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살마신 137화
무료소설 흑살마신: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3회 작성일소설 읽기 : 흑살마신 137화
137화. 추혼살개
천강의 시선이 뽕밭에 한참을 머물렀다.
보고 또 봐도 분명 이무기다. 흑사와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이무기.
'이놈을 회유하길 잘했지. 하마터면 저것과 싸울 뻔했군.'
밀어 넣을 생각이었으니 녀석이 죽는 건 당연지사. 이무기는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이들을 살려두지 않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성질 자체가 고약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것이 지키고 있단 말이지?'
이무기.
하늘에 승천하기 직전 혹은 승천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단단히 삐뚤어진 영물.
보통은 이무기를 현경과 생사경 사이 즈음으로 잡는다. 자연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탓이다.
'그런데 상생이라고?'
천강은 대체 무슨 뜻인가 하여 말없이 놈을 지켜보았다.
흥미롭게도 나무 위에는 누에는 많아도 고치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에 의아함을 느낄 즈음 두 가지 의문이 단번에 해결되었다.
쩌어억-
'그렇군. 영기를 머금은 누에 대부분을 식사로 사용하는 건가?'
그렇다면 저곳에 있는 몇몇 고치는 다시 애벌레를 만들기 위해 남겨놓은 게 분명했다.
충분히 놈을 지켜보았다 판단한 천강이 다리 밑에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어이. 대머리."
"예, 예."
"그래서 네 계획은 뭐냐? 그동안 훔쳐봤으니 뭔가 전략 같은 게 있을 텐데."
"저라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어르신께선 강하시니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러며 설명을 하는데, 그걸 정리해보면 이러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녀석은 밥을 먹고 나면 두 시진(時辰)가량 잠을 자는데 그때 슬쩍 뽕밭에 들어가 고치들을 훔쳐 온다 이 말이지?"
"예. 저는 덩치도 크고 그다지 날렵한 편은 아니라 하나씩밖에 못 훔쳤지만, 어르신의 몸놀림이라면 한꺼번에 여러 개도 가능하실 겁니다."
잠을 자는 동안 훔친다라…….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천강의 눈은 착 가라앉았다. 아까 이무기 녀석이 보여준 행태가 걸렸기 때문이다.
마치 아기 다루듯 다루며 곳곳에 자리한 누에들을 세심히 살피는 녀석의 눈길이.
"어이, 정말 그게 다냐?"
"예?"
"누에가 많으니 솔직히 누에 숫자는 모를 수 있어. 그러나 다음 대를 이을 고치 수를 모를 리는 없지 않나."
이무기는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존재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이 잠자는 사이 들어와 물건까지 훔쳐 갔다? 목숨이 서너 개라도 부족하리라.
"사실대로 말해. 이건 너와 나, 우리 둘 다를 위한 거니까. 훔치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지?"
아귀들의 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시, 실은 한 번 훔칠 때마다 올라와서 행패를 부리긴 했습니다. 그리 일각(一刻) 정도 성을 낸 뒤에 돌아갔지요."
"넌 그렇게 조금씩 모아 그것들을 만든 거고?"
천강이 장갑과 신발을 가리키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흠. 일각이라."
"그 정도면 녀석도 화가 풀리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겨우 조그마한 고치 하나지 않습니까?"
"아니."
잠시 생각에 잠긴 천강의 눈이 빛을 발했다.
"녀석은 화가 풀려서 돌아간 게 아니다."
"그럼 왜?"
"저 뽕밭은 놈이 관리하는 거지? 그런 녀석이 저기서 이탈하면 어떻게 될까."
"아……!"
몽땅 불에 타 버리겠지.
화가 풀려서 돌아간 게 아니다. 창고가 불타 모조리 날아갈까 봐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이다.
화기가 가득한 이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환경에 매우 예민한 누에가 탈 없이 성장하는 건 순전히 저놈 때문이었다.
"지금까진 운이 좋았지만 언제까지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어. 놈이 슬슬 널 잡을 계책을 마련했을지 모른다."
꿀꺽.
잠시 뽕밭과 이무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강이 몸을 홱 돌렸다.
"어, 어디 가십니까?"
"돌아간다."
"예?"
"앞으로 세 달간 기다린다. 그럼 기회가 올 것이다."
"저어…… 왜 그런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천강은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마디 했다.
"곧 앵화가 흐드러지겠군."
***
"교주님."
천수마검이 신전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고는 보고를 올렸다. 그의 얼굴은 잔뜩 굳은 상태였다.
"중원의 정찰 임무 총지휘대장으로, 마교 서열 54위 죽섬일마를 임명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죽섬일마면 중립 세력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여울나무로 전향된 모양입니다."
이로써 또 한 명의 중립 세력이 적들에게로 나아갔다라.
교주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리하라고 일러라."
"예? 교주님, 그건 아니 될 말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흰 중원의 정보를 획득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겁니다. 그럴 경우 교주님의……."
천수마검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교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이종진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찰 쪽을 고수해야 하는 게 맞지.'
그러나 천마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중원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일단 큰 건을 내어주고, 그걸 먹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우리는 시간을 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교주가 양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의 착 가라앉은 눈이 허공을 가만 주시했다.
"판을 뒤집을 기회의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
한편 그 시각. 흑선마희의 거처.
한 소년과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요? 여울나무 쪽이 너무 강성해지고 있는데."
"더 강성해지도록 도와줄 겁니다."
"어째선지 이 예쁜 어미에게만 귀띔해주면 안 될까요?"
묵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시선을 마주한 흑선마희가 호호 눈웃음을 지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묵현이 답했다.
"마각노출(馬脚露出). 이겼다 판단해 물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면 그때 약점 또한 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를 놓치면 안 되겠군요."
"예. 그 약점을 교주 쪽에 넘기면 판세는 뒤집힐 것입니다."
그러면 적들은 궁지에 몰리겠지.
"도망갈 곳이 없어 구석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저들은 반드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그때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흑선마희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눈을 초승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묵현을 꼬옥 안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 어미가 다 잘 해결해 줄 테니."
***
"그러니까 저놈이라 이거지?"
"예, 어르신."
천강이 고개를 들어 굴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공간에 옥좌가 놓여있고 야차같이 생긴 인영이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반 시진(時辰) 전. 이무기 사냥을 잠시 미룬 천강은 아귀들의 왕에게 물었다.
"근데 넌 이름이 어떻게 되지?"
"억중이라 하옵니다."
"그래, 억중아. 혹시 이곳 외에 천령초가 또 많은데 어디 없냐?"
천강의 질문에 녀석의 표정이 즐거워졌다. 억중은 가운데 있는 통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많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곳에 너 같은 놈들이 꽤 되나 보네?"
"예. 좀 실력이 있다 싶은 것들은 다 한 군데씩 자리를 잡고는 천령초를 모아두고 있습니다."
요 녀석 말로는 무저갱에 사는 악귀들에게 천령초는 보약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종종 선계에서 손님이 올 때면 다량으로 비싼 값에 사가기도 합니다."
"누가 사 가는데?"
"염라대왕입죠. 주기적으로 저승사자가 보상으로 줄 물건을 들고 찾아오는데, 그때 크고 씨알 좋은 놈으로다가 한 번에 3할 정도를 사갑니다요."
이제는 천강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녀석이 고개를 굽신굽신거리며 이야기를 풀었다. 그 행색이 마치 손님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비위 맞추는 상인 같았다.
"근데 넌 사람이냐?"
"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합마공을 알고 있지?"
"합마……공 말입니까?"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
"그 왜 네가 나랑 싸울 때 개구리 울음소리 내며 달려들던 기술 말이다."
"아……. 그건 천령초 3할을 바치면서 한 저승사자에게서 배운 무공입니다."
그 보상이란 것이 딱히 정해진 게 없고, 화폐로 대용할 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아 보통 물물교환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아무튼 곧 저승사자들이 또 나타나겠군요."
"그래? 그럼 서두르자."
"예?"
"염라대왕이 선수 치기 전에 최대한 내가 다 먹어 치울 생각이다."
억중의 얼굴에 황당하단 표정이 올라왔다. 얼굴이 커서 그런지 몰라도 그 감정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녀석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예. 빨리 가시지요, 어르신."
이미 천령초를 전부 털린 상황. 혼자만 저승사자와의 거래에서 허탕 칠 수 없다고 생각한 아귀들의 왕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데가 야차같이 생긴 이가 옥좌에 앉아 있는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천령초가 무지 많았다.
천강이 흑색 절굿공이를 빼 든 뒤 놈에게 다가갔다.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녀석의 고개가 천강을 향했다.
"웬 놈이냐? 감히 건방지게 짐의 잠을 방해하는 이는?"
"여긴 개나 소나 다 짐이로군. 네가 이곳 주인?"
"큭큭.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이승의 벌레가 제 명을 스스로 재촉해 여기까지 들어왔구나."
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귀들의 왕보다 신장이 더 커서 그런지는 몰라도 올려다보는데 목이 불편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욱 불편해지는 뒷목. 천강은 신경질적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잘됐구나. 안 그래도 허기졌는데, 내 오늘 네놈의 살과 피로 내 굶주린 뱃속을 채우…… 크헉?"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게 끝?"
하단에 몽둥이를 맞아 공중에서 다섯 바퀴를 돌다가 땅에 떨어진 녀석이 천강을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목이 좀 편안해짐을 느낀 천강이 몽둥이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저, 저기…… 혹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요?"
"글쎄. 뭘까?"
"우,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음. 어차피 무저갱 길 인도자는 억중 하나면 충분하다. 잠깐 고민한 천강이 웃으며 말했다.
"아냐. 그냥 내가 직접 가져갈게."
"아뇨! 제가 직접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너 공자님이 뭐라 하신 줄 알아?"
"예?"
공자……님? 그게 뭐지? 먹는 건가?
놈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그런 녀석에게 천강의 대답이 이어졌다.
"허물이 있다면 버리기를 두려워 말라. 어차피 육신은 껍데기일 뿐. 내가 오늘 네게 새 삶의 기회를 선사해주마."
"아,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그럼 잘 가."
"자, 잠깐."
쿠구구구구.
단 한방에 놈이 절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억중이 후다닥 뛰어와 소리쳤다.
"대, 대단하십니다, 어르신! 이 강한 녀석을 단방에 보내버리시다니!"
감탄의 연속. 그러나 몽둥이를 회수한 천강의 시선은 한쪽을 물끄러미 향했다.
"나와라. 누구냐?"
"제법이군. 우리의 기척을 알아채다니."
허공에서 각각 흑색과 백색의 복식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머리칼과 수염 또한 흑과 백으로 선명히 나뉘어 있었다.
"추혼살개. 그리 모습을 드러내면 어찌하는가?"
"미안하이. 갑자기 공자님 말씀을 들으니 화딱지가 나서 말이야."
온몸에 흑빛이 감도는 이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눈 좀 감아주시게."
"쯧쯧. 그러다 대왕님께 걸리면 진짜 큰일 난다니까는. 알아서 하시게. 난 모르는 일일세."
백의를 입은 백발노인이 팔짱을 끼고 섰다.
살기를 띠며 다가오는 흑의를 입은 노인. 그를 바라보는 천강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기를 잠시, 다섯 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천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응? 너는 추혼살개?"
"뭐냐? 날 아는 놈이냐?"
알다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전생에 죽기 직전 싸웠던 마교 서열 1-10위 중 하나였다.
"내가 누군지 진짜 기억 안 나시나? 나 흑살마신 천강인데."
검은 옷을 두른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