그는 태감이 되었고, 무림 초출에 불과했던 투파창귀 두 형제도 마교에 와 큰 세력을 일구었다.
이젠 그 뜻을 펼칠 날이 머지않았다.
"염려 말거라. 이번 황실은 우리 편이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끝이 나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을까.
사박사박. 발소리와 함께 적삼혈마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투파창귀를 향해 예를 갖춘 그는 호접일검 옆으로 가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호접일검. 중원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예. 많은 게 변했더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일단 사람이 사는 곳마다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았습니다. 큰 도시에 들어서면 화경은 눈에 채일 듯 많아졌고요."
그랬다. 현재 무림은 큰 성장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신선환이란 단약은 무림인들의 큰 난관 중 하나인 환골탈태의 문제를 가볍게 해결해주었고, 그로 인해 무(武)를 조금이라도 익힌 이들은 손쉽게 화경에 도달하고 있는 추세였다.
"아무래도 일류까지만 죽어라 노력하면 화경이 될 수 있다 보니, 각 문파에서는 훈련생이 차고 넘치는 실정입니다. 뒷돈을 주고라도 들어가려고 할 정도고요."
"그러겠지요. 그러니 우리 마교에까지 흘러 들어오는 것일 테고요."
여울나무 숲은 중원 문파에서 교육을 받다 쫓겨난 이들을 위주로 데려왔다. 돈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행태는 가난한 인재들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새로운 물결로 인해 인력이 차고 넘치면서, 기존에 각 문파를 꽉 쥐어 잡고 있는 이들의 힘이 약화되는 실정입니다."
"좋군요. 좋습니다."
모든 게 잘 굴러가자 적삼혈마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올라왔다. 찻잔을 기울이던 호접일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오다 보니 천산 초입에 신교 주민들이 몰려와 있더군요."
"아, 호접일검도 보셨습니까?"
"예.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오면서 나누는 대화들을 들어보니 다들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런 불화는 일찍 잠재우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불씨마냥 사방으로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저 또한 그 부분에 대해 어르신께 여쭈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적삼혈마과 호접일검의 시선이 투파창귀를 향했다. 그러나 나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가만 놔둔다."
"예?"
"저들은 무림인이 아니다."
멍청하게 하늘의 뜻이니 뭐니, 운운해 대지만, 이곳 신교를 이루는 주민들이자 신도들이 무림인은 아니었다.
투파창귀는 그런 그들까지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소교주로 알려져 있던 녀석은 무저갱에서 죽었고, 교주도 그 사실을 알기에 가만있는 것일 거다.'
가만 놔둬야 신도들이 계속해서 여울나무에 적의를 드러낼 테니까.
"교주 측이 가만히 있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려 패가 없다는 뜻이다. 우린 최대한 변수를 만들지 않고 지금처럼 천천히 몰아가도록 한다."
"하지만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크게 일어날지 모릅니다, 어르신."
"암.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순 없는 노릇이지."
투파창귀의 시선이 호접일검에게 닿았다. 호접일검이 찻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녀에게 가 말해라. 저번엔 내가 양보했으니 이번 사건은 잘 좀 덮어달라고. 그리 말하면 들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예를 표한 호접일검이 곧바로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투파창귀가 의자에 몸을 푹 실었다.
'2년? 아니면 3년?'
길어야 그쯤. 앞으로 천마가 얼마나 버틸지……. 투파창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올라왔다.
***
봄날의 따스한 기운이 공기 중으로 은은히 느껴지는 초봄.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한 여인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채 가려지지 않은 금빛의 머리칼이 반짝거리고, 찡그린 두 눈엔 호숫가의 푸른 기운이 감도는 그녀는 음존 천수향이었다.
수행원들이 재빨리 그 뒤를 따라붙어 햇빛 가리개를 넓게 펼치자, 그제야 일자를 유지하던 그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신녀님! 오늘도 흑살마신님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수행원들을 대동해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를 내려가며 천수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꺄악! 오늘도 흑살마신님하고 오붓한 시간 보내시나 봐. 어떡해!"
"어머멋."
"그런 거 아니거든?"
"아이 참. 쑥스러워하시긴! 이미 신교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천수향이 고개를 홱 돌려 수행원들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수행원들은 겁도 없는지 그녀의 살기 어린 눈을 보고도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거의 반년 간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오목골에 가셨잖아요."
"맞아맞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임을 보러!"
"아니, 그거야 다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말 안 하셔도 저희도 이미 알고 있다니깐요. 근데 녀석이라니, 말도 편하게 하기로 하셨나 봐!"
"어머어머."
참새마냥 떠들어대는 수행원들의 행태에 천수향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쩌다가 이리되었는지.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흑살마신은 여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퍼져 나간다면 필시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그녀를 찾아올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마치 내가 녀석에게 푹 빠져서 목매는 모양새잖아?'
자존심이 상한 천수향의 입이 오리마냥 길게 튀어나왔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다녀오세요!"
수행원들이 축복을 받으며 결계 안으로 들어선다. 천수향은 뒷짐을 지고는 능숙하게 기관진식의 함정을 돌파했다.
오목골의 전경이 확 눈에 들어오고, 한 여인이 그녀를 맞이했다. 암운사신의 처 서아였다.
"오늘도 오셨군요."
"그래. 흑살마신은?"
"복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아. 이 새끼 대체 어디 간 거야?"
머리칼을 한 차례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기며 천수향이 짜증을 냈다. 늘 보여주는 풍경이라 서아는 그저 방긋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심한 것 같은 기분. 서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도 차 한잔하고 가시겠어요?"
"글쎄. 그럴 기분이……."
"특별히 좋은 걸로 내어 드릴게요."
"……그래."
맹익은 그녀에게 초아 모녀를 소개하며, 앞으로 이곳에 들를 때마다 간단한 수발을 들어줄 인물들이라 소개해 놓았다.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그녀는 이곳에 있을 땐 그 두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흑살마신이 그 스승과 살았다는 거처. 그곳에 앉아 차를 마시는 그녀를 서아는 옆에 앉아 가만 바라보았다.
- 혹시나 흑살마신 선배님과 관련된 정보가 새어 나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먼저 물어보시진 마시고.
맹익의 부탁을 떠올린 서아.
'죄송하게도 오늘도 전해드릴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여자가 어찌 저리 과묵한지. 초아가 그녀의 반의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서아였다.
그런 그때였다. 반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질문이 먼저 날아들었다.
"야. 너 혹시 흑살마신 실제로 본 적 있어?"
"음. 딱 한 번 본 적 있네요."
"어때 녀석?"
"어떠냐고 하시면?"
"어떤 인간인 것 같으냐고. 네가 볼 때."
천수향의 시선을 받은 서아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어. 꼭 그래 줬으면 좋겠네."
"그냥…… 신교의 영웅 같지 않았어요. 사고도 잘 치고 다니게 생겼고요. 좀 애 같다고 할까."
그녀에게 남편 암운사신은 애였다. 같이 어울리는 두 벗도 똑같이 보이는 건 마찬가지.
"애라……."
픽 웃음을 터뜨린 천수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흑살마신이 없으면 마교를 뒤집어놓으려 했는데, 그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린 그녀였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서아는 천산과 교주 측에 불 피바람을 잘 방지해낼 수 있었다.
한편 그 시각.
무저갱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어느 작은 굴.
누군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그는 소년이라 하기엔 컸고 장정이라 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러나 오랜 세월 단련한 듯한 단단한 몸은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게 모르게 드러내고 있었다.
잠을 자듯 긴 호흡을 내쉬는 사내.
그때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슥 천장에 붙어있던 발을 떼, 바닥에 착지한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투덜거렸다.
"후우. 뭐지? 두 발로 서는 게 뭔가 부자연스러운데."
- 그럴 만하지요, 소년. 무려 이십여 일간 매달려 있었으니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소년이 걸음을 옮겨 굴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천산 곳곳엔 초록빛이 무성히 피어오르고, 몇몇 나무 위엔 벌써부터 분홍 꽃잎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앵화가 필 시기로군.'
천강이 품에서 천해지경을 빼 들었다. 촤라락- 누런 책이 펼쳐지고 그 위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 자신 외에 91가지 다른 생물을 이해하라. 그럼 자연스레 생사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
앞으로 91마리.
천강이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생사경은 무리일 듯싶다.
'별수 없군.'
그럼 신검을 얻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